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교포들, 北가족 상봉목적 소규모 투자

▲ 함경북도 김책시로 가기 위해 평양에서 출발하는 ‘평양-두만강행 열차’를 이용했다. 이 열차는 북한 내에서 최고 급행열차다. 김책시로 출발하기 앞서 안내원(오른쪽)과 기념촬영 했다. ⓒ데일리NK

7월 14일. 라진시 배 수리공장 지배인 ‘김기동'(선박 공업부 소속), 라진시 동해수출품수산사업소 지배인 최창구(대성총국 소속)와 동행한 대성총국 일행들과 수리공작소에 대한 사업성 검토를 다시 하기로 했다. 구체적인 합의서는 평양에서 작성키로 했다. 전편으로 바로가기

15시 30분 김책행 열차에 오르니 피곤하다. 과음한 탓인 듯하다. 저녁 10시 40분에 함경북도 김책역에 도착하니 대성총국 김책 수산사업소 주임기사가 마중을 나왔다. 별장 초대소로 향했다. 목욕시설이 없어 무척 곤란했다.

이런 사업 투자 과정을 거쳐 북한의 닫힌 문이 열렸고 계속적으로 관광객 수가 늘어나는 현상을 보였다. 미주 교포들이 북한에 있는 이산가족을 상봉하는 횟수도 늘었다. 북한에 사업투자 의향을 보이는 교포들도 생기고, 북한과의 연고가 없는 교포들은 별도의 사업투자에 대한 상담을 희망하며 왕래가 잦아지기 시작했다.

사실 이산가족을 자주 만나기 위한 목적으로 소규모 투자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북한과 연고가 전혀 없는데도 투자를 해 보겠다는 교포는 나 하나뿐이었다.

1988년 당시 미국 국적을 가진 교포들은 한국인임을 앞세워 미국의 대북정책과 별개로 북한에 투자를 해도 되는 줄만 알고 있었다. 그 와중에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한국인 교포 북한 방문 1년 1회만 허용

미국정부는 북한을 ‘적국’으로 취급했고, 외교관계가 없다는 이유로 교포들의 방북에 간섭을 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방북인사 명단’을 만들어 행동을 감시했다. 그러나 교포들은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북한과 동족이라는 한가지만의 이유로 미국의 ‘적국’인 북한을 자유자재로 왕래했다. 그러나 미국 입장에서는 용납하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이즈음 미 행정부 ‘재무성’에서 방북의 횟수가 잦은 본인에게 통보가 왔다.

1)미국 내에 거주하는 모든 한국인 교포(영주권과 시민권 소지자)의 북한 방문은 1년에 1회만 허용한다.
2)북한 방문 후 귀국 시 미화 100달러 미만에 해당하는 물품만 구매, 소지할 수 있다.
3)미국교포가 북한에 투자하는 것을 금하며, 타인에게 북한진출 사업에 대한 중개도 금한다.

이상 3가지의 준수사항을 지키지 않을 경우 미국 법에 의하여 엄중 처벌을 받을 것이라는 통지를 보내온 상태였다.

사업소 담당자들과 상담한 결과, 러시아 선박을 수리하려면 이에 대한 사업계획서가 필요하기 때문에 하루 종일 마주앉아 사업계획서를 만들었다. 사업계획서를 검토한 결과 육상에 시설을 하려면 자금과 시간이 너무 소요될 것 같아 이동식 부력을 이용한 ‘플로팅 독(Floating Dock)’을 시설하는데 일차 합의를 했다.

다음 행선지인 청진, 김책, 신포, 흥남, 함흥, 원산을 거치면서 대성무역과 수산위원회 소속 현지 사업소의 협조를 받아 부두시설과 수심(水深), 계절별 풍향 등 기상 조건과 나머지 필요한 조사를 마치고 평양으로 돌아왔다.

너무나 뒤쳐진 해안시설 보고 돕기로 결심

평양으로 돌아온 나는 종합검토 결과 라진-선봉지역은 일제 때부터 일본군인들이 사용했던 항구이고, 또 지역적으로도 앞으로 동북아 물류 중심 항구로 손색이 없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한, 북한 측의 요구를 고려해 라진-선봉 지구에 시설을 하기로 했다. 원 부자재인 플로팅 독(Floating Dock)은 내가 책임지고, 그 외의 모든 설비는 대성총국 측에서 책임지기로 합의서를 작성했다.

10여 일 동안 북한의 동해안 일대 주요 수산기지와 크고 작은 항구를 돌아보면서 한국수산업계와 비교할 때 너무나도 뒤떨어진 모든 것을 보고 동족애의 마음에서 꼭 도움을 줘야겠다는 결심으로 합의서(합의서 아래 참조)를 작성했다.

서울로 돌아온 후 9월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료수집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부산의 조선소와 수리공장의 현장으로 선 후배들을 하루에 10시간 이상 찾아다니며 현장 사진과 자료준비에 한 여름의 더위도 모르고 3주가 지났다. 지친 몸으로 밤이면 자료 정리에 자정을 수 없이 넘기며 최선을 다했다.

9월 23일 LA에서 일본 동경행 비행기를 탔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언제나 서울을 경유했는데 이번에는 동경의 ‘근양해운(북한 선박회사의 일본 총 대리점)’사장과 통신관계로 의논할 게 있어서였다. 앞으로 미국에서 평양으로 보내는 모든 통신은 근양해운에서 수고해 주기로 합의했다. 캐나다 경유 평양보다는 훨씬 신속했다. 보다 중요한 것은 통신 내용의 비밀보장과 신속 정확성의 보장이었다.

설계와 감독을 담당할 회사직원과 공산권 나라와 무역 거래에 경험이 많고 북한 투자에 관심 있는 LA거주 ‘팜코상사’ 김성찬 사장과 필자까지 세 명이 9월 25일 아침 일찍 북경 조선대사관에서 사증을 받아 당일 평양에 도착했다.

지난 7월 회의 때 약속한대로 기본 자료를 다 준비하여 제시하였다.
① 부 도크(Floating Dock) 기본설계도면
② 수리설비 및 공구 명세서
③ 제안서(1989년 7월 20일 3차 평양 방문시 합의서에 의한 제안)

우리일행 3명과 대성무역 사장 그리고 담당 지도원 외에 한 사람까지 6명이 27일 오후 5시 출발하는 웅기(선봉)행 특급 야간열차에 탔다. 철도가 워낙 노후해서 마치 배를 탄 기분이었고 밤 여행이라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8시 김책시에 도착해 초대소에 여장을 풀었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김책에 있는 대성총국 현지 사업소 어선들과 냉동 창고, 그리고 골뱅이잡이 현황과 선박수리시설 장소에 대한 최종 결정을 내리기 위한 출장이었다. 당시 조선 중앙수산위원회에서는 라진항 이나 원산항에 시설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대성총국에서의 요구는 김책항의 모든 여건이 좋으니 이곳으로 결정하자는 것이었다(계속).

김찬구 /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필자약력> -경남 진주사범학교 졸업 -국립 부산수산대학교 졸업, -LA 동국로얄 한의과대학졸업, 미국침구한의사, 중국 국제침구의사. 원양어선 선장 -1976년 미국 이민, 재미교포 선장 1호 -(주) 엘칸토 북한담당 고문 -평양 순평완구회사 회장-평양 광명성 농산물식품회사 회장 -(사) 민간남북경협교류협의회 정책분과위원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경남대 북한대학원 졸업-북한학 석사. -세계화랑검도 총연맹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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