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전하는 對北방송, 북한판 ‘동독 평화혁명’ 이끌 것”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지 일주일이 지난 1989년 11월 16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에서 리아스(RIAS) 기자가 두 명의 동독 장병들이 지키고 있는 가운데 보도를 하고 있다. /사진=리아스 측 제공

동서독이 분단된 이후 시작된 서독의 대(對)동독 방송은 서독·동독 주민들을 하나로 묶어 준 강력한 매개체였다. 공산독재체제 하에서 탄압과 빈곤으로 어려움을 겪던 동독 주민들은 서독 방송을 통해 자유와 번영을 꿈꾸며 희망을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이 서독 미디어 전문가들의 공통된 설명이다.

특히 서독에서 제작했던 라디오 방송사인 리아스(RIAS)와 공영방송 ARD의 대표적 뉴스프로인 ‘타게스샤우(Tagesschau)’는 동독 주민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았다. 이 미디어들은 독재체제의 어둠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주민들에게 눈과 귀가 되어주는 희망의 빛이 됐다.

이에 대해 데틀레프 퀸 전(前) 작센주 미디어청장은 “(외부 세계를 그대로 방송하는) 서독 방송의 매체는 동독 주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정보 출처였다”면서 “동독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지시에 따라 제작되는 방송보다 훨씬 더 중요한 정보원이었다. 동독 방송은 독일 통일 과정에서 실제적으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독일 현지에서 기획취재팀과 만난 로버트 레베게른 뫼들라로이트 동서독 국경 박물관장(왼쪽 사진)도 “동독은 사회주의 국가였고 철저히 미디어를 통제한 상태였다”면서 “특히 동독에서는 (지금의 북한처럼) 사상마저도 강요받았는데, 서독의 미디어를 접한 주민들은 서서히 자신만의 사상적 그림을 갖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1955년 9월 동독 대법원에서는 리아스(RIAS, 서독 측에서 제작했던 라디오 방송사)를 스파이 혐의가 있는 범죄매체로 판결했다. 이는 서독 미디어가 동독 주민들에게 자유민주주의 사상을 전파해 주는 등 의식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반증해 주는 것이다.

이처럼 동독 주민들의 의식변화를 이끌 수 있었던 것은 서독 미디어들이 객관적·중립적 보도원칙을 철저히 지켰기 때문이다. 이러한 보도 원칙에 입각한 서독 미디어가 무력이나 강압이 아닌 동서독 국민적 합의에 의해 평화적으로 이뤄진 독일 통일을 촉진시켰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서독 방송 역할처럼 對北방송 영향력 확대해야”

이러한 서독 미디어의 영향력을 직시한 동독 정부는 북한의 국가안전보위부와 유사한 역할을 담당했던 슈타지(비밀경찰) 등을 동원해 주민들의 서독 미디어 접촉에 대한 조사·감시에 주력했다. 또한 시계모양이 다른 동서독의 뉴스방송 프로그램(서독은 선 모양, 동독은 점 모양)의 특성을 이용해 서독 방송을 보는지 파악하기 위해 초중고 학생들에게 시계 모양을 묻기도 했다.

동독은 이처럼 외부로부터의 자유사상 유입을 두려워했고, 북한처럼 전파차단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동독 주민들의 정보와 자유에 대한 갈망은 막지 못했다.



▲동독 드레스덴에 위치한 슈타지 감옥 모습. 통일 前 동독 정부는 외부 미디어를 접한 주민들을 체포해 슈타지 감옥에 수감했지만 동독 주민들의 서독 라디오 청취는 줄지 않았다. /사진=데일리NK

이와 관련, 1985년 밤베르크 대학 헤세 연구원이 동독 이주민 25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TV 시청 가능자의 94%가 서독 TV를 시청했으며, 오락프로그램 보다는 ‘타게스샤우’처럼 동서독 문제를 다룬 뉴스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가장 높았다. 라디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서독 라디오 방송사인 리아스에 동독 애청자들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엽서 등을 보내 방송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익명을 요구한 독일연방공보처 측 관계자는 “(동독 당국의) 독재라든지 슈타지 억압과 같은 내용에 대해 서독 미디어들이 정확히 보도했기 때문에 동독 주민들의 의식 변화에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다”면서 “북한 주민들에게도 자신이 삶에 무엇이 부족한지 알게 하고, 만약 그것을 얻는다면 삶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지 알려준다면, 나중에 사회적인 변혁을 꾀할 때도 큰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제언했다. 

위르겐 리히케 라이프치히 현대사포럼 관장(오른쪽 사진)은 “동독 주민들이 상상한 자본주의에 대한 잘못된 생각은 미디어를 통해 서독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봤을 때 깨지게 됐다. 특히 자신의 현실과 비교해보면서 서독과 동독의 실상을 깨닫게 됐다”면서 “(이처럼) 정보를 접하는 것에도 제한을 받고 있는 북한 주민들에게 대북 미디어는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대북방송, 북한 체제 변화에 일조할 것”

또한 서독 라디오와 TV 방송은 동독에서 평화혁명이 일어났던 1989년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미디어를 통해 동독의 자주화와 민주화의 거센 바람을 확인한 1600만 동독 국민들도 개혁의 대열에 나섰다는 것.

앞서 언급한 것처럼 동독 주민들에게 ‘정보 제공자’ ‘민주화 열망을 부추기는 촉매제’ 역할을 했던 서독 미디어는 헝가리, 폴란드, 체코를 통한 동독 주민의 탈출 소식과 곳곳에서 벌어지는 시위를 지속적으로 보도함으로써 동독 주민들에게 혁명의 용기를 북돋아 준 것이다.  

리히케 관장은 “많은 동독 주민들이 동독 내 시위 모습을 비롯해 서방 세계의 현실을 보고 거리로 향했다. 무려 10만 명이 말이다”면서 “서독 미디어는 평화혁명이 커지게 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런 의미에서 통일에도 더 없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레베게른 관장도 “1989년, 즉 평화혁명이 일어날 당시에는 미디어의 역할이 가장 강화됐던 시기다”면서 “미디어의 영향으로 이민을 가고 싶어 하는 열기, 정치적 반대 세력의 확산, 그리고 그것의 결과물로서의 시위가 평화혁명을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평화혁명은 동독 사람들이 일으켰지만, 서독의 미디어가 없었다면 평화혁명은 물론 통일이 이뤄졌을 것이라 장담하기 어려웠다”면서 “이처럼 대북 미디어를 통해 정치적 자유의 힘, 경제적 힘을 보여준다면 북한에서도 평화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될 것”이라고 제언했다. 

손기웅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최근 기자와 만나 “동독이 서독의 체제로 편입됐기 때문에 흡수통일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다. 동독 주민들은 서독의 삶을 목격한 후 스스로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린 것”이라면서 “(북한 주민들에게) 언론을 통해 우리 사회를 보여주며 ‘자, 봐라. 이게 자유민주주의 체제다. 그래도 북한이 인민이 주인인 나라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택해라’라고 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1962년 2월 22일, 당시 미국 법무상 로버트 F.케네디가 서 베를린을 방문했을 때 리아스가 이동식 차에서 취재하고 있다. /사진=리아스 측 제공

※본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 지원을 받아 작성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