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4일 김정은의 특사로 중국에 파견된 북한 인민군 총치국장 최룡해가 중국 시진핑 주석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최룡해는 6자회담 등 다양한 형식의 대화와 협상에 복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그러나 북한은 자신들의 비핵화를 최종 목표로 하는 6자회담에 진솔한 의지를 가지고 복귀할까? 이 물음은 보다 면밀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지난해 12월 12일 장거리 미사일 발사 이후부터 북한은 한국과 국제사회를 상대로 요란한 ‘칼춤’ 시위를 벌여왔다. 4월 3일에는 개성공단에 대한 출입금지 조치를 취하면서 북한은 자신이 휘두르던 칼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여기서 문제는 시작됐다. ‘일단 칼집에서 뽑은 칼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딜레마였다.
자신들이 남북관계의 최후 보루인 개성공단에 대해 선제적으로 폐쇄 조치를 취하면 이명박 정부와 대북정책에 있어 차별성을 강조하며 ‘신뢰’를 우선시하는 박근혜 정부가 당황하여 백기를 들고 투항할 것으로 계산했음 직 하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녹록치 않았다. 북한을 강하게 압박하며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5월 7일 한미정상회담에선 오바마 대통령과의 대북공조도 더욱 공고하게 추진할 것임을 선언했다. 6월 하순에는 자신들의 빅 브라더인 중국과도 정상회담을 갖는다고 한다. 미국 역시 6월 7일 시진핑 중국 주석을 초청하여 미중 정상회담을 개최할 예정이다. 자칫하면 자신들의 최후 버팀목인 중국에게까지 버림을 받을 수 있는 형국으로 몰린 것이다.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벨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체면을 잃지 않고 우아하게 다시 칼집에 집어넣을 것인가? 이도저도 아니면 그냥 지금처럼 어정쩡하게 들고 있을 것인가? 김정은은 이 세 가지 문제로 고민하다 결국 ‘큰 형’에게 대리인을 보내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중국 역시 예전과 같이 북한을 마냥 다독거려 주지는 않고 있다. 중국은 동생이 막무가내식 행패를 부리는 데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출하며 국제사회의 제재에 여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다. 이에 따라 북한에겐 중국과의 관계개선이 긴급 현안으로 부상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은 중국을 흡족하게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북한이 ‘비핵화’를 명시적으로 약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이번 최룡해의 방중 목적은 중국의 한반도 문제에 대한 세 가지 원칙 중 하나인 ‘대화와 협상을 통한 문제해결’에 동조해 주면서 중국을 자신들의 지지자로 묶어두기 위한 의도가 짙다.
지난 23일 류윈산(劉雲山)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겸 중앙서기처 서기는 김정은의 특사 자격으로 중국을 방문한 최룡해를 맞이했다. 이 자리에서 최룡해는 자신의 방중 목적을 명확히 밝혔다고 한다. 최룡해는 김정은의 지시를 받아 북중관계를 개선하고 나아가 양국관계를 더욱 공고히 발전시키기 위해 중국에 왔다고 밝혔다는 것이다. 5월 23일자 중국광파망(中國廣播網)에 따르면, 최룡해는 “북한이 북중관계의 끊임없는 발전을 위해 중국과 함께 노력해 나가길 바라고 있으며, 북한은 경제발전, 민생 개선 등에 총력을 기울일 수 있는 평화로운 대외 환경의 조성을 희망한다”고 언급했다. 24일 시진핑 주석에게 김정은의 친서를 전달하는 자리에서도 최룡해는 이 같은 내용을 반복했다.
그러나 북한은 ‘6자회담’이란 말을 에둘러 표현했을 뿐 비핵화 의지에 관해서는 명확한 언급은 없었다. 이미 핵보유국임을 선언했고 핵군축을 위한 회담은 있을지언정 비핵화를 위한 회담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이미 천명한 북한이다. ‘비핵화=개방=정권의 몰락’으로 인식하고 있는 북한정권이 비핵화를 위한 회담에 나온다는 자체가 그 진의를 의심해볼 만한 사안이다.
북한은 ‘도발→긴장고조→대화복귀→시간벌기 및 실리추구’라는 낡은 레퍼토리를 다시 꺼냈다. 예전에 재미를 톡톡히 봤던 이 전략은 중국의 비호(庇護)라는 전제가 붙었지만 현재는 중국의 태도 변화라는 변수가 김정은을 당혹스럽게 하고 있을 것이다. 북한에겐 1970년대 데탕트 시대 미국과 소련, 중국이 화해 무드로 접어들면서 느꼈던 불안감, 1990년대 초 냉전이 종식되면서 중국이 한국과 수교했던 악몽 등이 오버랩 됐을 수도 있다.
요컨대 북한은 현 위기 국면을 타파하기 위해 대화국면의 조성을 통한 시간벌기에 나선 듯하다. 중국도 북한의 의도를 충분히 간파하고 있을 법하나 북한의 안정을 한반도 안정과 동의어로 간주하는 중국정부로서는 북한의 계략을 눈감아 줄 수도 있다. 우리정부는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방문 전략을 보다 치밀하게 세워 북한정권의 존재가 중국에게 전략적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각인시켜야 한다. 중국을 신형 대국으로 추켜세우면서 국제사회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해줄 것을 당부하며 북한 문제를 객관적인 시각에서 다루도록 유인하는 노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