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장관, ‘김정일 말씀’ 경청만 하다 왔나?

서로 뺨을 때리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상대방이 갑자기 내 뺨을 때렸다. 울고 있는 내게 와서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을 전하지는 않을망정 “서로 뺨을 때리지 않기로 한 우리의 약속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한다.

바로 이런 꼴을 정동영 통일부장관이 북한에서 당하고 왔다. ‘6ㆍ15 민족통일대축전’의 대미를 장식한 정-김 회동에서 김정일은 정장관에게 “한반도비핵화선언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김정일의 화려한 거짓말

1991년 12월 31일 채택되어 이듬해 1월 20일 발효된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남북공동선언’은 “남과 북은 핵무기의 실험, 제조, 생산, 접수, 보유, 저장, 배비, 사용을 하지 아니 한다”고 못 박았다. 또한 “남과 북은 핵재처리시설과 우라늄농축시설을 보유하지 아니한다”고 약속하였다. 이 선언을 이행하기 위한 ‘공동위원회’까지 구성해 논의를 이어간 바 있다.

그런데 북한은 핵보유를 선언했다. 핵무기를 양산(量産)하겠다는 발언도 여러차례 했다. 최근에만 해도 외무성 부상 김계관이 A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핵보유를 인정했고, “더 많은 핵폭탄을 제조 중이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 바 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한반도비핵화선언은 여전히 유효하다니, 김정일은 그동안 외국에 살다 돌아왔나? ‘앞으로 핵을 포기하겠다는 표현’이라고 하더라도, 먼저 사과부터 해야 정상이다. 정동영장관은 김정일의 이런 엉뚱한 이야기를 그저 듣고만 있었던 것인지 궁금하다.

게다가 김정일은 “우리는 6자회담을 포기하거나 거부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난 2월 10일의 외무성 성명은 무엇인가. “우리는 더는 6자회담에 참가할 수 없으며 이미 핵무기를 만들었다”고 선언한 그 성명 말이다.

시원시원하고 결단력 있는 지도자?

김정일은 그것을 미국 탓으로 돌리며 “미국이 우리를 업신여겨 맞서보려고 그랬다”고 말했다지만, 미국과 특별한 마찰이 없던 지난해 9월에는 남한의 과거 핵물질 실험을 트집 잡으며 6자회담을 거부했다. 자기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무슨 핑계를 대서든 거부하는, ‘약속’이나 ‘신의(信義)와는 거리가 먼 김정일의 행태를 우리는 줄곧 보아왔다.

상황이 이렇게 분명할진대 정동영 통일부장관은 남한에 돌아와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시원시원하고 결단력 있는 지도자”라는 ‘용비어천가’를 읊어댔다. 김정일의 새빨간 거짓말을 고개 끄덕이며 듣고만 온 것이다.

김정일이 이번에 이야기했다는 “우리는 핵을 가질 이유가 없다” “NPT에 복귀하고 핵사찰을 모두 받겠다”는 말 역시 정장관은 곧이곧대로 믿고 돌아온 것 같다. 가질 이유가 없는 핵을 왜 가졌는지, 더 많이 만들겠다고 까지 했는지 따져 묻지 않고, 그럼 왜 과거에는 핵사찰을 그렇게 거부하고 사찰단까지 쫓아냈는지도 묻지 않은 것 같다.

정동영 장관, 언젠가는 용도폐기

김정일이 이번에 핵문제와 관련해 한 이야기는 하나 마나한 이야기들이다. 과거와 마찬가지로 김정일은 어떤 이유를 들어서든 약속을 파기하며 자기 갈 길을 갈 것이다. 당분간 긴장고조와 화해 협력 사이의 줄타기를 하면서 남한과 국제사회를 혼란스럽게 하여 핵양산(量産)의 시간을 벌고 궁극적으로 핵보유를 어물쩍 인정받겠다는 것이 김정일의 야심찬 계획이다.

이번에 한껏 고무되어 돌아온 정장관은 당분간 김정일의 연극에 삐에로의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다 용도가 다하면 헌신짝처럼 버려질 것이다. 북한이 정장관을 “인간추물”이라 부르던 몇 달 전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것은, 김정일에게는 손바닥 뒤집듯 쉬운 일이다.

곽대중 논설위원 big@dailynk.com

소셜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