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이 된 여자 1부] 갑작스런 도당 외사부의 부름

[어느 필사원의 사건일지] 퇴직 후 채소 장사하던 김 여인에게 날아든 쪽지 한 장

부부, 결혼 이미지 /사진=pixabay

전설이 된 여자


북한은 단일민족만을 내세우는 폐쇄국가다. 이런 나라에서 외국인을 배우자로 만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반세기에 이르는 폐쇄 사회의 공포 아래서 북한 주민들은 다른 민족과의 결혼 같은 것은 하늘 아래 전혀 존재할 수 없는 공식으로 간주하며 살아가고 있다.

북한에 유일하게 외국인이 있다면 재일 동포들이 귀국 시에 데리고 온 몇몇 귀화한 일본 여성들일 것이다. 그들은 같은 동양인으로 모색에서 구별이 없어 동족처럼 보이기에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이러한 북한에 기상천외한 일이 생겼다. 그것은 바로 정부의 공식적인 주선으로 북한 여자가 베트남 남자에게 시집을 간 것이다. 그것도 젊음이 훨씬 지난 60세의 나이에 베트남에서 찾아온 첫사랑 남자를 따라 북한을 떠났다.

외국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북한 체제에서는 처음으로 실천한 외국인과의 결혼이었다. ‘사랑은 국경을 넘는다’는 말이 전혀 자유롭지 않은 북한 주민들 속에서 이 일은 커다란 반응을 불러왔다. 주민들은 이 새로운 모습을 전설인양 떠들어댔다.

그 일이 있었던 때로부터 10여 년이 지났다. 그 생생한 이야기를 옛말처럼 들려주고 싶다.

북한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노동자구
2019년 2월 촬영된 북한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노동자구. /사진=데일리NK

도당 외사부에서 찾는다


평범한 날의 오전 시간, 김 여인은 장사 짐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제 늦은 저녁 시외 농장에서 넘겨 받아온 봄 소채(蔬菜)들을 파느라 자정까지 고생했지만 채 팔지 못한 채 집으로 들어왔다.

김 여인은 30여 년간 직장생활을 하다가 5년 전 55살 나이에 퇴직했다. 남편이 사고로 일찍 사망하고 부양해줄 가족이 없는 그녀는 가련하게도 정년 나이가 될 때까지 직장에서 일했다. 남들처럼 직장을 때려치우고 장사를 하고 싶어도 어쩔 수 없었다. 당시 북한은 남편이 사망하면 대신 아내가 직장에 들어가서 가정을 부양해야 했다. 이것은 누구나 따라야 하는 법적인 조치라기보다 상식적인 조치였다. 그렇게 오래도록 조직생활에 뼈를 녹이며 정년으로 직장생활을 마쳤다.

그는 퇴직이 되자 당장 남새(채소)장사를 시작했다. 가장 가난한 장사꾼들이 매달리는 장사였다. 그렇게 장사한 지도 5년이 되었다. 하지만 가난한 살림에 자릿세를 낼 형편이 못돼 장마당 안에 매대를 구하지 못했다. 시장가 주변을 떠돌며 몰래 파는 장사는 괴롭기 그지없었다. 낮에도 밤에도 안전원들과 순찰대의 쫓김을 받으며 시장가 주변을 끝없이 헤매야 했다. 어제도 밤늦게까지 소채를 실은 구루마(수레)를 끌고 시장가를 돌았다. 하지만 입에 풀칠을 겨우 할 정도였다. 팔지 못한 소채들은 밤새 초들초들 말라갔다.

김 여인은 하룻밤 새 축 늘어진 소채들을 보며 가슴이 탔다. 그날그날 단 몇 시간 만에 팔아치우지 못하면 망하는 장사. 시장가의 가장 가련한 장사가 소채 장사다. 김 여인은 소채 잎사귀들이 살아나라고 조금씩 물을 추겨주며 나물을 다듬고 구루마에 싣고 있었다.

그때 저쪽에서 자박자박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귀에 익은 발걸음 소리에 돌아보니 동네 인민반장이었다. 손에 팔랑거리는 종잇장을 들고 급히 오고 있었다. 자기를 향해 오는 것 같았다. 김 여인은 인민반장이 소름이 끼치도록 싫다. 낮이나 밤이나 동네 집 문들을 거침없이 두드리며 “당 정책이요, 돈 내오. 돈 내오.” 하는 꼴을 보면 쉰 물이 토해 날 지경이다.

손에 쪽지 같은 것을 쥐고 팔랑거리며 오는 꼴이 세 부담 때문에 닦달질하러 오는 것 같았다. 김 여인은 세 부담이 두 달이나 밀렸다. 가난하기 짝이 없는 소채 장사에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데 매일같이 쏟아지는 세 부담을 감당할 길이 없었다. 인민반장을 스치는 것조차도 싫었다.

‘시장 나가기 전부터 씨가 붙지 않게 뭔 잔소리 하려고 코앞에 다가붙누?’

반장이 코앞까지 다가왔지만, 아예 못 본 체하고 열심히 나물을 다듬었다.

“순호 엄마.”

그러거나 말거나 반장은 사업상 의무가 있다는 듯 째지고 갈라진 목소리로 김 여인을 불렀다. 그런데 다른 때와 달리 목소리의 톤이 조금 바뀌었다. 갈리고 거센 목소리는 조금 낯설게 들렸다.

“왜 그러오?”

김 여인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미운 놈 떡 한 개 더 준다고, 그래도 동네 인민반장인데 너무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미운 마음에 불을 지르듯이 곱지 않은 말이 불쑥불쑥 튕겨 나갔다. 그놈의 내라, 내라는 소리가 또 귀 따갑게 들릴 것 같아 미리 침을 놓듯 말했다.

반장은 뜻밖에 아주 삽삽한 목소리로 물었다.

“순호 엄마, 혹시 외국에 친척이 있소?”

뜻밖의 물음이다. 김 여인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얼핏 보며 쏘아붙였다.

“반장, 우리 집안 성분을 뻔히 알면서 뭔 소리요? 외국에 친척이 있음 이리 살겠소? 벌써 한밑천 잡아 부자가 됐겠지…. 흥.”

김 여인은 하다 하다 별소리를 다 한다는 듯 콧방귀를 끼며 하던 일을 계속했다.

빈정이 상한 듯한 인민반장은 약간 화가 섞인 목소리로 팔랑거리는 종잇장을 내밀며 말했다.

“순호 엄마, 내가 아무렴 할 일 없어 아침 일찍부터 식은 소리 하겠소? 이걸 들여다보오.”

김 여인이 믿지 않자 인민반장은 종잇장을 코끝까지 내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 여인은 시끄럽다는 듯이 하던 일을 그냥 하며 짜증스런 목소리를 질러댔다.

“기다리오. 일하는 게 눈에 안 보이오? 빨리 서두르지 않으면 소채들이 당장 썩어나갈 판인데 지금 그게 중하오? 이걸 팔지 못하면 당장 굶어 죽을 판인데….”

장사가 안되는 원인이 반장에게라도 있는 것처럼 화를 냈다.

인민반장은 한발 물러서서 그러려니 하는 모양새다. 한결같이 무시하는 동네 인민반원들의 모습에 익숙해진 것 같았다. 문전에 서기만 해도 인민반원들은 하나같이 반장을 무시했다.

“또 무엇 때문에 왔소? 또 무슨 돈 받으러 왔소? 또 당의 방침이요? 돈 받아 가고 싶으면 구실 붙이지 말고 그냥 생돈 내라고 하오. 말끝마다 당의 방침, 당의 방침…. 이젠 신물이 나오.”

다수의 반원은 반감에 쌓인 목소리로 대항해 나서기 일쑤다. 오늘 아침 김 여인도 그렇게 대항하는 모습이다.

오랫동안의 반장 사업에 인민반장은 반원들의 이런 감정에 익숙해졌다. 지그시 서서 기다린다. 5분 정도 일을 더 마친 김 여인은 그제야 돌아섰다. 손에 먼지를 털고 반장의 손에서 종잇장을 받아 쥐었다.

종잇장에는 도대체 이해가 안 가는 문구들이 쓰여 있었다. 김 여인의 눈이 커졌다.

“24일 오후 22시 도당 전화 지시. 청진시 XX구역 XX동 X반 김현옥, 동 당 비서가 책임지고 25일 오후 2시까지, 늦지 않고 도당위원회 외사부에 꼭 도착하도록 할 것.”

그는 종잇장을 보며 머리를 기웃기웃했다. 자기와 하등 상관있을 것 같지 않은 도당 외사부였다.

도당 외사부는 외국에 친척이 있는 사람들이나 외국으로 돈벌이를 떠나가는 사람들을 취급하는 곳이었다. 50대 중반이 지나는 나이이고 당원도 아닌 자기 같은 사람을 도당 외사부에서 찾는다는 것이 이상했다. 두루두루 생각해봐도 짚이는 데가 전혀 없는 예상 외의 일이다.

김 여인은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하고 흩어보고 또 흩어보며 자기 이름자에 받침이라도 틀린 것이 아닌지 하고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아무리 다시 보아도 자기 이름이 확실했다. 하지만 이유를 알 수 없어 어안이 벙벙해졌다.

곁에서 지켜보던 인민반장이 답답하다는 듯이 물었다.

“순호 엄마, 숨겨둔 친척이라도 없소? 최근에 그런 일들이 많다던데…. 죽었다던 친척 형제들이 미국에서 나타나고, 카나다(캐나다)에서도 나타나고…, 이렇게 우리나라에 사전 연락이 와서 도당 외사부에 불리어 갔다 와서는 며칠 후에 평양까지 올라가서 외국에서 온 친척들을 만나 돈도 받아 쓰고…. 겉으로는 싫어하는 척하면서 달러를 한 뭉치씩 받고 속으로는 콩당콩당 뛰던데….”

남의 속은 안중에 없이 약삭빠른 인민반장은 잘도 재잘거렸다. 김 여인이 인상을 찌푸리고 밉상이라는 듯 곱지 않은 눈길로 쏘아붙였다.

“어딜 봐서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이오?”

김 여인이 당장 쏘아붙였다.

“어쨌든 난 도당 지시를 알려주었고, 도당 지시니 꼭 가봐야 할 거요.”

인민반장은 더 상대하기 어렵다는 듯 자리를 떴다.

북한예술영화 ‘우리집 이야기’ 중 인민반회의 장면. /사진=영상 캡쳐

김 여인은 아무리 봐도 이런 쪽지가 왜 내게 왔는지 모르겠다는 의심을 한 채 계속 멍하니 앉아 생각에 잠겼다. 분명히 이름도 옳고 집 주소도 옳다. 그런데 돌아가신 부모님이나 남편 쪽으로 외국에 친척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막연한 생각만 들었다.

하지만 사연이 있든 없든 도당에서 부른다니 가봐야 했다. 도당에서 자기 이름을 꼭 찍었을 때는 무슨 사연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도당에 갔다 오자면 하루 시간이 다 걸린다. 저 물건들을 어떻게 해야 한담. 어제 팔던 물건을 그냥 두고 갔다가 오고 나면 날이 저무는 시간이 될 터인데 그때면 채소들을 팔지 못한 채 썩힐 것이 불 보듯 뻔하다. 김 여인은 물건을 들고 같은 채소 장사꾼을 찾아가 넘겨주고 말았다. 본전도 못 건지고 넘겨주었다. 채소 장사꾼은 어제 받은 물건이라 싱싱하지 못하다고 말이 많았다. 너무 꽁알거려서 밑진 채로 넘겨주고 말았다.

역전까지는 걸어서 1시간, 시내 통근차를 타고 가는 시간도 1시간, 역전에서 내려 도당까지 걸어가는 시간도 한 30~40분 거리였다. 시 외곽에 사는 김 여인은 시내에 도당이 있다는 것만 알지 정확히 어디 있는지는 모른다. 한 번도 가볼 일이 없었다. 물어보며 가야 하니 더 시간이 소모될 것이었다.

‘살아생전 도당 문턱을 다 넘어보게 된다니?’

별일이 다 있다고 생각했다.

바지 차림은 일본식이니 자본주의식이니 하면서 최근에 옷차림 단속이 뻔질나다. 치마를 입지 않으면 어딜 가나 단속이 심했다. 그러잖아도 아까 인민반장이 가면서 한마디 했다. 도로에서 옷차림 단속이 심하고 도당 문전에서도 단속당할 수 있으니 불편해도 치마를 입고 가라고 동 당 비서가 신신당부했다고 말했다.

옷차림을 맞추려니 마땅한 옷이 없다. 고난의 행군, 강행군 시기에 다 팔아 끼니에 보태고 나니 허름한 치마차림 한 벌도 마땅한 것이 없다. 한숨을 쉬며 옷을 골라 입고 보니 벌써 오전 시간이 10시에 이르렀다.

도당 청사를 향해 떠난 김 여인의 머릿속에서는 별의별 오만가지 생각이 다 떠올랐다. 무남독녀인 그녀에게 겨우 머릿속에 떠오르는 친척은 아버지 쪽으로 전쟁 시기 전사했다는 삼촌 한 분이었다. 전사했다던 삼촌이 살아남아서 외국에 나가 살다가 갑자기 자기를 찾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또 어디에서 불쑥 생겨난 새로운 친척이 자기를 찾는 것 같은 환각에 사로잡혔다.

하도 성분을 운운하는 사회에서 살다 보니 이미 돌아가신 부모가 신분을 속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최근에 외국에 사는 동포들이 조국에 있는 친척들을 찾으면서 속였던 신분이 드러나 처벌받는 일도 다반사다. 그러거나 말거나 요즘같이 살기 어려운 세월에 그런 일이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는 한동네에 사는 ‘미국 집’이 부러워 죽을 지경이다. 전쟁 시기에 월남한 할아버지가 미국에서 살면서 고향 방문으로 올해까지 세 번 다녀가셨다. 북한에 사람들이 굶어 죽는다는 말을 듣고 북에 두고 온 친척들이 굶어 죽을까 봐 북한 정부에 사정사정 매달려서 승낙을 받고 왔다는 것이다. 정부는 나라에 기금을 바치는 조건으로 그들에게 친척 방문을 시켜주었다. 올 때마다 친척들에게 달러를 뭉치로 안겨주고 갔다.

그때부터 월남자 가족이라는 듣기 싫은 이름이 사라지고 ‘미국 집’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사람들은 ‘미국 집’이라는 이 유다른 이름을 즐겨 불렀다. 보위부는 동네 주민들을 불러놓고 ‘미국 집’이 불순한 이름이라면서 고쳐 부르라고 으르렁댔다. 사람들은 며칠간 주춤했지만, 다시 ‘미국 집’으로 불러댔다. 그렇게 불러야 속 시원했던 것 같았다. 미국은 곧 달러나 같아서 그 집에 관한 이야기가 오갈 때면 자연히 미국 돈에 대한 즐거운 한담도 오갔다.

‘미국 집’ 사람들은 항상 개기름이 번지르르해서 다닌다. 배고픈 사람들이 배부른 사람들을 보고 부러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정부가 그들을 미워하고 배척해도 사람들은 무조건 부러워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외국에 친척이 있으면 죄를 지은 것처럼 싫어하고 내색하지 않던 사람들의 생각은 뒤바뀌고 있었다. 이런저런 오만가지 생각 속에 걷다 보니 김 여인은 어느새 도당 청사 앞에 도착해 있었다.

(계속)

*편집자주
북한 안전부(경찰서) 등지에는 ‘필사원’이 있다. 사건을 기록하면서 데이터베이스화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현지에서 발생한 사건사고를 당국이 어떻게 처리했는지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데일리NK는 필사원 업무를 담당했던 한 탈북민의 증언을 통해 북한 체제의 속성을 파헤치고자 한다.

다만 본지는 일반적 기사체를 고집하기 보다는 소설적 기법을 사용해서 독자들이 사건의 흐름 및 북한 주민들의 심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