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 딛고 암투병 남편 돌보는 한 탈북여성 사부곡

말복 더위가 내뿜는 폭염을 뒤로하고 필자는 강원도 춘천시 퇴계동으로 발길을 향했다. 퇴계동의 명칭에는 효자(孝子) 반희언이 복사꽃을 좋아하는 어머니를 위해 심은 복숭아 밭이 홍수에 휩쓸리게 되자 온 몸을 던져 물길을 막아섰다는 전설이 담겨있다. 범람하던 물길이 방향을 바꾸었다해서  물러갈 퇴(退), 시내 계(溪)  자를 써서 퇴계동이라 불린다.


효심의 상징이던 이곳에는 지금 뭇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사부곡(思婦曲)이 울려 퍼진다. 주인공은 탈북자 이순임(가명.43세). 그녀는 이곳 임대아파트에서 남편 김영식(가명.47세)과  단둘이 살고 있다.


초인종을 누르니 조심스럽게 문이 열린다. 한눈에 들어오는 마른체격을 보니 그가 남한 출신이 아님을 단번에 알아 차리게 된다. 남편 김 씨다. 정오의 직광으로 인해 아파트 안은 오히려 더 컴컴하게 보인다. 유달리 드러나 보이는 그의 광대뼈에서 ‘병상의 기운’이 감돈다.   


“안녕하세요. 전화 드렸던 유관희 기자입니다.”


말 없이 방으로 향하는 김 씨. 뒤따라 나오는 이 씨의 목소리에는 그래도 생기가 있다.


“오서 오세요. 더운데 오시느라 힘드셨죠.”


좁은 방안에 앉아 잠시 둘러보니 장기 요양 환자가 있는 모양새다. 방 한칸을 차지하고 있는 이부자리부터 이부자리 위에 물병과 작은 밥상까지. 


“한국에 오신지는 얼마나 됐나요?”


기자의 질문에 이 씨의 말문이 조금씩 열린다.


이 씨는 2008년 12월 한국에 입국했다. 그녀는 3급 장애를 갖고 있다. 그늘이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밝은 표정의 그녀가 덥썩 내민 오른손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엄지와 중지는 마비되어 있고, 검지는 절반 밖에 없다. 약지와 소지는 아예 흔적도 없다. 북한에서 기와를 굽는 작업장에서 일했던 그녀는 재료 반죽 기계에 손이 말려들어가는 끔찍한 사고를 당했다. 출혈로 생명까지 위태로운 상태였지만 오른손을 댓가로 목숨만은 건졌다고 한다. 


이 씨와 같이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이 북한에서 온전히 살아가기는 힘들다. 90년대 말 대기근이 북한을 휩쓸던 당시 그녀도 어쩔 수 없이 두만강을 넘었다. 북한사람을 지칭하는 ‘챠오시엔런(潮鮮人)’이라는 꼬리표도 버거운 판에, 가는 곳 마다 그녀의 오른손이 중국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늘 열심히 일했다. 온갖 농사일에서부터 노점상까지, 속된 말로 ‘술집 아가씨질’을 빼곤 모든 일을 겪어봤다고 한다.


한국에 와서도 그녀의 부지런함은 변함이 없었다. 입국 초기에는 직접 빵을 만들어 주문 판매를 해서 하나원 동기생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이 때 그녀를 눈여겨 본 남자가 있었으니, 바로 지금 남편인 김 씨다. 두 사람은 지난해 11월에 처음 만났다. 마음만큼 얼굴도 예쁜 그녀에게 김 씨가 먼저 다가섰다고 한다. 탈북자만이 느낄 수 있는 망향(望鄕)의 심정을 나누다 보니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올해 2월부터 저 이와 정식으로 사귀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3월 28일 교회에 갔는데, 문득 제 마음속에 저이와 합쳐 결혼생활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 짐을 몽땅 싸가지고 무턱대고 찾아갔죠. 제가 일단 결심을 세우면 앞뒤 안돌아보고 행동하는 성격이거든요. 지나간 선택에 대해서는 조금도 후회 하지 않아요. 지금도 그때 결정이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남편 김 씨가 춘천에 정착한 때는 지난해 2월이다. 그 역시 다른 탈북자들처럼 제 3국을 거쳐 한국에 입국, 하나원 교육을 마치고 지금의 임대아파트를 배정 받았다. 낮에는 주택건설 현장에 나가 일하고, 저녁이면 고향 친구들을 불러내 술한잔 기울이는 평범한 생활이었다. 김 씨는 그 때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소박한 행복은 별로 오래가지 않았다.


김 씨는 3국에 있을 당시 폐결핵을 앓았던 병력이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입국 후 신체검사에는 전혀 증상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해 7월 갑자기 찾아온 감기증세가 시발점이었다. 약을 먹어도 효과가 없어 병원을 찾았다. 폐결핵 재발을 걱정하며 의사를 만났더니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폐암 3기’가 선고됐다. 


의사의 권고대로 오른쪽 폐 1/3을 잘라냈다. 그 지독한 항암치료는 올해 4월까지 이어졌다. 몸도 몸이지만 마음까지 만신창이가 되어 갔다.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건너 한국행을 선택했던 그에게 주어진 운명은 너무 가혹했다. 스스로 돈을 벌 수 없다는 것,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탈북자들에게는 ‘사형선고’와 같다. 암울했던 시절 그에게 유일한 희망이 되어준 사람이 바로 아내 이 씨였다.









▲ 오른손 장애에도 불구하고 이 씨는 독거노인 돌봄이, 펜션 청소 등 생계를 위해 어려운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집에서 요양중인 남편을 간병중인 이 씨의 모습. /유관희 기자

물론 이 씨에게 망설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남편의 ‘인간성’에 일단 매료된 그녀의 마음은 되돌려지지 않았다. 


“저도 여자인데, 왜 꿈이 없었겠요? 한국에 입국할 때는 다른 사람처럼 건강한 남편을 만나 ‘사람 사는 것 같이 살아보자’는 희망이 있었죠. 내 손만 이해해주는 남자라면 모든것을 다바쳐 사랑하겠다는 다짐도 했었구요. 하지만 저이를 만나면서 제게 꼭 필요한 존재란 것 알게 됐습니다. 저 역시 이 사람에게 꼭 필요한 존재구요.”


김 씨는 일단 항암치료까지 끝냈지만 언제 또 ‘전이’가 올지 모르는 상황이다. 항암치료의 후유증으로 직장생활은 물론 기본적인 사회생활도 수월치 않다. 이 씨는 마음껏 ‘바가지’ 한번 제대로 긁을 수 없는 남편을 선택해 아이처럼 돌보며 살아가고 있다.


이 씨의 하루 일과는 분주하다. 남편을 돌보면서 일도 해야하니 그 무게가 만만치 않다. 그녀는 격일제로 하루 4시간 독거노인 돌봄이를 하고 있다. 4시간 일하면 2만원 정도를 손에 쥔다. 또 집에서 1시간 가량 떨어진 폔션에서 매일 5시간씩 청소원으로 일한다. 역시 시급 5천원, 그녀는 이마저도 “감사하다”고 말한다. 


이 씨의 작은 소망은 좀 더 많은 시간을 남편과 보내는 것이다. 집에 남편 혼자 두고 나오면 일에 집중이 안된다고 한다. 그래도 돈은 벌어야 한다. 두 사람의 한달 고정 수입이라고 해봐야 탈북자들에게 나오는 ‘기초생활수급비’ 40만원 씩에 김 씨의 장애인 비용 3만원, 결국 총 83만원이 전부다. 나머지 생활비는 모두 이 씨의 몫.


“폐암 환자는 잘먹어야 한대요. 빨리 돈 벌어서 남편에게 몸보신도 해주고 싶고, 이곳 임대아파트를 벗어나 번듯한 내집도 갖고 싶구요. 몸이 건강할 때 부지런히 움직여야죠.”


지난 6월 어느날, 보다 못한 남편 김 씨가 전에 일하던 주택건설현장에 다시 나갔다. ‘손도 불편한 아내가 온몸 부서져라 일하고 있는데, 남편인 내가 이부자리나 지키고 있으면 됐겠나?’하는 심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건설현장에 나간지 3일만에 숨이 차서 그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다. 주위 사람들이 “이러다가 더 큰 사고 당한다”며 그를 만류했다.


“우리 아파트 단지내에 빈가게 하나 있는데, 좀 더 돈을 모아서 장사를 하려고 해요. 남편도 옆에 데리고 앉아 바깥구경도 시키고 바람도 쏘이면서 장사를 하면, 저도 걱정을 덜고 늘 함께 있을 수 있어 좋잖아요”


이 씨의 소박한 꿈이 과연 현실로 될 수 있을까? 최근 남편 김 씨의 상황은 점점 안좋아 지고 있다. 후두부 통증이 심해지면서 숨이 차는 증상이 빈번해졌다. 김 씨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느낌을 호소하기도 한다. 한끼에 두 숟가락 정도의 음식물 밖에 삼키지 못한다.


“남편이 더 이상 아프지만 않으면 좋겠어요. 지금 이 상태도 좋아요. 돈도 못 벌고 남들에게 별로 내세울 것도 없지만 그냥 사는 날까지 조금이라도 행복한 삶을 즐기다가 갔으면 하는 바람이예요. 남편이 제 무릎에서 마지막까지 편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제 소원입니다”


삶과 죽음, 좌절과 희망의 양 극단을 모두 겪어온 이 씨에게는 ‘현실의 불행’을 ‘미래에 대한 낙관’으로 승화시키는 묘한 능력이 있다. 인터뷰 내내 기자는 감정이입으로 인한 ‘울컥’하는 심정을 추스려야 했다. 그러나 시종일관 담담했던 그녀 말이 이어지는 동안 기자의 어설픈 동정심은 설자리가 없어지고 말았다.


인터뷰를 마치고 아파트 문을 열고 나오니 어느덧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있었다. 인사차 뒤를 돌아서니 붉은 해살이 이 씨 부부의 방을 따뜻하게 비춘다. 오후 늦게 약해진 햇살은 방안 곳곳을 더 깊이 비추고 있었다. 남편에 대한 이 씨의 사랑처럼 참 은은하다.


환하게 웃는 이 씨가 배웅 인사를 건낸다.


“기자님, 우리 이야기 너무 우울하게 쓰지 마세요. 우리 부부는 잘 살아 갈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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