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쩌민 외교방문 실록 남·북한 부분 내용

중국의 제 3세대 최고지도자였던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 겸 공산당 총서기의 외교방문 실록은 ’진달래꽃 필 때 – 첫 조선방문’을 시작으로 1990년부터 2002년까지 근 12년간 모두 109차례의 외국 방문 및 각종 회담 참석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 수록했다.

연간 9차례 꼴인 장 전 주석의 외국 방문 가운데는 한 차례의 한국 방문과 두 차례의 북한 방문이 포함돼 있다.

장 주석은 11년의 시차를 둔 두 차례의 북한 방문을 통해 ’대를 이은’ 북한의 두 최고지도자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다.

다음은 그 주요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 ’진달래 꽃 필 때 – 첫 조선방문’(1990.3.14-16) = 4개월 전(1989.11.5-11.7) 중국공산당 제13기 6중전회 개막 하루 전 김일성이 중국을 ’내부방문(비공식방문)’했다.

전용열차를 타고 온 그를 당시 85세의 고령이었던 덩샤오핑(鄧小平)이 직접 영접했다.

덩샤오핑은 다음날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장쩌민에게 넘겨주기로 결정해 놓고 있는 터였다.

덩샤오핑과 장쩌민은 함께 전용열차에 올라가 김일성 일행과 인사를 했다.

덩샤오핑은 특히 장쩌민을 김일성에게 소개하면서 “앞으로 김 주석은 장쩌민 동지와 사귀게 될 겁니다”라고 정중하게 말했다.

김일성은 베이징을 떠날 때 장쩌민의 북한 방문을 정식으로 요청했고 장쩌민은 앞으로 외국 방문 기회가 있으면 먼저 북한부터 가겠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4개월 후 장쩌민은 약속대로 북한을 방문하게 됐다.

당 총서기 취임후 첫 방문국가가 북한이었다.

장쩌민과 김일성은 중·한 관계 문제에 대해 중점적으로 의견을 교환하면서 양측이 양해에 이를 수 있기를 희망했다.

한국에서는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소련, 동유럽국가 등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있을 때였다.

노태우는 특히 덩샤오핑에게 서한을 보내는 등 중·한관계 개선에 아주 적극적이었다.

중국과 한국의 쌍무무역액 증가도 아주 빨랐고 서방에 의한 ’제재’의 영향도 받지 않았다.

정세의 발전에 따라 중·한 무역대표부 문제는 자연스럽게 무르익었다.

장쩌민은 중·한 무역대표부 문제가 회담의 의제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장쩌민은 이 문제를 더 이상 미뤄두기가 아주 어렵다고 솔직하게 말하고 국제정세가 어떻게 변하든 우리는 조선의 자주·평화통일 지지 입장을 결코 바꾸지 않을 것이며 조선인민에 대해 미안한 일을 결코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두 지도자는 흉금을 털어놓고 의견을 교환했다.

중국은 조선측의 우려를 감안하는 동시에 융통성을 두면서 점진적으로 대(對)한국 정책을 조정해 나갔다.

그로부터 반년 후 김일성은 중국을 공식방문, 중국측에 “만약 중국이 정말로 남조선과 무역대표부를 설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충분히 이해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장쩌민과 김일성은 동유럽 국가들에서 짧은 시간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 원인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장쩌민은 근본적인 문제는 경제와 인민생활의 문제를 잘 처리하지 못하고 당을 잘 건설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 당의 내부에서 당원들의 사상혼란, 부정풍조 및 부패현상과 민심이탈 등의 상황도 엄중해 인민군중의 강력한 불만을 불러일으켰다고 말했다.

김일성은 조선노동당과 조선인민은 어떠한 복합하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한치의 흔들림 없이 계속해서 혁명의 기치와 사회주의의 기치를 높이 들고 전진할 것이며 사회주의 건설의 공동사업에서 중국인민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 ’조선 재방문’(2001.9.3-4) = 김정일은 김일성 3년상이 끝난 뒤 차례로 조선노동당 총비서와 국방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했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김정일은 조선주재 중국대사를 불러, 중·한수교는 중국의 당이 결정한 일로서 조선측은 0.001%도 의견이 없다고 말했다.

김정일은 자신으로서도 전혀 의견이 없으며 조·중 친선만 변치 않는다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그는 양국이 고위층의 상호방문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정일은 중국대사에게 자신이 중국을 좋아하며 어린 시절 중국 동북지방에서 성장하면서 중국 노혁명가들의 보살핌을 받았다고 말했다.

김정일은 7세 때 어머니 김정숙이 사망하고 그 다음해 조선전쟁이 일어나자 그를 돌볼 수 없게 된 아버지 김일성이 그를 중국 지린(吉林)시로 보내 소학교에 다니게 했다.

김정일은 2000년 5월 중국을 비공식 방문했다.

김정일이 바로 김대중과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갖기로 한 때였다.

김정일은 김대중과 만나기 전에 먼저 베이징에서 장쩌민을 만나기 위해 중국을 방문했다고 말했다.

김정일은 2001년 1월 다시 중국을 방문 상하이 푸둥(浦東)신구, 상하이 증권거래소 등을 시찰한 바 있어 이번 장쩌민의 조선 방문으로 세번째 서로 만나게 됐다.

장쩌민은 김정일과의 회담에서 새 세기에는 중·조관계를 부단히 공고하게 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양국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조선반도의 긴장완화와 안정을 위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장쩌민은 중·조친선을 공고하게 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중국의 장기적 전략방침으로서 중국은 양국 관계를 손상하는 일을 절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일은 김대중의 평양 방문후 자신이 남쪽에 갈 것인가 말 것인가, 만약 간다면 세계를 향해 조선문제는 조선인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밝힐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 대선 후 국제정세에 여러 가지 변화가 발생해 실제 방문 효과가 어떨지 그 예상이 별로 좋지 않았다고 말했다.

◇ ’냉·열 동감 – 한국 방문’(1995.11.13-16) = 1995년 11월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열린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 참석 전 장쩌민은 김영삼 한국 대통령의 초청으로 한국을 국빈방문했다.

이 방문은 1992년 양국 수교 후 오래 동안 기다려왔던 방문이었다.

장쩌민과 김영삼은 주로 회담중 상호관계와 조선반도 정세에 대해 각자의 의견을 개진했다.

장쩌민은 한국측에 중국의 조선반도 정책을 설명하고 “중국이 반도 문제를 처리하는 기본 준칙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수호하는 것이다” “중국은 반도의 자주·평화통일을 지지하며, 유관 각측이 반도 정세를 완화하고 상호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제출한 합리적 주장 및 그것에 기울이는 건설적인 노력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이번 중·한 정상회담에서는 장쩌민이 한국을 방문하기 전날 침략역사를 부인하는 발언을 해 일본문제도 거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쩌민은 중국이 일본의 가는 방향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면서 일본 국내의 군국주의 세력이 재기하려 하고 있으며 그 잔여 세력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김영삼은 한국이 일본 방위청장관의 그러한 행동을 용인할 수 없다면서 일본 지도자들이 일종의 군국주의적인 마음과 태도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김영삼은 한·중 양국이 모두 피해자로서 일본이 과거의 죄상을 정당화하려는 기도에 대해 양국이 협력해 함께 바로잡자고 말했다./베이징=연합

소셜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