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에서 만나면 놓아드리지 않겠습니다”

이산가족 상봉 이틀째인 31일 금강산호텔 각 객실에서 97가족(남측 상봉단 436명, 북측 방문단 110명)의 개별상봉이 비공개로 이뤄졌다.


이날 오전 9시부터 11시까지 두시간 동안 이뤄진 개별상봉은 남측 가족이 머무는 호텔 방으로 북측 가족이 들어가 2시간 동안 가족들만의 시간을 갖는 방식으로 전날 60여년 만의 첫만남 때의 서먹함은 뒤로하고 오붓한 시간을 갖게 됐다.


오전 9시께 현대자동차의 대형버스 3대에 나눠 타고 금강산 호텔에 도착한 북측 가족들은 남측 가족들에게 전달할 선물을 담은 가로 세로 40~50cm크기의 종이 가방을 들고 버스에서 내렸다.


종이가방 안에는 술, 가족사진이 담긴 액자 등이었으며 일부는 도자기 등을 가져오기도 했다.


한국전쟁 당시 세살배기였던 남측의 고배일(62) 씨는 아버지 고윤섭(81)씨와 개별상봉 뒤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배일 씨가 “(이번 상봉이)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인 것 같은데 저승에서 영혼으로 만나면 아버님을 꼭 붙잡고 놓아드리지 않겠습니다”라고 다짐하듯 말하자, 아버지 윤섭 씨는 울먹이며 “꼭 그러자”고 화답했다.


미국시민권자인 배일 씨는 “아버님이 치아가 없어 음식을 잘 못 잡수셨는데 미국으로 같이 갈 수 있으면 제가 치아를 다 해드릴 수 있을 텐데”라며 눈물을 훔쳤다.


배일 씨는 윤섭 씨의 이산가족 상봉 신청 소식을 듣고 미국에서 서울로 급히 왔다고 한다. 배일 씨는 “헤어지는 게 더 걱정이다.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라고 했다.


북측 오빠 김석동(76) 씨를 만나러온 남측 여동생 김순자 씨는 이날 아침 응급치료를 받기도 했다. 순자 씨는 신장이식 수술 후유증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이틀간의 긴장과 고양된 감정의 영향인지 과로로 쓰러졌다가 의료진의 치료를 받고 일아나 오빠와의 잊지 못할 애틋한 만남을 이어갔다.


치매로 전날 단체상봉 때 북측의 여동생 전순식(79) 씨를 알아보지 못해 주위를 안타깝게 했던 남측의 전숨심(84) 할머니는 밤새 잠깐 정신이 맑아져 여동생의 이름을 부르기도 했다. 전 씨의 아들 권태원 씨는 “어머니가 여기 오셔서 동생을 만났다는 사실만이라도 알고 가셨으면 좋겠다”며 안타까워했다.


북측 오빠 최의식(70) 씨를 개별상봉한 남측 최예식 씨는 “오빠 보러 4남매가 다 왔는데 처음에는 어색해서 오빠도 말씀을 잘 안 하시더니 핏줄이라고 당기는지 시간이 조금 지나면서 할 이야기가 어찌나 많은지..”라고 했다. 예식 씨는 “하나 하나 비디오 카메라에 담고 있다”면서도 “내일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너무 아쉽다”고 했다.


북측의 리화춘(81) 씨는 남측에 7명의 동생이 모두 생존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운 일”이라며 부둥켜안고 반가워했다. 남측에는 2명의 남동생과 5명의 여동생이 살고 있는데 상봉인원이 5명으로 제한돼 있어 할 수 없이 여동생 2명은 이번 상봉에 함께하지 못했다.


하지만 화춘 씨는 오매불망 딸을 보고 싶어 했던 모친이 지난해 11월 숨을 거뒀다는 소식에 “1년 만 빨리 만났어도…”라며 안타까워했다. 남측 여동생 연화(69) 씨도 “어머니 첫 제사는 며칠 남지 않았다”며 눈물을 훔쳤다.


“오빠, 동생들 절 받으세요” 북측 오빠 정기형(79) 씨를 만난 남측 정기영(72), 기옥(62), 기연(58) 씨 세 여동생은 곱게 한복을 차려 입고 오빠에게 절을 올렸다.


아버지를 대신해 북으로 끌려갔던 오빠에게 “모진 고생을 하게 해 미안하고 고맙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서다. 절을 받은 오빠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1950년 기형 씨 가족이 살던 경기도 안성에 인민군이 내려왔다. 이들은 동네 사람들을 시켜 말투(말에게 먹을 풀)를 뜯은 뒤 그것을 운반할 사람으로 마을 사람 몇몇을 끌고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