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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측의 일방적 통보로 열차시험운행이 무산된 지 하루만인 25일 북측이 12차 경제협력추진위를 6월초 제주도에서 갖는 데 동의한다는 통지문을 보내왔다.
지난 22일 남측은 북측에 29일 경추위 개최를 제안했고, 북측이 시험운행 취소 바로 다음날 날짜를 변경하여 동의해온 것이다. 정부는 일단 경추위에 참여하되 북측으로부터 납득할만한 열차운행취소에 대한 해명을 받은 후에나 대북지원 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김천식 통일부 남북경제협력국장은 26일 “열차시험운행 재개문제가 먼저 풀려야 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남북대화는 어떠한 경우에도 회담이 열려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북한의 약속 파기에 대한 국민들의 비난여론이 높은 만큼 북측의 납득할 만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12차 경추위에서 어떤 결실이 나오기 힘들다고 보고 있다. 북측의 일방적 약속파기에도 불구하고 대북지원을 계속할 경우 ‘퍼주기’ 여론이 급속히 악화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정부는 ‘시험운행 재개 없이는 지원도 없다’는 단호한 자세를 계속 취할 것인가.
김 국장은 “단선적 대응을 하는 것보다 국민여론을 고려해 대응하겠다. 남북관계가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잘 극복하고 여기까지 끌고 왔다. 희망을 버리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따라서 일단 냉각기를 거쳐 여론이 누그러지면 경협을 빌미로 한 대북 선물공세가 시작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전망된다.
지금까지 남북협상을 보면, 6월 초에 열릴 12차 경추위에서는 북한으로부터 납득할만한 조치보다는 ‘유감 표명’ 수준의 립 서비스를 들은 후, 남북화해 제스처가 오가며, 대북지원의 기지개가 펴지는 수순을 밟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이번 경추위에서 비료 10만 톤을 비롯해 식량 50만 톤 추가지원과 신발•비누 등 경공업 원자재 지원 합의서 체결을 요청해 올 예정이다.
본격적인 남북공조 분위기는 6월 하순 DJ 방북이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DJ 방북에서 남북공조를 통한 한반도 정세 변화의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정부가 ‘퍼주기’ 여론만 의식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DJ 방북과 관련, 가뜩이나 김정일의 눈치를 보고 있는 마당에 냉각기를 장기화할 경우, 향후 남북공조의 판 자체가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DJ 방북에 거는 남한 정부의 기대를 잘 알고 있는 김정일의 기교가 눈에 띄는 대목이다. 김정일은 자신이 어떤 억지를 부려도 DJ가 ‘원군’이 돼 해결해주는 꽃놀이패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김정일은 가만히 앉아서 식량, 비료, 수 백억원 대의 신발과 비누 자재 등의 ‘묻지마’ 대북지원을 추가로 받고, 열차운행에 대한 보상도 두 배로 불리는 재주를 부리고 있는 셈이다.
DJ 방북 전 6.15 공동행사와 경추위 실무회담을 개최하고 대북 추가지원과 합의서 체결문제를 논의하면서 평양에 긍정적 시그널을 보낼 가능성도 있다. DJ 방북을 통해 남북협력 분위기를 조성하고, 7월 부산에서 개최되는 장관급 회담에서 남북간 긴장국면을 해소하는 수순이 예상된다.
국민여론은 이 기회에 북한의 버릇을 고치기 위해 ‘회초리’를 단단히 들어야 한다는 주문이 나오고 있다. 아쉬운 쪽은 북한인데 남한이 대북성과에 집착해 북한 눈치만 살피는 관행을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대북지원에 대한 국민적 합의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남한이 양보해야 북한이 따라온다는 ‘무조건 포용정책’이 8년을 거치면서 이제 남북관계가 ‘황당’ 수준으로까지 가고 있다. 북한은 남한 정부가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시험운행을 하루 전에 취소하고도 바로 다음날 대북지원을 요청할 만큼 뻔뻔해진 것이다.
이종석 통일부 장관은 취임 일성으로 “약속이 지켜지는 남북관계를 만들겠다”고 했다. 하지만 약속을 깨도 보상을 주는 상황에서는 그런 관계가 형성되기 어렵다.
정부가 DJ 방북과 7월 장관급회담 성과를 위해 조급하게 대북지원에 다시 나설 경우, 정부는 조직적인 국민의 저항에 부딪힐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이제 국민들이 점점 더 각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신주현 취재부장 shin@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