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거리교화소, 시체 태우는 냄새 맡으며 밥 먹는 게 일상”

북한에서 반(反)인도범죄가 벌어지고 있고, 북한 지도부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서울에 인권사무소를 설치해 북한의 인권 상황을 감시하고 피해자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도 북한인권기록센터를 만들어 북한 지도부에게 인권침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려고 합니다. 국제사회와 한국이 왜 이런 조치를 취하고 있는지, 북한에서 인권유린을 당했던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오늘은 2008년부터 2년간 비법월경죄로 북한 전거리교화소에서 인권 유린을 당했던 김찬미씨의 증언을 지난 시간에 이어 들어보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 먼저 찬미 씨는 언제 탈북을 하셨나요?

저는 2003년 2월에 탈북했습니다. 그 때가 22살이었는데요. 사실 먹을 게 없어서 탈북했다기 보다는, 중국에서 한 달만 돈 바짝 벌고 집에 돌아올 계획이었어요. 하지만 중국에서 인신매매를 당하게 됐죠.

– 그렇게 중국에 계시다가 끝내 체포되셨습니다. 체포된 이유는 뭐였고, 당시 심정이 어떠셨나요?

중국에 있을 때 자궁암 진단을 받았어요. 그런데 중국에서는 도통 치료를 받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는데, 누군가가 한국에 가면 고칠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한국행을 시도하다가 잡힌 거예요. 몽골 국경에서 중국 변경대에게 잡혔죠. 그 때 제 딸은 두 돌도 채 안 됐었기 때문에 중국 고아원에 맡겼죠. 하지만 끝내 (한국행은) 성공하지 못했어요

중국 변경대에게 잡혔을 땐,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실감이 안 났어요. 그런데 고문을 받기 시작하니 너무 고통스러워 이게 실제 벌어진 일이라는 걸 실감하게 됐고, 딸 생각이 가장 먼저 나더군요. 특히 이러다가 북송이 되면 생사도 알 수 없게 되겠지만, 그래도 고아원에 간 딸 생각을 멈출 수 없었어요. 그래서 무조건 살아남겠다고 결심했죠. 엄마 없는 아이로 만들고 싶지 않았거든요. 저도 일찍 엄마를 여의어 그 슬픔을 아니까요.

– 지난 시간에 북송 이후 어떤 고문을 받아야했는지 이야기해주셨는데요. 그렇게 3년형을 선고 받고 전거리교화소에 가게 되셨죠. 다른 교화소도 그렇겠지만, 전거리교화소는 특히 수감자에 대한 처우나 환경이 열악하다고 알려져 있는데, 직접 경험해보니 어떻던가요?

전거리교화소에서 겪은 일들은 여전히 제 몸에 흔적으로 남아 있어요. 피부병처럼요. 교화소 안에는 바퀴벌레나 옴, 빈대 같은 게 정말 많았는데 그게 아물지 않는 피부병을 만들었어요. 또 열이 40도가 넘어가는 병에도 걸렸죠. 영양실조로 죽어나가는 사람들도 매일 봤어요. 특히 죽은 사람에게서 병균이 얼마나 많이 옮겠어요. 교화소 내 위생상태는 뭐라 말 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 교화소에서 영양실조로 죽는 사람은 어느 정도나 되나요?

매주 월요일이면 전거리교화소 뒤에 있는 불망산에 시체를 가지고 올라가 태워야 할 정도였어요. 매주 한 번씩 태워야했다고요. 교화소 내 감자반에서 작업을 했는데, 마침 시체를 태우는 곳 바로 밑에서 일을 해야 했어요. 시체 태우는 과정을 보면, 우선 커다란 달구지 두 개에 매주 사람을 가득 실었어요. 소 달구지는 보통 한 대당 500kg 정도만 실을 수 있거든요. 달구지는 소가 끌잖아요? 그런데 여기는 사람이 달구지를 끌어야 했고, 달구지 한 대당 1톤씩 (시체를) 싣게 했어요.

싣고 나서는 남자 교화인들이 불망산에 시체를 매고 올라가 장작불 피워 태웠습니다. 시체를 태울 동안 그 옆에는 시체 잿가루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요. 우리는 그 잿가루를 밟으며 산에 오르고 내리고 해야 했죠. 교화소에서의 생활은, 그냥 감방에서 죽은 시체를 옆에 두고 밥 먹는 게 일상일 정도였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 그렇게 사람이 죽으면 밖에 있는 가족들에게는 즉각 소식이 전달되나요?

당연히 알리지 않죠. 그곳에서 3년간 형기를 다 마치고 나면, 교화소에서 수감자 가족에게 출소시킬 테니 데려가라는 통지서를 보내요. 그런데 가족이 없어서 아무도 데리러 오지 않는 경우도 많았죠. 특히 형기를 다 마치면 죄인이 아닌데, 가족이 데리러 오지 않는 사람은 계속 교화소에서 살게 했어요. 그러다가 죽으면 불망산에서 태우고요. 그렇게 값없이 죽는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 교화소에서는 수감자들을 앞세워 다른 수감자들을 감시하게도 한다고 들었습니다. 찬미 씨도 조장으로 있었다고 했는데, 조장은 주로 어떤 역할을 하게 되나요?

전거리교화소에선 한 개 반에 반장과 조장, 감시, 지령공 이렇게 구도가 형성돼 있어요. 한 개 반은 130명 정도로 구성되고, 한 개 조는 25~30명으로 이뤄져요. 감시는 한 개 반을 총 감시하기도 하고, 매 조마다 따로 감시하기도 하죠. 조장은 반장 아래단위라고 보면 되는데, 노동을 할 때 자신의 조를 책임지는 역할을 하죠. 쉽게 말해 작업 조장 같은 거예요. 감시는 주로 ‘감시 초병’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맡았는데, 우리가 도망치지는 않는지, 어떤 행동을 하는지 하나하나 감시했어요. 지령공은 한국으로 치면 회계 같은 거예요. 누가 얼마나 일했는지, 며칠 일했는지 등을 기록하는 역할을 했죠.

문제는 한 조에서 사람이 죽으면 그 책임을 조장이 져야 했어요. 특히 죽은 사람을 직접 들고 시체실까지 가야했죠. 반장들도 나름 역할이 있었지만, 조장들은 어떻게 해서든 자기네 조 사람이 죽지 않도록 해야 했어요. 왜냐면 사람이 죽으면 시체의 옷도 갈아입혀야 하고 직접 들어서 시체실까지 가져가야 했으니까요. 그게 무서워서 조장들은 조원이 허약해보이면 즉시 병실로, 허약반으로 넘기고 대책을 세웠죠.

– 교화소 내에서도 폭력이나 성폭행이 빈번히 자행됐나요?

교화소 안에서 성폭행이 일어났다는 얘기는 못 들어본 것 같아요. 하지만 구타는 계속돼요. 반 별로 담임 선생님들께 맞기도 했고요, 초병들도 수감자들을 때렸어요. 수감자들끼리 싸움이 나기도 했었고요. 주로 담임 선생님에게 맞는 교화인이 많았는데, 다행히 제가 있던 반 선생님은 수감자들을 잘 때리는 사람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남새(채소)반 선생은 정말 지독했어요. 그 반에 있던 수감자들 중 병신이 안 된 사람이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갈비뼈가 부러지거나 허리가 나간 사람도 있었는데, 이런 사람들은 출소한 후에도 후유증이 정말 심하다고 하더라고요.

– 교화소 생활 중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건 뭐였나요?

겨울이면 꽁꽁 언 강물을 깨서 몸을 담가야 했어요. 샤워를 해야 했으니까요. 교화소에서는 샤워를 매일 시키지 않고, 오늘은 몇 반, 내일은 몇 반 이런 식으로 샤워 순서를 정해줬는데요. 그마저도 물이 안 나오면 샤워를 할 수 없었죠. 그러니 흐르는 강물에라도 씻어야 했는데, 그 추운 물에 머리부터 담그고 씻는다고 생각해보세요.

더욱 견디기 힘들었던 건, 그렇게 샤워하는 동안 불망산에서 시체를 태우는 냄새가 계속 난다는 거예요. 우리도 죽으면 저 산에서 저렇게 불태워져 잿가루로 날리겠지, 하는 절망감에 휩싸이고는 했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악으로 버텼어요. 실은 불망산을 쳐다보지도 못하는 사람도 많았어요. 저야 감자밭에서 일을 해야 했으니 늘 바로 위에 있던 시체 태우는 장소를 봐야 했지만, 다른 수감자들은 불망산 쪽을 쳐다보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시체 태우는 냄새는 전거리교화소 안에도 늘 가득 차 있었어요. 나무나 물건이 타는 냄새가 아니라, 사람이 타는 냄새를 맡는 건 정말 절망감을 끓게 만드는 일이었어요. 그래서 무조건 살아나가자고 생각하면서 버텼죠.

– 수감자들 중 전거리 교화소 생활이 너무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나요?

네, 전거리 여자 교화소는 2006년에 생겼어요. 그 전에 죄를 지은 여자들은 중산, 개천, 함경남도 오로 등에 있는 교화소로 갔는데요. 그곳에 있다가 몸이 아파 잠시 나왔다가 다시 교화소로 돌아가야 하는 사람들 중에 일부는 전거리 교화소로 옮기기도 했데요. 그렇게 온 사람들은 “교화소가 다 같은 교화소가 아닌 것 같다” “차라리 중산 교화소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어요. 그 정도로 노동 강도나 심했거든요. 

특히 중산 교화소는 산이 없어서 나무를 하러 갈 필요도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반면 전거리교화소에서는 농사를 마친 후 월동 준비를 하러 나무를 베러 다녀야했거든요. 그런데 나무를 베러 가는 길이 평지가 아니라 울퉁불퉁한 산길이었어요. 그 길을 30~40리(里) 걸어 나무를 베고, 그걸 들고 다시 내려와야 했습니다. 농사도 잘 안 됐어요. 지리적으로 지대가 높은 곳이라 감자나 옥수수를 심어봐야 수확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도망칠 수도 없었어요. 산을 넘고 넘어 집에 가려고 해도 다시 잡혀오기 일쑤였죠. 전거리교화소는 아주 깊은 골짜기에 있었거든요.

– 전거리교화소 수감자 수는 어느 정도 되나요?

– 제가 들어갔을 때만 해도 남자가 3000명, 여자는 500명 정도 됐었는데, 나올 때 보니 여자가 3000명 정도로 늘어났더라고요. 원래 여자 수감실은 500명 인원용 시설로 지었는데, 인원이 늘어나 남자 교화소 옆에 추가로 지어야 했어요. 다만 지금은 남녀 합쳐서 4000명은 될지 모르겠어요. 들어가는 사람보다 그곳에서 죽어나가는 사람들이 더 많거든요. 출소 순서가 돼서 나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어요. 형기를 마치고 살아서 나오는 사람이 10명 중 6명에 불과하다고나 할까요. 나머지 4명은 밖에 소식도 보내지 못한 채 그 안에서 태워져 죽는 거예요. 

– 고생이 심하셨을 것 같은데, 중국에서의 몸무게와 교화소 안에서의 몸무게를 비교해보면 어땠나요?

저는 오히려 (교화소에) 들어갈 때보다 나올 때 몸무게가 더 많이 나갔어요. 대신 저는 구류장에 있을 때 특히 힘들었습니다. 체포될 때 63kg 정도였는데, 구류장에서 6개월간 고문 받고 교화소에 갈 때 47kg가 돼 있더라고요. 만약 제 의지가 나약했다면 그런 고문을 참지 못하고 죽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반드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계속 하게 되더라고요.

한 예로, 어느 날 교화소에서 불망산에 올라가던 중이었는데 발에 뭐가 걸려 넘어졌어요. 뭔지 보니 불에 타다 남은 사람 다리더라고요. 그 다리를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나는 절대 이렇게 죽지 않겠다고요, 악을 쓰고 살았습니다. 배가 너무 고플 때면, 어릴 때 엄마가 돌아가셔서 닷새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을 때를 떠올렸어요. 그 때에 비하면 그래도 교화소에선 내 입에 뭔가라도 들어가고 있구나, 위로하면서요. 물론 그게 마냥 좋은 건 아니었겠죠. 먹을 것, 못 먹을 것 닥치는 대로 먹으며 버틴 거니까요. 균이 몸에 많이 들어갔는지 교화소에서 나올 땐 몸이 황달처럼 누랬어요. 지금이야 한국에 와서 약도 먹고 치료 받으며 나아지고 있지만, 후유증은 여전해요. 골반뼈도 다 내려앉아서 요즘 교정 받으러 다닙니다.

죄가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인간으로서 권리 보장 받아야 합니다. 전거리 교화소를 비롯해 모든 교화소에서 벌어지는 인권 유린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교화소에서 일하는 북한 당국자들은 수감자들에 대한 인권 유린을 즉각 중단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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