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北 외무성 성명은 대미 압박용일 뿐”

북한이 26일 외무성 대변인 성명을 통해 영변 핵시설 불능화 조치를 중단하고 원상복구를 고려할 것이라고 밝혀 검증체계 구축을 두고 공전상태에 빠진 북핵문제에 위기감이 조성되고 있다.

외무성 대변인은 이날 성명에서 “미국이 6자회담 10·3합의의 이행을 거부함으로써 조선반도 핵문제 해결에 엄중한 난관이 조성됐다”며 “미국이 합의사항을 어긴 조건에서 우리는 부득불 ‘행동 대 행동’원칙에 따라 대응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성명은 특히 “10·3합의에 따라 진행 중에 있던 우리 핵시설 무력화(불능화) 작업을 즉시 중단하기로 했고 이 조치는 지난 14일 효력이 발생됐고 이미 유관측들에 통지됐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10·3합의에는 북한이 이행해야 하는 조치로 불능화와 함께 ‘완전하고 정확한 신고’를 규정하고 있지만 검증에 대한 내용은 없다. 따라서 북한은 자신들이 이미 미국에 핵신고서를 제출했기 때문에 미국이 ‘행동 대 행동’의 원칙에 따라 대북테러지원국 해제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셈이다.

북한은 ‘검증체계’ 문제가 미국의 대북테러지원국 명단 삭제 지연의 명분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아울러 불능화 조치 중단의 원인이 미국에 있음을 강조하며, 실제 불능화 중단 조치를 14일 내린 것으로 밝히고 있다.

지난달 12일 종료된 북핵 6자 수석대표회담 이후 미국과 북한은 검증체계 구축을 위한 협의에 돌입했지만 입장 차이를 줄어들지 않았다.

미국과 북한은 22일 뉴욕회담을 통해 검증체계 구축을 위한 돌파구 마련에 나섰고, 이 자리에서 미국은 북한에 모종의 절충안을 제시하며 북한의 의사를 타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4일 성 김 미국 북핵 특사가 중국을 방문할 당시 중국도 자신들이 마련한 중재안을 미국 측에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은 그 동안 북핵검증에서 핵 샘플 채취, 불시 사찰 등 국제적 기준에 맞는 검증을 강조해왔다. 더불어 미국은 대북 테러지원국 해제조치를 유보하며 우라늄농축프로그램 및 시리아 핵확산 의혹 등도 검증 대상에 포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북한은 최근 테러지원국 해제를 통한 국제사회 편입과 더불어 IMF·ADB 가입을 위한 미국의 ‘보증’을 원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져 왔다. 하지만 일각에선 북한이 차기 미국 행정부와의 협상을 원하면서 ‘시간 끌기’에 나서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이 같은 과정에서 26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의 성명이 전격적으로 발표됐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북한이 미국을 압박하기 위해 영변핵시설 원상복구 카드를 들고 나왔다고 분석하고 있다.

대선이 임박한 상황에서 북핵문제의 진전이 절실한 부시 행정부를 압박함으로써 ‘검증’에 대한 양보와 더불어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 및 경제·에너지 지원 등 정치·경제적 이익을 동시에 추구하겠다는 전략이 담겨있다는 지적이다.

김태우 국방연구원 군비통제실장은 ‘데일리엔케이’와 통화에서 “지난 4월 싱가포르 미·북 협상 당시와 지금의 정치적·경제적 상황은 달라진 것이 없다”며 “이번 성명은 북한이 즐겨 사용하는 ‘겁주기’ ‘우격다짐’ 전략의 연장”이라고 설명했다.

김 연구실장은 “향후 10월까지 미북간 협상 과정을 좀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북핵협상이 중단되거나 파멸 상황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유호열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는 “북한은 불만을 표출하며 미국 부시 행정부가 시간에 압박받는 때를 기다리자는 것”이라며 “특히 ‘원상복구를 고려한다’는 것은 마지막으로 미국을 압박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유 교수는 또 “북한은 미국의 대선국면에 따라 민주당이나 공화당을 향해 한번쯤 시위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와 불능화 조치를 맞바꾸겠다는 전략이 성공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차기 미국 정부에 미리 강경한 입장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박영호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이날 북한 외무성 성명은 북한이 미국의 검증안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미북간 주고받는 공방의 연장선일 뿐”이라며 “미국이 ‘공은 북한에게 넘어갔다’고 하니까 북한은 ‘아니다 공은 너희에게 있다’고 대응 하는 식”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북한은 ‘미국이 압박하면 우리도 압박한다’는 전략이다”며 “압박을 통해 현재의 고비만 넘기면 대선에 직면한 부시 행정부가 더 많은 제스처를 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내다봤다.

박 연구위원은 “북한은 검증 단계를 나누어서 더 많은 이익을 얻자는 ‘살라미 전술’을 추구하고 있는데, 이는 북한의 통상적인 전술”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임기 내에 비핵화 2단계를 마무리하겠다는 부시 미 행정부의 의지가 강하고, 북한은 미국의 테러지원국 해제를 강력하게 희망하고 있기 때문에 미북간 조정 가능성은 높은 것으로 내다봤다.

김 군비통제실장은 “지난달 12일 종료된 북핵 6자회담 수석대표회담 당시 합의를 보면 북한과 관련국들이 10월 말까지 불능화 및 경제·에너지 지원을 완료하기로 했다”면서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당장 미·북간 대화 중단이라는 긴장국면이 조성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북한이 성명을 통해 ‘영변 핵시설의 원상복구를 고려하겠다’고 밝힌 것과 관련, 유 교수는 “북한이 원상복구를 당장 시행하거나 중국의 중재노력을 무시하고 6자회담 자체를 파기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북한은 식량지원이 절실한 상황이기 때문에 미·북 협상이나 6자회담을 중단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 선임연구위원도 “북한이 원상복구 조치를 고려하겠다는 것은 향후 검증 협상과정에서 영변 핵시설을 대미 공세용으로 활용하겠다는 의미”라며 북한의 실행 가능성을 일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