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찾는다면 죽어서도 한국에 갈래요”

97년 탈북, 북한으로 송환됐다 다시 탈북에 성공해 상해에 숨어지내는 여성이 지난 15일 <두리하나선교회>(대표 천기원)에 편지를 보내왔다. <두리하나선교회>측이 공개한 이 편지에는 ‘자유’를 갈망하는 재중 탈북자들의 안타까운 심정이 담겨있다.

◆ 오영란의 편지

“전 돈도 필요 없어요. 자유 찾아주세요.“
“자유의 세상 자유만 찾는다면 죽어서도 눈감고 가겠어요.”

저는 1976년 함경북도에서 태어났습니다. 김정숙의 고향이라 제2만경대라 불리우는 곳이였어요. 저의 아버지는 4살 때 돌아가셨고 어머님은 우리 4형제를 키우시다 제가 21살 때 돌아가셨어요. 그렇게 어머님 없이 일년 반을 형제들과 살다 1997년 6월 28일 저녁 10시 쪽지 한 장 써놓고 중국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말도 모르는 저에게 있어서 어떻게 팔린지도 모르게 흑룡강성 ‘가목사’라는 곳으로 팔려가게 되었어요. 거기서는 33살 되는 로총각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이는 그렇다치고 서로의 마음도 모른 채 그렇게 나의 처녀성은 가고 말았어요. 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지요.

단지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는 것이였나봐요. 그 사람은 조금만 마음에 안들면 ‘꺼래(거지)’같은 것이 왔다고 했습니다. 다른 건 참을 수 있는데 이런 말은 참을 수 없었어요. 자기네 조상들도 옛날 떠돌아다니다 여기에 정착한 다 같은 조선민족 아니던가요? 마음의 불을 겨우 참고 하루하루 지탱했어요. 돈 번 다음 보자고 말이에요. 그러던 2002년 12월 25일 성탄절 날 새벽 불시에 공안이 들이닥쳤습니다.

그렇게 화천현 공안국에 15일동안 갇혀있었습니다. 다른 때는 벌금만 하면 돌려보내던 것이 지시가 내려 무조건 북송한다는 것이었어요. 안 가려고 발버둥쳐도 부질없는 짓이었어요.

2003년 1월 10일 새벽 2시 기차 역전으로 향하니 거기엔 11명의 탈북자들이 있었습니다. 저와 같이 도문 감옥으로 호송될 사람들이었습니다. 두 사람에 하나씩 족쇄를 채웠는데 참 너무 억울했습니다. 족쇄라는 건 죄수들이 차는 거잖아요. 도문으로 가는 기차에서는 누가 제발 날 구해줬으면 하는 바램이었으나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도 않았어요.

번호가 붙은 벽돌색 조끼를 입고 몸 검사 마친 다음 배치하는 곳으로 들어가니 배고파 허덕이는 1년 넘은 아짐(아줌마)들도 있었습니다. 15일에 한번씩 몸 검사 하는데 미처 감추지 못한 돈만 있으면 빼앗아 갔어요. 참 나라가 못사니 죄수 아닌 죄로 족쇄 차고 구둣발에 채이고 돈 빼앗기고 갖은 수모를 다 겪어야 했습니다. 북한에서 태어난 것이 후회되었어요.

참지 못할 몸검사

더욱 참지 못할 것은 민족이 이렇게 천대와 멸시받으며 살겠다고 바득거리는데 조그마한 민족도 살리지 못하는 김정일 정권이 한심하고 허무하기 짝이 없었어요.

결심했어요. 다시는 이런 봉변당하지 말고 진정한 자유 찾아가야 한다고 말이에요. 온성보위부 감옥에 도착하니 줄을 세워놓고 4명씩 한 칸으로 들어가 몸 검사를 받아야 했습니다. 홀딱 벗겨놓고 자궁 안까지 검사하는 치욕스러운 모욕당해야 했어요. 돈 때문에 돈 빼내려고 이런 짓 하는 것이였어요.

지금도 생각하면 치떨려요. 보위부 감옥에 있는 동안 두 번이나 이런 모욕을 당해야 했는데 참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용납 안 되는 짓이었어요. 지구 세상에 대고 말하기조차 모욕스럽고 치욕스러운 행동이었어요.

그렇게 고향까지 가게 되었는데 반겨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친척 형제들 모두 흩어졌어요. 그래도 친구 한 명 있었기에 몸조리도 대충 할 수 있어 다시 두만강을 건너 상해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둘째 언니와 동생은 중국에 들어왔다는 소식만 듣고 큰언니는 소식도 모른 채 다시 중국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다시는 절규하고 싶지 않아, 다시는 이런 길 걷고 싶지 않아, 자유를 찾아 떳떳한 자유인이 되고 싶어요. 전 돈도 필요 없어요. 자유 찾아주세요. 자유만 찾는다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행복할 것 같아요. 자유의 세상, 자유만 찾는다면 죽어서도 눈감고 가겠어요.

소셜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