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대신해 북한 수용소 수인들 구출하겠다”

북한민주화운동본부 이지혜 국제변호사는 2009년 미국 워싱턴 D.C.에서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평범한 시각으로 보면 그녀는 노력 여하에 따라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가  보장 될 수 있는 소위 능력자다. 그런데 이 능력자가 일하는 곳은 대형 로펌이나 대기업이 아닌 국내 탈북자 단체다.


이 변호사가 단체에서 일하면서 받는 보수는 생활비에도 못 미친다. 북한 주민들의 인권개선을 위해 활동하는 NGO들의 사정이 대부분 그러하듯 그가 몸 담고 있는 북한민주화운동본부의 재정도 넉넉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현재 국제변호사란 전도유망한 직업을 제쳐두고 북한주민들을 위한 정치범 수용소 해체 활동을 벌이고 있다. 북한 수용소 해체에 발벗고 나선 ‘범상치 않은 이유’를 들어보기 위해 그의 사무실을 찾았다.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 부모님께서 반대를 많이 하셨을 것 같다. 부모님의 반응은 어땠나?  









▲이지혜 북한민주화운동본부 기획실장은 “정치범 수용소 해체를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김봉섭 기자


“물론 좋아하셨다면 거짓말이고, 반대보다는 많이 서운해 하셨다. 로펌이나 대기업에 취직할 줄 알았는데, 북한인권 운동을 한다고 하니 실망하신 눈치셨다. 하지만 곧 내 선택을 믿어주셨고, 따라주셨다. 지금은 누구보다도 내 일에 많은 응원을 해주신다. 오히려 주변 사람들에게 북한인권에 대해 이야기 해주시고 우리 단체를 많이 홍보해주신다.”


-주변 친구들이나 지인들의 반응은 어떠한가?


“격려해 주시는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기해 하는 것 같다. 지인들이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자세히 모르기 때문에 그에 대해 적극적으로 홍보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며칠 후 한동대국제법률대학원 졸업생 모임에서 초청이 와 강연을 간다. 그곳에서 북한 주민들의 인권 유린사례와 북한체제의 실체 그리고 정치범 수용소 해체의 필요성을 설명할 예정이다. 또한 이를 위해 북한민주화운동본부가 활동하고 있는 내용을 알리려고 한다.”


-북한민주화운동본부에서 정치범 수용소 해체를 위해 활동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나는 의도하지 않게 ‘북한’과 지속적인 인연이 있었던 것 같다. 북한과 인연을 처음 맺은 것은 대학원 재학시절, 북한인권법학회에서다. 그 때 북한인권에 대해 처음 접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북한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그 후 미국 로스쿨 유학을 갔을때나, 한국으로 귀국했을 때나 탈북자들을 만나는 기회가 자주 생겼다.


미국 유학 당시에는 어떤 탈북자가 딸을 찾는다고 내가 다니던 교회에 찾아와 그의 사연을 들었던 경험이 있다. 또한 한국으로 귀국해 취업 준비를 할 때에는 한 탈북자 분이 직접 찾아와 다짜고짜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후에 알고보니 그 분은 내가 북한민주화운동본부의 사정이 어려워 그 활동을 도우며 취업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에 나를 직접 찾아와 격려해준 것이다. 그 탈북자께서 “젊은이들이 북한인권에 신경도 안 쓰는데 관심을 가져주어 감사하다”고 말씀해주셨다.


이처럼 탈북자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사연을 듣다보니 “아 내가 이 길로 나가야 하나보다”고 느끼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 후 일을 돕던 북한민주화운동본부 김태진 대표를 찾아가 정식으로 일을 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그렇다면 본업인 ‘국제 변호사’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는 말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없다. 어렸을 적 장래희망이 변호사도 아니었다. 지금은 내가 최선을 다해서 ‘미국 변호사’ 자격증을 딴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또, 내가 변호사로서 공부했던 것들이 북한정치범 수용소 해체를 위해 많은 부분에서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김정일 ICC 제소 운동에 필요한 국제적 법률 자문을 맡는 등 굳이 본업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지금 내 일에서 그동안 쌓았던 지식을 활용할 곳은 많다고 생각한다.


-북한민주화 운동본부 기획실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향후 어떤 사업을 기획중인가?


“‘혜원·규원 구출 운동’을 본격적으로 벌일 예정이다.


이 아이들은 독일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따고 북한 공작원에게 포섭돼 북송된 오길남 박사의 딸들이다. 오 박사는 80년대 독일에서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을 해왔던 모양이다. 그 때문에 한국정부로부터 입국 금지 처분을 받았고, 그 때 북한 공작원이 접근, 그에게 교수직을 제안하는 달콤한 유혹을 했다. 오 박사는 그 유혹에 넘어가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북한으로 건너갔다.


이후 북한에서 대남방송요원으로 활동하던 오 박사는 북한 실체를 깨닫고 탈출했지만 그의 아내와 아이들은 요덕수용소에 수감됐다. 오 박사의 한 순간 잘못된 선택으로 아무 죄 없는 아이들이 고통 받고 있는 셈이다. 이들을 구하기 위한 활동을 기획하고 있다.” 


-구출운동에 진척이 있는가?


“현재는 ‘혜원·규원을 함께 구해내요’라는 문구가 쓰인 엽서를 주변 지인들에게만 천원의 후원금을 받고 참여를 이끌어내고 있다. 이 사업은 지난 12월부터 시작했는데 이미 3백여 명이 엽서를 통해 ‘혜원·규원 구출 운동’에 함께할 것을 약속했다.


천명의 후원자가 모이면 공식적인 기자회견을 열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할 것이며 연말까지 백만 명을 모으는 것이 목표다. 백만 명을 모은 후에는 허무맹랑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모은 엽서를 북한당국에 전하면서 그 아이들을 풀어줄 것을 촉구할 것이다.”


-엽서를 북한당국에 전한다 해도 아이들이 석방돼 국내에 입국할 가능성은 희박한 것 같은데. 


“희박하다고 생각하기보다는 한번 해볼만 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지금까지 정치범수용소 해체를 위한 기자회견을 열면 정치범수용소 생존자들의 증언을 하는 등 단순하게 진행됐다. 하지만 그것으로만으로 수용소는 꿈쩍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우리가 그 안의 사람들을 직접 빼오는 노력을 하자는 취지에서 이번 사업을 기획했다. 더욱이 최근에는 요덕수용소 혁명화구역(일정기간이 지난 수감자는 석방시키는 구역)에서도 주민들을 풀어주지 않는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때문에 마냥 수용소에서 사람들이 나오기를 기다릴 수 없게 된 것이다.


과거 서독에서도 정부 차원에서 동독의 정치범 석방 운동을 벌여 그들을 석방시킨 사례가 있고, 일본에서도 요코다 메구미 구출을 위해 지속적으로 활동을 해왔다. 물론 요코다 메구미는 돌아오지 못했지만 납치당한 7인은 고향의 품에 안길 수 있었다. 이 같은 사례는 독일·일본 정부의 주도로 이뤄진 결과다. 하지만 우리나라 정부는 이와 관련, 직접적으로 나설 수 없는 특수한 상황에 처해있다. 때문에 우리 단체가 그 역할을 대신하려고 한다.


우리 단체가 이 운동을 지속적으로 벌이면서 국제적 이슈로 만들고, 국제 캠페인으로 발전시킨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이 운동의 확장의 일환으로 북한민주화운동본부는 오는 3월 제네바에서 열리는 유엔 인권위원회 회의에도 참석할 계획이다.”


이지혜 실장은 인터뷰 말미에 북한민주화운동본부의 미래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우리의 최종 목표는 홀로코스트 박물관처럼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를 기억하는 박물관을 건립하는 것”이라면서 “지금은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정치범 수용소와 관련된 작은 전시회들을 지속적으로 열면서 그 꿈을 조금씩 실현시킬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현재 ‘혜원·규원 구출운동’은 삼백여 명이 참여하고 있다. 이지혜 실장은 “천명이 모이면 기자회견을 열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김봉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