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회담, 북에 현금줘야 가능”

김정일 정권에게 올 해는 각종 중요행사에 분주한 ‘꺾어지는 해’다. ‘선군정치 10년’ ‘당 창건 60주년’ ‘조국해방 60주년’ ‘6.15 공동선언 5주년’ 등 커다란 기념행사가 연이어 개최되고, 김정일의 절대독재권력 강화를 위한 선전∙선동사업에 힘을 쏟아야 하는 1년인 것이다. 그러나 국내행사에 신경을 집중하려 해도 내외정세는 너무나 엄혹하다.

엄중한 북한의 내외정세

‘7.1 경제관리개선조치’ 이후 북한 주민의 살아가기 위한 노력은 눈물겹기 그지없지만, 장마당에서 판매되는 생산물의 가격은 여전히 비싸고, 힘겨운 주민생활의 개선에는 거의 도움되는 것이 없다. 기아선상에 처한 식생활에 변화는 없고 공장가동률도 ‘고난의 행군’ 때를 겨우 벗어난 정도다.

엄중한 상황을 가중시키는 것은 북한을 이라크, 이란 등과 함께 ‘악의 축’으로 보고, 체제붕괴를 위한 ‘대북압살정책’을 추진했던 부시 대통령이 재선된 것이다. 미국이 북한에 대한 강경자세를 한층 강화할 것은 명확하다.

한편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다섯 사람의 납치피해자와 그 가족을 송환했지만, 최근 요꼬다 메구미의 유골이 다른 사람의 것으로 밝혀지고 일본국민의 대북 불신과 분노가 높아지면서 북일 국교정상화 교섭은 일정에 오를 가능성조차 없어지게 되었다. 최근 주변 국제정세는 북한에게는 매우 불리하고 핵 폐기를 요구하는 국제적 압력은 날이 갈수록 강화되고 있다.

경제난과 핵폐기 압력의 강화, 대일관계의 지지부진 등 대내외 정세 속에서 북한이 기댈 수 있는 상대가 있다면 바로 한국이다. 작년에 노무현 대통령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만이 북한의 체제보장∙경제재생을 위한 원조를 받을 수 있는 길이고, 한국은 그에 상응하는 대담한 지원을 제공할 용의가 있다고 강조했었다.

특히, 작년 가을에 노무현 대통령은 ASEM, APEC, ASEAN+3 그리고 영국, 폴란드, 프랑스, 일본 등을 방문해서 일련의 대북발언을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그는 “핵 보유가 자위수단이라는 북한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11월 12일, LA), “누구든 한국국민의 의사에 반하는 해결방법을 강행할 수 없다”(12월 1일, 런던), “북의 붕괴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원치도 않는는다.”(12월 5일, 바르샤바), “북의 레짐 체인지를 희망하는 나라의 사람들과는 아무래도 호흡이 맞지 않는다. 혹 누구랑 얼굴을 붉혀야 한다면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없다.”(12월 6일, 파리) 라고 말했다.

이에 멈추지 않고, 더욱이 “북의 붕괴를 희망하지 않는 나라는 중국과 한국”이라고 굳이 나라 이름까지 거명하면서 “미국과 일부 서구국가에서 북의 체제가 결국 붕괴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북한이 더욱 불안해 하고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이렇게 해서는 북한 핵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고도 말했다.

한국의 역할은 ‘민족공조’

노무현 대통령은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북한에 대하여 “체제보장을 약속하고 각종 제재를 풀고 필요한 경제지원을 제공하면, 북한당국이 개혁개방으로 나갈 기회를 주는 것이다”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일련의 발언을 듣고 북한은 “우리의 핵 억제력이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민족을 수호하고 민족의 운명을 지키기 위한 자위적 억지력이라는 것을 내외가 공인하고 있고, 이에 대해서 수일 전에 남조선 당국자도 인정하였다”(12월 6일 조선평화옹호전국민족위원회 담화)라는 주장까지 발표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국의 정책 담당자들은 작년 7월의 북한에 의한 김일성 사망추도 조문 사절단의 방북 불허, 486명의 대규모 탈북자의 한국 입국을 이유로 중단된 남북대화가 재개되기 위한 환경 정비에 노력하고 있다.

현재까지 표면화되지는 않았지만 남북간에는 ‘물 밑으로 고위당국자의 접촉’이 진행 중이라는 정보가 있고, 특사파견을 위한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구체적인 보도도 계속 나오고 있다. 그러나 특사교환이든 정상회담이든 북한 핵문제 해결과 결부되지 않는 한 의미가 없다. 문제는 북한이 미국의 요구를 어느 정도 받아들일 것인가 관건이다.

제2기 부시정권이 출범하고 대외정책을 확정하는 것은 3월 이후인데, 그렇다면 제4차 6자회담의 개최 시기도 그 후로 될 가능성이 높다. 6자 회담의 틀 내에서 미국과 북한의 교섭이 가능해지면, 북한은 한국의 ‘중재역할’ 및 ‘주도적 역할’을 기대할 필요가 없다. 북한 핵문제 해결에 있어서 한국의 역할이 필요하다면 소위 ‘민족공조’를 구현하는 데 있다. 군사안보문제는 미국과 직접 교섭한다는 것이 북한의 기본 자세이기 때문에 한국의 개입은 별로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북한이 정상회담에 응할 경우는 2000년 6월 김대중 前대통령의 평양방문 때와 같이 현금을 주든가 또는 김정일의 통일방식에 한국측이 동의하는 공동선언을 채택하는 경우일 것이다.

남북대화는 북의 필요성 때문

노무현 정권은 이러한 대가를 지불하면서까지 정상회담을 개최할 것인가. 어떤 사람은 노무현 정부에 대하여 국민의 지지율이 급락하고 있기 때문에 정상회담은 충분한 매력을 갖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금년 중에는 그러한 유혹에 얽혀들 만큼 한국정세가 악화될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북한의 입장에서 보면 식품과 비료 등 시급한 인도적 지원과 외화획득을 위해 남북교역과 경제협력을 위한 장관급 혹은 그 이하의 실무자 회담의 개최가 필요하다. 예컨대 개성공단 조성사업의 조기완성, 금강산관광사업의 확대, 또는 무역의 활성화를 위한 제반조치 등을 위해서 남북대화의 재개가 필요한 것이다. 또 서해 NLL선을 제거하고 남북왕래를 위한 추가조치를 강구하기 위해서도 남북군사회담 개최가 필요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대남 통일전선의 확대를 위해서도 사회, 문화, 혹은 통일 관련 민간단체와의 대화재개 및 상호방문은 필요하다. 글의 모두에서 지적한 것 같이, ‘꺾어지는 해’에 개최될 선동집회의 효과 확대를 위해서도 남한 내 친북단체를 초청하거나 행사의 공동개최 등이 필요하다.

이렇게 보면 금년의 남북관계는 북한측의 필요성과 주도 하에 적당한 수준의 각종 접촉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다. 문제는 이것이 남북관계 개선에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북한당국은 체제유지에 해로운 문제(유해사상의 유입)가 발생한다든지, 미국의 북한인권법과 같은 ‘북한압살전략’을 조장한다고 판단될 때는 남북대화를 중단할 것이다.

북한당국이 남북대화에 적용하는 기준은 남한당국이 ‘민족공조’에 어느 정도 호응하는가 하는 것이다. 노무현 정권이 역대 어느 정권보다도 ‘반미민족공조’에 열심이라고 판단되면 문호를 열고 환영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폐쇄된 문을 완전히 닫아걸지는 않는다 해도 일부 개방에 머무를 것이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2005년은 작년에 노무현대통령이 말한 일련의 ‘대북발언’이 어느 정도 북한 당국자에게 받아들여지는가를 살펴볼 수 있는 1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강인덕 / 본지 고문 (前 통일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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