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납북자 문제, 50년의 고통 이젠 멈춰야”

▲6· 25전쟁 당시 북한에 끌려가는 납북자들의 모습(좌), 납북자 송환 촉구 집회 모습(우)

“6∙25 전쟁은 아직 현재 진행형입니다. 전쟁중 납북자가 있는 가족들의 고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이 고통이 멈춰야 합니다”

지난 2일 ‘전후 납북피해자 지원법’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이법은 전후 납북자에만 해당되고 6 · 25전쟁 납북자와 가족들은 지원대상에서 제외했다.

전시 납북자 가족들은 그동안 정부가 납북자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호소 했다. 그러나 정작 이뤄진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정부는 전시 납북은 오래전의 일이기 때문이라는 핑계로 거의 손을 쓰지 않고 전후 납북자 관련 법 제정에만 신경을 써왔다.

반세기가 넘게 가족을 잃은 슬픔에 살아온 전시 납북자 가족 들에게는 이런 정부의 태도는 절망 그 자체다. 전시 납북자 가족들 가슴에는 남편과 아버지를 잃은 충격이 아직도 또렷이 남아있다. 가족이 납북된 것도 서러운데 정작 해결에 나서야 할 정부까지 무관심 하니 고통은 두 배가 되고 있다.

가족들은 납북된 그 날을 하루도 잊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생사확인과 송환이라는 말을 수천 수만번을 외쳤지만 납북자 문제 해결은 커녕 연좌제와 사회적 차별의 대상이 돼 한 맺힌 삶을 살아왔다.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이사장 이미일) 소속 회원들은 그동안 가족을 찾겠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납북자 관련 자료 조사와 홍보, 캠페인 등의 활동을 벌여 왔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하다. 납북된 가족들의 생사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미일 이사장은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살아온 50년간의 세월을 생각하면 그저 눈물이 난다”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가족을 찾겠다는 마음은 더욱 깊어진다”고 긴 한숨을 쉰다.

이 이사장은 “전시 납북은 오래전 일이기 때문에 정부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관심을 받지 못해 마음이 아프다”며 “하지만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국민들에게 알리겠다”고 말했다.

그는 납북자 송환운동을 해오면서 가장 큰 걸림돌은 정부였다고 말한다. 가족들이 수십 차례 통일부를 방문하고 시위도 했지만 정부는 손을 놓고 있는 상태다. 결국 가족들 스스로 발 벗고 나서 지금까지 오게 된 것이다.

지난 2000년 가족협의회를 결성한 이후 7년간 정부가 하지 못한 일을 해냈다.

가족들은 발로 뛰어다니며 자료를 수집, 연구, 정리해서 지난해 ‘한국전쟁납북사건사료집1’을 최초로 발간했다. 이 일은 정부가 해야 맞는 것이다. 사료집에는 북한이 전시에 남한 국민을 조직적으로 치밀한 계획 하에 납북해 갔다는 객관적인 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그동안 북한의 전시 납치에 관한 통합된 사료가 없었던 상태여서 이 사료집은 그 의미가 남다르다.

이에 앞서 가족회는 6.25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말부터 9월까지 불과 3개월 사이 남한 내 국회의원, 법조인, 행정공무원 등 지식인 계층 8만 여명이 북한군에 납치됐다는 자료를 찾아내는 등 기념비적인 일을 해냈다.

가족회는 앞으로 국민들에게 전시 납북자들을 알리기 위한 적극적인 캠페인을 벌일 계획이다. 이들은 전시 납북자에 대해 관심을 가져줄 것을 호소함과 동시에 납북자 현황, 관련 자료, 북한의 의도, 납치 과정 등 자세한 사항에 대해 알릴 예정이다.

데일리NK는 가족회가 제공한 전시 납북자 관한 자료를 문답 형식으로 소개한다.

-‘6∙25전쟁 납북자’ 정확한 의미는 뭔가?

‘6∙25전쟁 납북자’는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북한이 납치해 간 후 사망했거나 북한에 억류돼 생존해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6․25전쟁 중에 납북된 남한 민간인으로는 정치인, 공무원, 학자, 교육자, 의료인, 법조인, 언론인, 종교인, 사업가 등 사회 각 분야의 지도층을 비롯해 예술인, 기술, 학생, 농부, 노동자들도 납북됐다.

-북한은 왜 민간인을 납북했나?

북한은 전후 복구에 필요한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납북했다. 북한 내 고갈된 지식인을 충원하고 전후 복구에 필요한 기술자 및 노동자, 전쟁 수행에 필요한 청년들까지 납북했다. 또한 남한 내 사회적 혼란 유도해 적화시키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남한 사회에서의 지식인을 고갈시켜 혼란을 가중시키고 기술자, 청년층 등의 인력 부족으로 전후 복구를 어렵게 함으로 다시 남한을 공산화하려는 의도였다.

이외 납북을 자진 입북으로 위장해 정치 체제 선전으로 이용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이는 북한이 지금까지 납북자는 단 한명도 없고 북한이 좋아서 온 의거입북자만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왜 최근에서야 납북자 생사확인 등의 활동을 하는가?

▲전쟁 직후 납북자 송환을 위한 백만인 서명운동이 벌어졌다.

1950년대 후반부터 북한이 젊은 전시 납북자를 무장간첩으로 남파하자 남한은 1990년대 초까지 전시 납북자 가족들에게도 연좌제를 적용했다. 이 결과 납북피해 가족들은 감시대상 가족으로 전락했고 전쟁 중 결성된 가족회도 더 이상 활동하기가 어려워졌다. 또한 전쟁 이후 이념대립은 극심해져 남북 간의 대화 자체가 어려웠고, 북한은 시종일관 납북사실을 부인했다.

2000년 김대중 정부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 정부는 북한과 화해를 한다며 수많은 남북회담들을 진행해오면서 우리가 낸 세금으로 우리 가족을 납북해간 김정일을 경제적으로 막대한 지원을 계속했다. 당시 정부는 ‘납북자 480여명’이라고 하면서 전후 납북자만을 총칭용어인 납북자라고 하면서 전시 납북자의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전시 납북 아직도 진행중인 테러다”

북한에서는 1997년 극심해진 식량난으로 300만 북한주민들이 사망했다. 경제적으로 피폐해져 있는 상황 즉 김정일이 경제적 도움이 절대 필요한 이 시기에 지원에 대한 조건으로 전시 납북자 문제를 논의해 가족들의 소식이라도 알 수 있는 기회라고 보았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2000년부터 우리 전시 납북자의 존재를 정부에 알리고 우선 소식이라도 알기 위하여 우리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전쟁 납북은 전쟁 중 일반피해와 무엇이 다른가?

전쟁 중 필요한 민간인을 선별해 조직적으로 납북한 것은 전쟁범죄이며, 지금까지 납북된 가족의 생사조차도 모르기 때문에 계속되고 있는 테러다. 전쟁 중에는 불특정 다수의 민간인들이 우발적으로 사망하거나 부상하는 등 피해를 받는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이기에 이런 피해는 불가항력으로 본다.

그러나 전시 납북자의 경우는 북한이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이에 따라 조직적으로 그들이 필요로 하는 민간인들만 선별하여 납북해 갔거나 전쟁터에 투입했다. 선별할 때 그들은 다양한 속임수를 썼고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고 숨어있는 민간인들을 끝까지 추적, 색출하여 강제로 납북했다.

북한 김일성과 조선노동당은 전쟁이라는 특수 혼란상황으로 그들의 죄를 감추려고 하지만 전시 납북사건은 분명한 전쟁범죄다. 뿐만 아니라 범죄행위가 과거에 있었다고 하지만 북한은 지금까지 납북자들의 생사조차도 알려주지 않고 있어 현재도 진행중인 테러다.

-북한이 조직적으로 남한의 민간인을 납북해 갔다는 입증 자료가 있나?

1946년 7월 31일자『김일성 전집4권』‘남조선에서 인테리들을 데려올 데 대하여’에는 “당면하여 부족한 인테리문제를 해결하자면 북조선에 있는 인테리들을 다 찾아내는 한편 남조선에 있는 인테리들을 데려와야 합니다”라고 적혀 있다.

▲북한의 납북 사실을 증명해 주는 김일성의 교시문(좌), 러시아 문건(우)

이 교시문을 내린 후 대상자 명단을 작성, 당시 북한이 몰수한 화폐가 남한에서 통용되고 있어 북한은 거금을 가지고 남한으로 와서 대상자에 접근, 감언이설로 회유했으나 대상자 대부분이 북한에서 남하한 사람들을 통하여 북한실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거절하여 별 성과가 없었다.

또한 러시아 기밀문서 ‘북조선 군사위원회 결정사항 제18호’ 1950년 7월 17일자에는 “서울의 식량사정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군사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결정한다. 서울시 임시인민위원장은 각 부 각 청의 요구에 맞추어 북조선의 농업 및 산업 현장으로 50만 명을 후송하도록 한다”고 적혀 있다.

“北, 치밀한 계획하에 민간인 납북”

당시 이송수단이 없어서 실행에 옮기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하지만, 지리적으로 서울은 북한과 인접해 있어 대부분 도보로 끌고 올라갔다. 실제로 9.28수복 때까지 서울에서 지낸 역사학자 김성칠씨의 저서 『역사 앞에서』에는 북한이 내린 ‘서울시민 50만 북송 지시’에 의하여 7월부터 서울시민 전출사업이 집행되고 있다는 기록이 있어 실제로 집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외 일본 동경 주재 미국대사관에서 서울 상황에 대해 본국에 보고한 1950년 10월 11일자 서한에는 납북을 입증할 수 있는 내용이 들어가 있다.

서한에는 “1950년 9월 17일부터 28일 사이, 감옥에 수감되거나, 억류, 감시를 당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던 1만명 이상, 적어도 2만명의 정치범들이 서울에서 사라졌다. (중략) 점령 마지막 며칠간 공산당은 대한민국에 충성한 음악가, 목사, 공무원, 사업가와 같은 사람들과 무기를 운송할 수 있는 청년들을 북반부로 전출하는데 몰두했다”고 적혀있다.

▲납북 후 탈북한 김용일씨의 납북 경로

-북한이 어떤 방법으로 납북해 갔나?

북한은 납북행위를 교묘히 속이고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끌고 갔다. 이를 ‘위장 납북’이라고 말하는데 자수, 관광, 모셔오기 작전, 전출, 소집 등의 명목으로 납북을 단행했다. 북한군관들이 집에 와서 잠시 물어 볼 것이 있다며 데리고 간 후 납북한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는 숨어있는 대상자를 끝까지 찾아 색출하는 ‘색출 납북’ 방법도 있었다.

-납북자들은 어떤 경로를 통해 북한으로 끌려갔나?

몇몇 유명 정치인들은 1950년 7월 차량 편으로 납북이 시작되었지만 산길에서부터는 도보로 납북됐다. 여러 경로와 형태가 있지만 크게 나누면 두 가지 경로와 형태가 있다.

첫째, 내무서와 정치보위부에서 자술서를 수차례 쓰도록 하는 등 조사를 한 후 형무소에 감금했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1950년 9월 중순경 밤에 수갑을 채운 채 전차에 태워 청량리로 납북자들을 이송했다. 이어 의과대학 강당에 유치했다가 다음날 밤부터 포승줄로 묶어 철저한 감시하에 3,000명 이상이 집단으로 도보로 납북, 연천을 거쳐 황해도 시별리를 지나 평양교도소에 수감됐다.

둘째, 피랍자를 학교 등 공공장소에 연금했다가 바로 납북 또는 의용군이라는 미명하에 전쟁터로 보내진 경우도 있다.

-전시 납북자에 대한 통계 자료는 무엇이 있나?

‘6․25전쟁 납북자 실태의 실증적 분석에 관한 연구’(김명호 강릉대 교수)를 비롯해 1950년도 공보처 통계국 작성한『 서울특별시피해자명부』, 1951년 6·25사변피랍치인사가족회 작성한『6·25사변피랍치인사명부』, 1952년 정부가 작성한 『6·25사변피랍치자명부』, 1954년 내무부 치안국이 작성한 『6·25동란으로 인한 피랍치자명부』, 1956년 적십자사가 작성한 『실향사민신고서』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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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로 본 6·25전쟁납북자

납북자성별

-납북자의 98.1%가 남성

납치시기

-납북자의 88.2%(84,659명) 1950년 7월에서 9월 사이 납북

납치장소

-납북자 80.3%(77,056명)가 자택 또는 자택 부근에서 납치됨

납치지역

-납북자 수도권에 집중돼. 서울 비롯하여 수도권에서 42.3%(40,618명)

-한강교 조기 폭파 및 인텔리들이 서울에 집중 거주

-인구수 대비 납북자 비율 최고는 강원도(11,375명, 11.8%)

-지리적으로 북한과 가까운 지역 주민이 많이 납북

납북자연령

-납북자 84.6%가 16세부터 35세까지

납북자 직업군

-국회의원 및 정치인(169명), 법조인(190명), 경찰(1,613명), 행정 공무원(2,919명), 교수 및 교원(863명), 기술자(2,836명), 의료인(582명), 예술가(107명), 고등학생 이상(4,223명), 농업은 전체의 60.8%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어떤 분석 결과가 나왔나?

이상의 통계에서 시기적으로 전쟁직후인 3개월간에 88.2%가 납치되었으며, 사전계획에 의해 납북된 것이 증명됐다. 또한 16세부터 35세까지의 청장년층이 84.6%를 차지하며 98.1%가 남자였다. 여자의 경우도 간호사와 같이 직업이 있는 여성이 납북된 것으로 볼 때 그들이 필요로 하는 대상을 선별했음을 알 수 있다. 자택과 근처에서 납북 된 경우가 80.3%인 것은 조직적으로 행해졌음을 객관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전시 납북자 해결의 필요성은 무엇인가?

납북 행위가 1950년에 있었다 해도 여전히 납북된 가족들의 생사조차도 모르고 있기 때문에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테러에 해당한다. 국민은 자신의 신변보호를 받기 위해 국가에 납세, 병역, 준법 등의 의무가 있으며 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국가는 처벌을 해야한다.

“전시 납북자 해결은 남북화해의 디딤돌”

전시 납북자는 납북되기 전 국가에 의무를 다했던 국민으로 정부는 이들을 최우선적으로 보호해야할 의무가 있으며,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정부는 이 책임을 끝까지 수행해야 한다. 또한 전시 납북자는 대한민국을 건국하는 데 각 분야에서 기여한 분들로 이 분들을 반드시 역사의 중심으로 모셔 올 책임이 있다.

무엇보다도 존재조차 부인당하는 지경에 이른 전시 납북자와 그 가족들의 인권과 명예를 회복시켜야 한다. 납북자와 그 가족들은 피해를 당하고 있는데도 문제를 해결해 주기는 고사하고 북한과의 화해에 걸림돌이라며 철저하게 외면당해 왔다. 우리 정부가 우리의 가족에게 납북테러를 가한 범죄자와 진정한 화해를 하려면 이 문제부터 해결해야 진실된 화해와 평화의 길로 나갈 수 있다. 전시 납북자 문제 해결은 남북화해의 디딤돌이 되어야 한다.

-국제법적으로 전시 납북은 어떻게 해석되나?

6·25당시 북한군에 의한 광범위한 납북행위는 국제법상 강제실종 개념에 포함된다. 8만여명의 민간인에 대한 계획적이고 광범위한 납치는 나아가 국제인권법상 반인도적 범죄로 규정된다. 또 전쟁 중 지켜야 할 법인 국제인도법상에서도 민간인 납치는 금지하고 있으며, 이는 전쟁범죄에 해당한다. 또 강제실종 금지는 지금까지 국제사회에서 큰 지지를 얻어왔다는 점에서 국제관습법 위반에도 포함시킬 수 있다.

“전시 납북 공소시효 적용될 수 없어”

6·25당시 강제실종을 금지하는 조약과 관습법이 없었다 할지라도, 행방을 알 수 없는 미해결의 강제실종사건은 국제법상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범죄로 여겨지고 있어 국제법 적용이 가능하다. 이는 북한이 1968년 가입한 ‘전쟁범죄와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시효부적용에 관한 협약’에 따라 공소시효도 적용될 수 없다.

-납북자 가족들은 그동안에 어떤 활동을 벌였나?

1951년 결성된 ‘한국6․25사변피랍치인사가족회’는 1960년대까지 국내외 활동을 필사적으로 전개하였지만 국가의 무관심과 연좌제 적용으로 소멸됐다. 소멸되기 전까지 가족회는 1950년 10월 납북된 가족 찾으러 평양 조사단 파견, 명단 작성, 국회에 청원문 제출하는 등의 노력을 했다. 또한 휴전회담 유엔대표들을 수차례 초대하여 협조 요청을 함과 동시에 수천명의 가족들은 1953년 덕수궁에서 구출대회 개최하기도 했다.

2000년 결성된 가족회는 생사확인과 소재파악, 나아가 송환을 위한 백만인 서명운동, 납북길 따라 걷기, 생사확인 촉구시위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연구사업으로 전시 납북자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하여 1952년 대한민국정부가 작성한 82,959명의 전국 『6․25사변피랍치자명부』와 전시 납북자명부 4종 등 많은 관련 근거자료들을 찾았다. 이 사업을 위하여 가족회 산하로 지난 2005년 6월 25일 ‘한국전쟁납북사건자료원’을 개원했다.

“대북 협상시 납북자 문제해결 최우선 과제로 제시해야”

또한 납북사건 목격자들의 증언을 채록하여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증거자료들과 증언 채록물들을 『한국전쟁납북사건사료집1권』으로 발간함으로 명백하게 전시 납북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 데 기여했다.

-전시 납북자 문제 해결 방안은?

첫째로 납북자를 보호하기 위한 소식탐지와 서신교환 등을 해야 한다. 정부가 대북 협상시 최우선적으로 남북자 문제 해결 요구 즉 대북 경제지원에 앞서 납북자 문제 우선 해결을 조건으로 제시해야 한다. 또한 정부가 납북자 구출을 위해 적극적으로 납북자에 관한 북한 내 정보수집과 안전한 탈출 지원, 관련 국내 NGO의 지원도 이뤄져야 한다.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납북 관련 자료수집 및 축적 보관, 납북 목격자 및 납북 후 탈출자 증언채록도 구축해야 한다. 인권과 명예 회복을 위해서는 특별법 제정을 제정해야 한다. 국가의 국민보호 의무 이행 및 기념관 및 기념비를 건립하여 기록을 보존해 전시 납북자들을 대한민국 건국 역사의 제자리로 모셔오는 것도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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