좌파진영 ‘선명성’ 논쟁으로 확산된 북 3代세습

북한의 3대(代) 세습으로 촉발된 경향신문과 민주노동당 간의 논쟁이 범 진보·좌파 진영으로 확산되는 분위기다.


4대강 문제, FTA 문제, 쇠고기 수입 문제, 천안함 사태 등 최근까지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됐던 이슈들에 대해 범 진보·좌파 진영은 정치권이나 시민사회단체, 언론매체 할 것 없이 그동안 거의 한 목소리를 내왔다.


그러나, 지난달 28일 북한 노동당대표자회를 통해 김정일의 삼남 김정은이 후계자로 공식화되자 진보·좌파 진영은 이념이나 노선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진보·좌파 진영 내부의 논쟁은 먼저 경향신문의 사설로부터 시작됐다. 민노당이 북한의 3대 세습을 비판하지 않고 인정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자 경향은 지난 1일 ‘민노당은 3대 세습을 인정하겠다는 것인가’라는 사설로 민노당의 태도를 꼬집었다.


여기에 조승수 진보신당 의원과 손호철 서강대 교수 등도 “북한 3대 세습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밝히는 것이 진보진영의 책무”라며 비판에 동참했다. 특히 조 의원은 “3대 세습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하지 않는한 진보진영 역시 정상적인 조직으로 인정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경향 “민노당 3대세습 인정?”…울산시당 “절독” 선언


그러자 민노당 울산시당은 4일 경향신문 영남본부장 앞으로 보낸 통지문에서 “민노당에게 북한의 3대 세습을 비판할 것을 종용하고, 이를 비판하지 않는다고 하여 북한 추종세력, 종북의 딱지를 붙이고 있다”고 반발했다. 그러면서 “절독”을 선언했다.


이와 별도로, 민노당 부설 정책연구소 새세상연구소 박경순 부소장은 “단순히 아들이 후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단 한가지의 논리만을 절대화하고, 그것을 절대화하지 않는 모든 행위들을 친북·종북으로 몰아가는 것은 이성적 접근이 아니다”고 거들었다.


이 와중에 이정희 민노당 대표가 8일 자신의 블로그에 “자신과 민노당은 북한 3대 세습을 비판하지 않겠다. 이 때문에 비난받아야 한다면 받을 것”이라고 밝히면서 논쟁이 증폭됐다.


이 대표의 글로 인해 진보·좌파진영의 ‘선명성(鮮明性)’ 논쟁으로 확산되는 분위기다. ‘누가 진짜 진보인가?’라는 물음과 관련 , 북한 3대 세습에 대한 찬·반 표명이 또 하나의 가늠자로 부각되는 것이다. 이는 “봉건적 독재 세습에 반대하지 못하는 집단이 ‘진보’일 수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진다. 


이 대표는 자신의 글에서 “지금은 진보임을 인정받기 위해 북의 권력승계를 비난하다가, 뒤에 그 후계자와 대화의 상대방으로 마주앉게 되면 ‘능력 있는 사람’이라며 이전의 비난을 거둬들일 치사를 만들어내야 하는 궁박한 입장에 스스로 빠져 들어갈 생각이 나에게는 전혀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내가 생각하는 진보는 현실에서 출발해 한 걸음이라도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세력”이라며 “그것을 위해 말을 꾹 누를 수도 있는 판단력을 가진 것이 진보이다. 진보임을 인정받으려는 생각으로 시류에 맞춰 말을 보태기보다 자신 행동의 일관성을 지키는 것이 진보”라고 주장했다.


민노 “3대세습 비판 않겠다”…경향 “올바른 노선인가?” 


이에 대해 경향신문 이대근 논설위원은 9일 ‘이정희 대표에게’라는 글을 통해 “3대 세습 비판이 김정일 정권의 기분을 나쁘게 하는 측면 외에 민노당이 올바른 노선을 견지하고 있는가”라고 되물었다.


그는 또 “(민노당이) 한국 진보세력의 대표로서 제역할을 다하고 있다든지, 시민들과 공감하는 능력을 과시함으로써 민노당이 더 많은 지지를 받고, 그만큼 정치적 역량이 증대되고, 남북관계에 관한 민노당의 발언권도 제고된다는 측면에서 생각해 보지 않았는가”라고 반문했다.
 
진보진영의 대표 논객 진중권 씨도 자신의 트위터에 “외교적 전략으로서 상대 체제를 존중하는 것과 진보정당의 이념적 지향으로서 특정 체제에 대한 견해를 갖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며 “전혀 관계없는 두 사안을 뒤섞어 놓은 꼼수”라고 지적하고 나섰다.


진 씨는 “공당은 대중에게 자신들의 정치적 목표와 이념적 성향을 분명하게 밝힐 의무가 있다. 왜? 표를 달라고 하니까. 그게 싫으면 정당 하지 말고 그냥 개인으로 남으라”고 지적했다. 이어 “한 마디로 이 대표의 논리는 허접하다. 아마 본인도 자기 말을 안 믿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한국 사회에서의 진보는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3대 세습을 바로잡으려는 노력과 3대 세습을 비판하는 것은 분명 다르다”며 “남북관계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비정상적 권력이양에 대해 ‘바로잡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더라도 비판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며 민노당의 태도를 비판했다.


신 교수는 또 “내정 불간섭 원칙, 체제의 인정 존중의 원칙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민노당의 주장 역시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특정 국가의 반민주적 상황, 반인권적 상황에 대해서는 국제사회가 비난과 압력을 가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민노당의 이런 태도는 진보의 가장 근본적 가치를 정치적으로 왜곡할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 진보의 입장을 위태롭게 만든다”고 꼬집었다.


반면 역사학자 김기협 씨는 인터넷 매체 프레시안에 ‘경향신문과 이대근씨! 권력세습은 절대악이 아니요’라는 글에서 싱가포르의 사례를 상기하며 “권력세습 자체가 그렇게 끔찍한 일은 아니다”고, 민노당 편을 들었다.


“권력세습은 절대악 아냐”…”민노, 진보입장 위태롭게 해”


김 씨는 “북한의 내부 문제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흔히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을 무조건 나쁜 쪽으로 해석하는 경향을 보인다”면서 “그중에는 북한을 적대시하기 위해 무조건 북한을 비난하려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민주주의가 비용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민주국가도 큰 비용을 감당하기 힘든 비상사태 하에서는 일시적으로라도 민주적 권리를 보류한다”며 북한의 3대 세습을 옹호했다.


시사평론가 유창선 씨도 ‘경향의 민노당 비판은 진보판 색깔론’이란 글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다.


유 씨는 “경향은 진보정당의 앞길에 대해, 그리고 남북관계에 대해 하나는 생각했지만, 둘은 생각하지 못했다”며 “경향에게는 북한의 권력세습을 당장 비판해야 한다는 급한 마음만 있었지, 남북관계의 앞날을 헤아리는 심모원려(深謀遠慮)의 모습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어 “이번 경향의 민노당 비판은 진보 안에서의 색깔 덧씌우기였다는 점에서 더욱 수치스러운 장면이었다”며 “이제라도 경향신문이 사실 왜곡의 기사 제목을 단데 대해 사과하라”고 주문했다.


한편, 민주당 박지원 원내대표는 10일 3대 세습관련,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가(家)에서도 아들로 태어나면 왕자되는 거 아니냐”면서 “우리로선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되지만 이것은 우리 시각으로 보는 것이지 그 사람들이 보는 게 아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