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네바 북미회담 첫날 회의 성과와 전망

“예상한 수준이다. 북한도 미국도 판을 깨려하지 않을 것이다.”

북핵 현안에 정통한 고위소식통은 14일 제네바 북미 회담 첫날 회의에 대해 이런 평가를 내렸다. 가장 중요한 우라늄농축프로그램(UEP)과 관련한 북한의 태도에서 아직 만족할 만한 것은 아니지만 ‘의미있는 변화의 조짐’이 있다는 것으로 해석됐다.

북미 양측이 모두 파국을 원하지 않으며, 부시 행정부의 남은 임기와 북한은 물론 중국과 한국의 국내상황 등을 고려할 때 핵 협상을 진전시키려면 더이상 시간을 허비할 수 없다는 데 공감대를 형성한 만큼 이번 회담에서 뭔가 의미있는 접점을 찾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 역시 관건은 UEP와 핵확산 = 역시 가장 첨예한 쟁점은 UEP 문제와 시리아와의 핵협력(핵확산) 문제였던 것으로 북핵 외교가는 보고 있다. 이 문제는 일종의 북한의 ‘핵 과거사’에 해당한다.

2002년 10월 평양에서 있었던 미국 특사와 강석주 북한 외무성 제1부상 간의 대좌에서 비롯된 ‘HEU(고농축우라늄) 파문’을 둘러싼 진실게임을 현재 시점에서 다시 하는 양상이다.

북미 양국 대표단은 회담 첫날인 13일 미 대표부에서 낮 12시35분께부터 1시간동안 협상하고 각자 점심식사를 한 뒤 북한대표부로 자리를 옮겨 오후 4시30분께부터 4시간동안 마라톤 협의를 한데 이어 밤 11시 정도까지 시내 음식점에서 만찬을 겸한 집중 협의를 진행했다.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는 이날 밤 주제네바 미 대표부에서 진행된 기자회견에서 “북한과 매우 실질적이고 유용한 협의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힐 차관보는 “북한과의 회담에 진전이 있었으나 합의는 보지 못했다”고 강조했다.

외교 소식통들은 이에 대해 북한 측이 이번 회담에서 미국이 제기한 UEP와 핵확산 문제에 대해 ▲그동안 미측이 제기한 문제를 우리 내부의 소관인사들(군부)에 문의해본 결과 ‘과거에도 현재도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며 ▲미측이 필요한 정보를 줄 경우 이를 원하는 방식으로 해명하겠다는 입장을 보인 것으로 분석했다.

다시 말해 지난해말 미 국무부 성 김 한국과장이 평양에서 북한 측과 협의하면서 원심분리기로 사용할 수 있는 알루미늄관 얘기를 꺼내자 북한 측이 직접 그를 알루미늄관이 사용되고 있는 현장에 데려가 보여주고, 샘플을 건네주는 등 성의를 보인 것과 같은 맥락이다.

물론 힐 차관보는 여기서 만족할 수 없는 입장이다. 북한 측이 그런 적극적인 입장을 갖고 있다면 6자회담 차원에서 마련해야 하는 핵 프로그램 신고서에 관련 내용을 모두 담자고 설득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미측은 ▲북한이 원할 경우 신고서의 항목 가운데 플루토늄 부분과 우라늄 및 핵확산 부분을 분리해서 작성하되 관련 내용은 모두 충실하게 담거나 ▲우라늄 및 핵확산 부분은 아예 미북 간에 비밀문서에 담되 내용은 ‘정확하고 충분한’ 수준이 돼야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관측된다.

하지만 북한 측은 ‘우리의 성의를 믿어달라’는 덕담을 되풀이하면서도 현안을 문서에 명기하는 데는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을 것으로 보인다.

힐 차관보가 현지에서 기자들에게 “오늘 회담에서 우리는 지난해 12월 이후 가장 실질적인 논의를 했다”면서 “그러나 나는 우리가 도로를 포장하고 시멘트가 마르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으며, 여전히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것이 이런 맥락에서 읽힌다.

◇ 향방은 수뇌부 판단에 달려 = 일단 현지 협상대표단 입장에서는 ‘미흡하지만 이전보다 진전된 국면’을 조성한 상황이다. 후속 협의 여부가 결정되지 않았지만 양측 대표단은 첫날 회담 결과를 각각 평양과 워싱턴에 보고한 뒤 훈령을 기다리고 있다.

따라서 양측 수뇌부가 ‘협상할 만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면 첫날 양측이 제기한 방안을 세부적으로 다듬는 후속 협의를 진행할 가능성이 높다.

또 이미 `10.3합의’ 이행시한을 10주 가량 지난 시점임을 감안해 가급적 이번 회담의 상징성을 극대화하려 할 경우 모종의 합의결과문(성명 형식)을 발표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미진한 내용은 뉴욕 채널을 통해 다시 협의해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것이다.

제네바 회담이 이처럼 순조로운 양상을 보일 경우 북한은 미국과 약속한 대로 내용을 만들어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에 제출하게 된다.

만일 북미 양측이 우라늄과 핵확산 부분에 대해 ‘비밀신고’나 분리신고 양식을 택했을 경우 공개 신고서에는 플루토늄 등 제한된 내용만 담길 것으로 보인다.

의장국 중국은 이미 양측이 주장하는 내용을 병렬적으로 나란히 기재하는 방식인 ‘상하이 코뮈니케’ 방식을 제안한 바 있기 때문에 양측이 합의한 신고서는 의장국 중국의 입장을 감안해 다소 변형될 수는 있다고 외교 소식통들이 전했다.

중국은 곧바로 6자 수석대표회담 개최 등 다음 수순에 착수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은 북한이 강조한 대로 테러지원국 해제와 적성국 교역법 적용 해제를 위한 본격적인 수순에 착수할 가능성이 크다. 북한이 중국에 신고서를 제출하는 시점에 맞춰 테러지원국 해제를 위한 첫 절차인 의회통보 등에 들어갈 수 있다.

아울러 북한에 대한 중유 제공의 속도와 양도 보다 빨리, 그리고 많이 제공해 10.3합의 이행 속도를 높일 수 있다.

북한의 김계관 외무성 부상은 회담을 끝낸 뒤 기자들에게 “미국이 해주기로 한 부분이 늦어지고 있어 우리가 해야 할 부분도 늦추는 방향으로 잡고 있다”면서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해나갈 것인 만큼 미국도 자신들이 해야 할 부분을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양측 수뇌부에서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첫날 회의 결과에 부정적인 판단을 내리면 상황은 달라진다.

특히 미국 내 강경파들이 ‘힐 차관보가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협상을 이끌며 중요한 부분을 간과하고 있다’는 비난을 퍼붓고,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과 나아가 조지 부시 대통령이 힐 차관보의 협상결과를 수용하지 않으면 제네바 협상은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

더욱이 부시 행정부의 임기 등을 감안할 때 6자회담 차원의 비핵화 협상 전반이 흔들릴 수도 있다는 우려가 외교가에 나오고 있다.

그러나 외교 소식통들의 인식은 대체로 ‘파국은 오지 않을 것’이라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미국은 물론 북한도, 그리고 베이징 올림픽을 앞둔 중국, 새 정부 출범 후 ‘한반도 핵 리스크’를 원하지 않는 한국 등 관련국 모두가 현재의 협상국면을 이어가야할 이유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워싱턴과 평양에서 첫날 회담 결과에 ‘긍정적인 시그널’을 보낼 가능성이 크다는 게 외교가의 시각이다. 다만 세부항목이나 가장 민감한 부분은 여지를 남겨 협상 대표단이 운실할 폭을 넓혀줄 가능성은 있다.

정부 소식통은 “이번 회담으로 모든 것이 다 풀린다고 생각하는 것도, 역으로 안되면 모든 것이 무산된다는 시각도 모두 경계해야 한다”면서 “서서히 경색국면이 풀려가는 수순에 있고 관련국들 모두가 지혜를 모으고 있으며, 그런 방향으로 협상국면이 이어져갈 것”이라고 말했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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