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과 계승’ 보며 김정일 세습 옹호했던 ‘주사파’







북한의 3대 세습이 잘못된 처사라는 것은 양식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한다. 그런데 이런 진실을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북한의 3대 세습에 대한 비판이 대내외에 팽배하자 더는 보고 있지 못하겠다고 생각했는지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미디어 오늘’에 실린 정일용 연합뉴스 기획위원의 기고문도 그중 하나다. 누군가는 나와서 북한 3대 세습에 대한 공격의 부당성(?)을 제시해주기를 바란 진보·좌파진영 내 ‘종북주의’ 세력들에게는 답답한 가슴에 마치 소나기를 퍼붓듯, 정일용은 ‘일필휘지'(之)를 날리고 있다.


그는 전대미문의 왕조세습을 옹호하는 데 급급한 나머지 김정일 체제를 찬양·고무까지는 아니더라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워낙 황당하고 어이없는 이야기이지만 몇 가지만 옮기자면 그의 주장인즉슨 다음과 같다.


“북한에는 ‘세습’이란 개념은 없으며 나름의 엄정한 절차를 밟아 진행하는 ‘후계 계승’이 있을 뿐”이다. 2대 세습자인 김정일은 아버지의 후광은 둘째고 기실은 능력이 출중해 후계자로 발탁됐다. 김정일의 그 능력은, 전문가들이 북한의 자멸을 떠들 때 보란듯이 나라를 지켜낸 업적을 통해 여실히 입증이 되었다. 북한은 군사비 지출 때문에 생활수준이 떨어진 것이며, 자위력을 완성한 북한이 경제 분야에 눈을 돌리겠다고 공언하고 있는데 남한이 협력을 거부하고 있다. 김정일이 능력을 인정받아 마땅한 것처럼, 2012년 강성대국의 대문을 열어 제끼는 해에 ‘선물’을 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 김정은 대장이 등장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더욱이 미국의 부시 부자 대통령, 영국 및 스웨덴 왕실 등 선진국에서도 세습이 이뤄지고 있다. 세계 유일의 3대 세습이라는데 우리는 이미 60여 년간 지속되는 ‘친미정권’의 세습을 지겹도록 지켜보고 있다.”


가끔 어떤 이의 주의·주장을 듣고 있노라면 그 내용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기에 앞서 반박의 의지 자체가 꺽여버리는 경우가 있다. 워낙 어이가 없어서 아예 대꾸조차 하고 싶지 않게 만드는 글로 인해 서글픈 감정이 들곤 한다. 그럴때면 상대가 참 측은해지는 경우도 있다. 정 씨의 글이 딱 그런 경우가 아닌가 싶다.


정일용의 ‘3대 세습 옹호’를 위한 해괴한 논리들은 궤변에 가깝다. 문득 필자는 16~17년 전으로 시간 여행을 간 기분이다. 정일용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90년대 초 김정일의 후계 승계와 관련, 남한내 ‘주사파'(주체사상파) 안에서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주장했던 논리들과 어쩌면 저리도 판박이인지 모르겠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을 만큼 논리며 내용이 당시와 흡사해 과거 주사파 시절의 기억들이 생생이 떠오른다.


당시 필자는 주사파라면 다 읽고 토론하였던 ‘정통과 계승’이라는 북한발 책자를 탐독하면서 김정일 후계의 타당성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김정일 후계 당시 주사파가 폈던 이른바 ‘김정일 후계 Q&A’를 그대로 가져와 옮기고 있다. 그저 다른 게 있다면 김정은 세습에 와서는 김정일 세습의 정당성과 김정일의 위대한 능력이 입증이 되었다는 소재 하나가 추가되었을 뿐이다.


참으로 놀랍게도 우리나라에는 이런 사람들이 있다. 북한의 왕조세습을 이렇게 애써 이해하려 하고 옹호하려 하고 심지어 찬양하려는 자들이 있다. 정일용의 글을 읽다보면 그것은 가히 ‘김정일-김정은 3대 세습 만세론’이거나 ‘김씨왕조 세습찬양론’이 아닌가 싶다. 조선시대 이씨왕조의 ‘창세’를 칭송하고 우러른 현대판 ‘용비어천가’가 따로 없다.


그런데 정일용만이 아니라 ‘3대 세습 만세론’을 외칠 무리들이 우리나라에는 많다. 정일용이 그 첫 테잎을 의기양양하게 끊고 나왔을 뿐이다. 속으로 억눌러 메말라 버릴뻔 했던 ‘종북적 속성’에 단비가 내린 것이다. 자신을 대신해 노래를 불러준 ‘이심전심’, ‘동병상련’의 ‘김씨왕조찬양가’인 것이다.


사실 필자에게 정일용은 관심 밖이다. 애당초 그와 같은 종북주의자들은 그러고도 남을 위인들이다. 다만 정일용의 논리와 언사를 자칫 솔깃해 하는 사람들이 생길까 걱정이 된다.


우리나라에는 정일용과 동류는 아니더라도 애당초 ‘보수’를 죽도록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기준을 어떤 문제의 내용과 전개가 보수에 유리한가 아닌가로 삼는다. 특히 북한 문제는 더더욱 그 같은 잣대에 휘둘리어 ‘사실’과 ‘올바름’을 보고 부여잡지 못한다. 사리분별이 흐려지고 진실을 포기하고 만다.


그것이 정당하고 온당해도 보수가 비판하는 논리는 싫고 동참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부지불식 간에 내재된 생리이다. 급기야 그들은 단결한다. 그들 스스로도 인정이 될 만한 문제의식과 고민에도 불구하고 보수와 자신을 대비시킴으로써 그들은 결국 보수의 반대편으로 기울고 심지어 단결하기 시작한다. 북한의 행태가 옳고 그르고는 뒷전이 된다. 이번에도 그리 될까 그것이 걱정이고 안타깝다.


필자의 관심은 정일용 류가 아니라 양심적 진보주의자들, 살아 호흡하는 진보적 생활인들이다. 부디 고민하는 진보들, 사회 저변의 ‘의식하는’ 진보들이 이번만큼은 분별력을 가지고 정일용 류의 궤변과 비이성, 비양심에 휘둘려 ‘진실’을 ‘포기’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북한 3대 세습을 대면하는 많은 양심적 진보주의자들, 진짜 진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저 보수의 논리가 싫어서, 애당초 내 자리는 그 반대편이었으니까 이번에도 그저 적당히 포기하고 타협하며, 진보로 위장한 궤변론자들의 편에 서지 않기를… 침묵하지 말기를 소망한다.


정일용은 김일성이 죽은 후 “보란듯이 나라를 지켜낸 김정일의 업적을 인정하자”고 강변한다. 김정일이 후계자로 발탁되고도 남을 그 ‘위대한’ 능력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북한 주민들 최소 1백만에서 3백만명을 굶겨 죽인 당시의 참담한 북한을 이야기 하는 것인가. 주민들은 앉아서 굶어죽는데 3년치 식량을 사고도 남을 천문학적 액수를 아버지의 시신을 영구보존하는 대(大)토목공사에 쏟아 부은 부패하고 타락한 독재자의 나라를 이야기하는 것인가.


굶어보지 않은 자가, 배고파 울어보지 못한 그가 어찌 알겠는가. 김정일 정권 하 북한 인민의 고통을…수백만 탈북자들의 죽음보다 더한 핍박과 설움을 그가 알겠는가. 물질적 충족과 민주주의, 인권의 대한민국 땅에서 모자람 없이 누린 그의 눈에는 북한의 세습독재가 “특색있는 정치체제요 작동방식”으로 보이나 보다. 정일용의 궤변이란 그저 풍요의 달콤함이 빚어낸 호사스런 언설(言說)에 다름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