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남북군사회담에 ‘올인’해선 안된다

I.
지난 19일 미중정상회담에서 남북 직접대화의 필요성이 언급되자마자, 북한은 대남 통지문을 통해 “천안호 사건과 연평도 포격전에 대한 견해를 밝히겠다”고 나섰다. 중국이 6자회담 재개 주장에 대해 미국이 “먼저 남북대화부터~”라며 조건을 달자, 북한이 재빠르게 움직임인 것이다. 북한이 ‘진정한 북비핵화를 위한 6자회담 복귀’를 생각하고 있을리 만무하지만, 일단은 중국의 주장에 알아서 기는 모양새를 보이고 있다.


사실 6자회담은 북한이 필요로 하는 쌀과 연료, 돈을 만들어내는 요술방망이 같은 역할로 전락한지 오래다. 북한은 중국의 뒤에 숨어서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한·미·일의 소망을 이용해 때로는 어르고, 애먹이고, 애먹이다 가끔씩 ‘합의’해주는 쑈를 통해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챙겨왔다.


미국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의 핵개발에 대해 특별한 대응책이 없다는 자격지심 때문인지, 아니면 “우리도 노력 중이다” “북핵을 폐기시킬 수는 없지만, 그래도 관리는 할 수는 있다”라는 점을 미국 국민들과 국제사회에 보여주기 위해서인지, 이 쑈에서 발을 못빼고 있다.


김정일로서는 미국의 대선 때마다 태평양을 건너 찾아오는 편서훈풍(偏西薰風)을 또 한번 이용하려 들것이다. 김정일은 온갖 평화공세를 재탕하며 다양한 대미 대화 제스쳐를 보이기만 하면 된다. 재선을 준비하고 있는 오바마는 이미 발을 들여 논 대북유화국면에서 발을 빼기 어렵다. 문제는 이런 찬스를 가로 막는 장애물이 바로 이명박 정부라는 점이다. 김정일은 이 장애물을 빨리 넘어가고 싶을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북한의 대화공세에 예비회담을 제의하고 그 의제가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에 대한 북한의 책임인정’이 되어야 한다고 못박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북한이 한국정부의 요구를 들어줄리 없다고 예상한다. 북한은 자신들이 천안함 폭침과는 무관하며, ‘남조선 괴뢰’가  자신의 영해에(물론 아무런 근거도 없는 주장이지만) 먼저 사격을 하였기 때문에 자위권 발동 차원에서 연평도 지역에 포격을 감행했다고 강변할 것이다.  


그런데 미-중의 남북간 대화 주장과 북한의 ‘오리발 작전’이 결합할 경우 국제무대에서 한국정부의 입장이 완전히 뭉개지는 결과로 귀착될 수도 있다는 딜레마가 있다. 북한에게 얻어맞은 쪽은 분명히 한국정부와 한국 국민들이다. 6자회담이 재개된다고 해도 곧장 북핵폐기 수순이 보장되는 것도 아닌 마당에 천안함·연평도 사건에 대해 북한으로부터 만족할 만한 사과 및 재발방지 약속 조차 받아 내지 못한다면 앞으로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설자리를 잃고 말 것이다.


사실 남북대화 재개 전제조건으로 우리정부가 북한에 요구하고 있는 ‘선(先)사과 및 재발방지 약속’은 그 자체가 그렇게 강한 요구도 아니다. 북한이 천안함·연평도 도발을 일으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정부의 6자회담 재개 전제는 “북한이 핵폐기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는 행동을 미리 보여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북한의 천안함·연평도 도발 이후에는 오직 “북한은 대남도발에 대해 사과하라!”는 것으로 축소된 느낌이다. 이런 일은 지금까지 부지기수(不知其數)로 있어왔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북한에 대해서는 ‘마지막으로 진 빚만 갚아도 그냥 넘어 간다’는 것이 관례가 된 것 같다. 과거 빚이 누적되지 않는 북한의 입장에서는 ‘돈 뜯어내는 협상’이 필요할 때마다 ‘일단 도발부터 하고 보자’는 식의 유혹을 떨치기 힘들 것이다.


II.
이렇게 보면 천안함을 폭침시키고 연평도 민간인 지역에 포격 도발을 감행한 김정일의 ‘앞을 멀리 내다보는 깊은 전략적 숙고’가 빛을 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김정일의 처지는 그렇게 아름답지가 않다. 사실 급한 것은 김정일이다. 김정일의 지금까지의 외치·내치와 관련된 모든 행동이 그렇듯이 그는 전략·전술에서 상대방의 허점과 약점을 찔러대면서 이득을 취해하는 전략전술을 선호해 왔다. 실제로 김정일 핵심 측근들은 그를 ‘대전략가’로 평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로 이점이 김정일의 못난 점이다. 그는 개혁개방이라는 결단 대신 어떻게 하면 수령(首領)놀이를 할까, 어떻게 하면 이 수령놀이를 자식 대에도 계속할 수 있도록 만들까 궁리하면서 귀중한 시간을 낭비해왔다. 소탐대실(小貪大失)하는 소인배의 화신(化身)이다. 이명박 정부를 쉽게 늑탈(勒奪)하여 강성대국의 문패를 달겠다는 작전이 실패하자, 이제는 북한인민에게 ‘이밥과 고깃국에 대한 환상심기’를 10년 연장했다. 카드 돌려막기와 다를 바가 없다. 그나마 그 10년 경제계획이라는 것을 훑어보니 북한의 현 체제로는 될 것이 하나도 없다.


이미 저지른, 그리고 앞으로 저지를 북한의 군사도발, 6자회담, 북한의 경제난, 김정은의 권력 승계의 불확실성 등이 한반도 상공에서 기상 이변을 일으킬 가능성은 많다. 김정일의 조폭정신을 고려하면 3차 핵실험 가능성도 높다. 그런데 과연 이명박 정부의 ‘조건제시형 대북정책’만으로 한반도 주변의 높은 파고를 원만히 넘어갈 수 있을까. 이명박 정부가 제시하는 조건을 북한이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상식’ 수준이라면, 차라리 그 다음 상황을 대비하는 것이 더 현실적일 수도 있다.


필자가 지난 칼럼에서도 주장했듯이 이명박 정부는 이제 통일정책과 대북정책을 분명히 구별해야 한다. 물론 대북정책은 통일정책의 하위개념이지만 그 본령이 유연성이고, 통일정책은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를 원칙으로 국민 및 주변국 설득이 본령이다. 따라서 이명박 정부는 이럴 때일수록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의 통일에 대한 국내외 합의 도출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대북방송과 전단, 북한인민의 시장경제활동 지원과 같이 시류(時流)와 무관한 정책들을 차근차근 실행에 옮기고 확대해야 한다. 남북군사회담과 같은 것으로 천안함, 연평도 사건을 흐지부지 만들려는 북한의 의도와 무관하게 한국정부가 북한을 향해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북한의 군사도발 가능성에 대하여 단호하고도 충분한 방어력 및 방어 의지를 확보하고, 북한의 체제유지세력이 수령놀이 시간을 연장하면 연장할수록 체제유지가 힘들 수밖에 없음을 체감토록 만들어야 한다. 이제 김정일의 시간이 다 해가는 현 상황은 우리에게는 매우 귀중한 시기로, 한 순간도 낭비해서는 안 될 것이다. 김정일이 다시 졸도하던지 아니면 이 세상과 더 이상 악연을 맺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 오게 되면, 한국 정부는 북한인민과 북한의 체제유지세력에게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 통일’과 ‘고난의 행군’ 중에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 그것이 이명박 정부가 지체 없이 행동에 옮겨야 할 통일정책과 대북정책의 대강(大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