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北위폐 입장 분명히 밝힐 때 됐다

북한 위폐 제조와 관련, 국내에서는 여전히 미국이 핵심 증거를 가지고 있는지 여부에만 천착(穿鑿)한 채 한치 앞도 나가지 못하는 모양새다.

여당의 한 국회의원은 16일 외교부 현안보고에서 “북한은 위폐문제를 부인하고 있는데 북한에게 위폐시설 폐기 증거와 동판을 내놓으라고 하는 버시바우 대사의 발언은 문제가 있다. 이태식 대사의 ‘북한의 슈퍼노트를 직접 확인했다’는 주장이 정부의 입장이냐”고 추궁했다.

최근 한국기자협회가 공동주최한 토론회에서 미국의 북한 위폐문제 제기는 음모 수준이며, 정확한 증거 없이 북한을 트집잡고 있다는 주장까지 제기됐다. 다른 사람도 아닌 ‘사실(fact)’을 목숨보다 중요시 하는 기자들의 토론회에서 이런 음모론까지 나올 정도면, 과연 우리 사회가 북한의 위폐문제에 대한 기본 인식조차 제대로 돼있는지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정부는 그동안 북한위폐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가지고 있고, 미국과 긴밀한 정보교류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해왔다. 이처럼 사실관계에 대한 가타부타 없이 ‘외교적 우려’만 표명해온 정부의 진의(眞意)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는 발언이 최근 나왔다.

이태식 주미대사는 15일 KBS와의 인터뷰에서 “슈퍼노트를 직접 봤으며, 미국이 제시하는 북한 위폐제조의 증거와 과거 사례 등에 대해서도 충분히 설명을 들었다”고 말했다.

이 대사는 “2004, 2005년 북한의 위폐에 관한 여러 정황과 증거가 추가로 확인됐다”며 “미국은 9.11 테러 이후 알카에다의 자금추적을 하다가 북한 위폐의 흔적을 확인한 뒤 집중 추적해 증거를 확보했다”고 말했다. 이 대사의 발언은 북한이 최근에도 위폐를 만들었고, 여기에 대한 증거를 확보해 한국에 통보했음을 시사하는 발언이다.

‘北 위폐, 김정일 정권과 무관’ 주장은 말장난

정부의 한 고위 당국자는 16일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이 대사의 발언을 있는 그대로 보면 된다. 북한이 위폐를 가지고 있다고 정부 차원에서 말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한미간 긴밀히 정보교류를 하고 있다는 발언을 잘 살펴봐달라”고 했다.

국가정보원은 북한 위폐에 대해 98년도까지는 증거를 확보하고 있다고 했지만, 98년 이후에 대해서는 언급 자체를 하지 않았다. 이것은 북한이 98년 이후 위폐를 제조한 증거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입수된 정보를 공개하기 어렵다는 것으로 분석된다.

지금까지의 정부의 입장과 태도를 종합해보면 한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북한의 위폐제조 여부에 대한 입장표명을 하지 않고 있지만, 내부적으로는 이미 미국이 충분한 증거를 확보했다고 보고 있음이 역력하다.

일부에서 제기하는 북한 내에서 제조된 위폐의 주체가 당국이냐, 아니냐는 시비는 그야말로 말장난에 불과하다. 위폐감식 전문가는 슈퍼노트처럼 정교한 위폐를 발행번호까지 고쳐가며 찍어내기 위해서는 정부의 보호를 받는 대형공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위폐를 유통시키다 적발된 범죄자들은 대부분 북한 외교관이나 외교관 여권을 소지한 무역기관 종사자들이었다. 위폐유통 혐의를 받은 아일랜드 노동당 당수는 북한 대사관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북-중 접경지역에 가면 북한의 정권기관 소속 무역사업소 관리들과 직접 슈퍼노트를 거래할 수 있다는 것은 이제 상식에 속한다.

정부는 위폐문제에 대해 입장을 분명히 하면 6자회담 재개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고 말하고 있지만, 현실은 그와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다.

정부의 애매한 태도 국민혼란 부채질

지난해 9.19 공동성명 이후 북한이 경수로를 고집하면서 6자회담이 파행을 겪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 미국이 북한의 위폐문제를 문제 삼아 금융조치를 취하자 북한은 오히려 미국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를 중국으로 불러 협상을 시도했다.

최근 북한은 2월 9일 외무성 담화를 통해 국제 돈세탁 방지활동에 동참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물론 위폐제조를 시인하고 있지는 않지만 전에 없이 누그러진 태도다. 미국의 금융조치로 허가 찔린 북한이 수세적인 위치가 된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주변국이 한 목소리로 분명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외교의 기본으로 보인다. 그런 한국정부의 태도에 북한도 딴죽을 걸기 어려운 분위기다.

정부가 애매한 입장을 계속 취하면서 국민들만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 국론은 갈리고 대미 불신을 조장하는 세력들이 활개를 친다. 노무현 대통령이 1월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미국이 강경책을 쓸 경우 한국과 마찰이 발생할 수 있다는 발언은 자칫 위폐문제가 한미간 갈등으로 비화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낳기도 했다.

또한, 이러한 정부의 태도가 어떤 정치적 의도와 관련 있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까지 들게 한다. 일각에서는 남북정상회담을 얻어내기 위해 북한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종석 통일부 장관은 참여정부의 최우선 대북정책 과제를 ‘평화공존’이라고 했다. 평화정착을 김정일의 선의(善意)에만 기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국제공조를 통해 북한의 범죄행위를 중단시키는 것은 한반도 평화정착의 큰 분수령이 될 수 있다. 정상회담에서 북한의 각종 범죄행위를 중단시킬 자신이 없다면, 튼튼한 한미공조를 통해 위폐문제부터 해결하는 것이 한반도 평화에 기여하는 길이다.

신주현 취재부장 shin@dailyn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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