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구호’ 통한 세뇌정책에 역풍 불기 시작했다

북한 후계자 김정은이 ‘정치구호’에 실명으로 등장했다. 조선중앙TV가 11일 방송한 다큐멘터리 영화 ‘민족 최대의 명절 2월16일’에는 군부대 공연 후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사진 속에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김정일 동지와 존경하는 김정은 대장 동지를 위하여 한목숨 바쳐 싸우자’는 글귀가 담긴 플래카드가 나왔다. 후계자 김정은이 구호에 실명으로 등장한 것은 북한 당국이 김정은 우상화를 본격화하고 있다는 ‘신호’로 해석되고 있다. 


북한은 ‘구호(口號)왕국’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정치구호가 넘쳐난다. 김정일 체제를 지탱하는 양대 축인 당(黨)과 군(軍)은 대중을 조직·동원하기 위하여 일정한 사상, 과업, 요구 등을 담은 구호를 해마다 2천여 개씩 내놓는다. 이러한 ‘구호’는 주민 이동의 제한, 외부 정보의 차단, 자유로운 통신의 제한 등과 함께 ‘사상통제’의 주요 도구로 활용됐다. 특히 김정일 일가(一家)의 위대성과 체제결속을 간결한 문구로 집약한 구호는 마치 ‘주문’과 같은 효력을 발휘하며 ‘김씨 왕조’를 지탱해 온 중요수단으로 이용됐다.  


북한에서 정치구호가 담긴 플래카드나 선전 포스터 등은 인민대중의 동원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접근성과 명료성, 훈계와 정보제공을 추구하는 정치구호는 포스터와 미디어, 정치 교육을 통해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주민들의 뇌리 속에 각인, 체제유지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 역할을 담당해왔다. 


그러나 외부정보 유입과 계속되는 경제난에 따른 주민 의식의 급격한 변화는 ‘정치구호’를 통한 북한 당국의 바람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 최근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 이 같은 ‘정치구호’가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있는 것은 그 신호로 볼 수 있다. 현재 주민들은 극심한 생활고(苦)에 따른 불만을 북한 당국이 선전하는 ‘정치구호’를 이용해 드러내고 있다. 한 두 단어만 고치면 내용자체가 달라지고 대다수의 주민들이 이 구호를 인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행처럼 번지는 형국이다.


실례로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1980년대 중반 등장)는 구호는 주민들의 잘못된 행동을 합리화하는데 사용된다. 군인들이 민간인의 재산을 도둑질하거나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물건을 훔쳐 장마당에 내다 팔 때, 또 농장원들이 밭에서 농작물을 무단으로 가져갈 때 이용된다. 협동농장을 자신의 농장과 같이 보살피고 가꿔야 한다는 의미인 ‘농장포전은 나의 포전이다'(1987년)는 배가 고픈 주민들이 농장에서 곡식을 훔칠 때 “당연히 내 농장인데 이건 도둑질이 아니지”라며 이 구호를 쓴다.


1990년대 말 등장한 ‘고난의 천리가 가면 행복의 만리가 온다’는 구호는 현재 “고난의 천리를 가고 나면 그 뒤에 고난의 만리가 기다린다”로 재해석되고 있고,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는 “저희나 웃으며 가지 왜 우리까지 가자고 하나” 등으로 당국에 대한 불만을 표현하는데 쓰이고 있다.


김정일 일가의 위대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구호도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김일성 동지와 김정일 동지는 만민의 위대한 태양’이라는 구호는 “태양이 맞다. 그래서 가까이 가면 타죽고 멀어지면 얼어 죽고 한다”로 회자되고 있다. ‘우리식대로 살아나가자’는 구호는 “당에서 뭐라고 해도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살아가자”는 뜻으로 사용된다.


이처럼 체제선전 구호들이 조롱의 대상이 된 것은 김정일 정권에 대한 불신이 깊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구호를 통한 주민 세뇌 정책이 역풍(逆風)을 맞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아직은 이 같은 분위기가 집단적인 행동으로 표출되지는 않고 있지만 김정일 체제의 내구성에 심각한 균열로 읽혀질 수 있다는 점과 구호의 파급 속도가 빠르다는 점에서 주목되고 있다. ‘~김정은 대장 동지를 위해 한목숨 바쳐 싸우자’는 북한 당국의 바람이 “목숨이 둘도 아닌데 한목숨 바치면 죽자는 소리인가”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치고 나면 어떻게 사나” “구호를 만들어 낸 놈들은 목숨이 몇 개 되는 모양이다” 식의 조롱으로 번질 날도 멀지 않아 보인다.  


이집트 무바라크 정권은 카파야(그만!)라는 구호로 대변된 성난 민심에 떠밀려 무너졌다. 지금은 민심의 동요를 감지하지 못하고 있겠지만 김정일·김정은 세습왕조 또한 ‘물러가라’는 구호의 물결에 항복할 날이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