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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창바이(長白)현에 거주하는 재중동포 이미자(54세, 가명)씨는 2005년 8월 5일부터 30일까지 북한정부 초청으로 평양과 백두산을 비롯한 북한 일대를 방문했다.
이씨는 밀가루와 약품 등 인민폐 5만원(한화 650만원) 상당의 지원물자를 북한에 보냈고, 북한당국은 답례로 이씨를 초청했다.
해외동포들이 돈을 기부하거나, 물자를 원조하면 북한을 구경시켜 주는 관례가 있다. 동포들은 약 한달 동안 머물며 북한의 방방곡곡을 구경한다.(편집자)
다음은 이씨의 기행문
나는 양강도 혜산시를 드나들면서 조선(북한)과 장사했다. 장백현은 중국 조선족자치현으로서 연변자치주와 무관하게 중국정부가 인정한 조선족 자치현(縣)이다.
나는 90년대 초부터 조선(북한)으로 다니기 시작했는데,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주민들은 형편없이 못살았다. 장마당에 가면 거지들이 많았고, 우리가 중국인이라는 사실을 알면 돈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차이가 없었다.
8월 5일 나와 20여명의 일행은 혜산-평양행 기차를 타고 평양으로 갔다. 나는 도강증을 가지고 혜산을 많이 다녀왔지만, 여행구역이 제한되어 혜산 이남으로 가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자고 해도 기차를 타는 수밖에 없고, 통행증에 명시된 구역을 벗어나면 안전원들이 단속한다.
열차가 함흥으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열차칸에는 짐을 나르는 장사꾼들과 군인들, 부랑아들이 넘쳤다. 삶에 지친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이라곤 찾아보기 힘들었다. 오직 몸으로 때우면서 힘겹게 살아가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윽고 검열이 시작되었다. 안전원들은 열차 칸의 앞뒤를 막고 장사꾼들을 단속하기 시작했다. 곡식 짐이나 지고 다니는 사람들이 무슨 큰 돈이나 버는 장사꾼일까? 중국에서는 쌀 1kg에 인민폐 1원이 좀 넘는다. 쌀 같은 것은 장사품목으로 여기지도 않는다.
이때 나이가 30대 후반쯤 되었을까. 검은 얼굴에 마른 체구의 한 청년이 자기 몸의 두 세배 되는 짐을 지고 열차에 올랐다. 안전원들이 청년에게 여행증명서를 요구하자 청년은 공민증과 여행증명서를 내놓았다.
청년의 얼굴과 공민증 사진을 번갈아 보던 안전원이 “야, 이게 네꺼 맞아?”라고 묻는다. 그러자 청년은 “내건데요…”라며 말끝을 흐린다.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이 간나새끼, 흐라이(거짓말) 치겠어?”라며 따귀를 갈긴다. 공민증과 여행증명서가 다른 사람 것이라는 사실을 대뜸 알아보았다.
옆 좌석에 앉은 사람들이 “안전원들이 위조여행증명서나, 다른 사람 증명서를 소지한 여행자를 단속했을 때는 ‘범 잡은 포수’가 된다”고 쑥덕거렸다. 나는 “자기 증명서를 가지고 다니지 왜 다른 사람 증명서를 가지고 다니는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옆에 앉은 사람이 “손님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요?” 하며 아래위를 흟어보았다. 지방통행증은 1만원~3만원, 평양통행증과 국경통행증은 5만원 이상이라는 말을 듣고 일반주민들이 증명서를 제대로 갖고 다니지 못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김일성 동상은 황금색으로 빛나는데…
우리를 마중한 해외동포영접국 부국장은 “장군님(김정일)께서는 이번에 조국을 방문하는 여러분들께 유쾌하고 즐거운 나날을 보낼 수 있도록 배려를 돌려주셨다”며 자신을 안내 책임자라고 소개했다.
수도 평양은 그나마 지방과 달랐다. 우선 전기가 들어왔다. 장백에서 건너다 보면 혜산은 캄캄한데 평양은 전깃불이 들어오고 있었다. 가끔 하루에 한두 시간 정전이 되어 평양거리도 까맣게 변하기도 했지만….
우리는 보통강여관 9층에 여장을 풀었다. 여관과 마주한 105층짜리 ‘류경호텔’은 희미한 불빛에 장승처럼 보였다. 주변의 고층 아파트들은 윤곽만 드러난다. 평양의 가로등은 하나 건너 하나씩 켜져 있고 도로 한쪽만 밝히고 있었다. 이것이 우리를 맞은 첫날 평양의 모습이었다.
평양방문은 김일성 동상을 찾아 헌화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만수대에 있는 김일성 동상은 한점 퇴색없는 황금색으로 번쩍였다. 때마침 우리가 동상을 찾았을 때 기중기가 팔을 길게 뽑아 그 위에 탄 사람들이 동상을 닦고 있었다. 높이 20m, 동상이 얼마나 크고 웅장한지 길게 편 동상 팔 위에 올라 있는 사람이 개미처럼 작아 보인다.
평양의 중심에서 북동쪽으로 약 8km 떨어진 모란봉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금수산기념궁전은 김일성의 시신이 안치된 곳이다. 앞마당은 아주 넓어 한쪽 끝에서 다른 끝에 선 사람이 가물거려 잘 보이지 않는다. 장엄한 음악이 울리는 가운데 누워있는 김일성은 마치 산사람이 잠을 자는 듯했다. 백성들을 굶주리게 해놓고 태연하게 누워있는 김일성 주석은 이 사실을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5박 6일의 일정으로 김일성 주석의 생가인 만경대, 주체사상탑, 개선문, 서해갑문 등을 돌아보았다. 지방참관은 금강산과 묘향산 그리고 백두산이었다.
20여리 산비탈 등짐으로 돌 날라
우리 일행이 백두산을 관광할 때였다. 백두산은 중국에서도 올라가 보았다. 정상(頂上)에 국경이 있고, 중국 쪽에서는 백두산을 장백산(長白山)이라고 부른다.
▲ 백두산 정상 가는 도로 |
백두산에 오르기 전날 밤 안내원은 요즘 관광객들이 많아 일찌감치 백두산을 보고 오후에 내려오려면 내일 아침에 서둘러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베개봉 호텔에서 하룻밤 자고 새벽 4시쯤 되어 우리가 탄 버스는 백두산 정상을 향해 떠났다. 버스를 타고 가기 시작하는데 날이 서서히 밝아온다. 우리가 탄 버스가 산 정상으로 뻗은 굽은 도로를 따라 올라가는데, 버스 차창으로 시커먼 그림자들이 뭔가를 지고 산으로 오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1백여 명의 젊은 청년들이 등에 네모진 돌을 두 장씩 지고 줄을 서서 산으로 오르고 있었다. 등짐은 잘 다듬어진 흰 화강석이었다. 안내원에게 뭘 하는 사람들인가 묻자 “장군님께서 백두산을 관광지로 잘 꾸리라는 방침을 내렸다”며 돌을 지고 올라가는 사람들은 백두산 정상에 김일성-김정일 기념비를 세우기 위해 동원된 돌격대원들이라고 한다.
무거운 화강석을 진 청년들은 땅만 보며 묵묵히 올라가고 있었다. 지휘관처럼 보이는대열의 아래 위를 오가면서 뭔가 계속 외쳐대고 있었다.
차로 올라가도 되는데 돌을 지고 올라가다니? 산 밑에서 정상까지는 이십 여리길. 얼핏 보기에도 돌은 30kg은 족히 넘을 것 같았다. 아마 아침에 한탕 나르고 와야 밥을 먹이는 것 같았다.
이렇게 우리는 약 20여 일간의 북한방문을 마쳤다. 평양에는 다시 들어갈 필요가 없어 혜산에서 중국으로 향했다.
돌아오던 날, 해외동포영접국 간부는 앞으로도 애국사업에 더 많이 동참해줄 것을 바란다며 ‘해외동포 애국기여상’을 주었다.
상을 받으니 기분은 좋았지만 조선도 어서 빨리 개혁개방되어 동포들이 자유로이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같이 살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이미자 (李美子, 장백현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