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로 본 북한, ⑥재일동포 북송

북한의 재일동포 북송사업은 냉전시대 치열했던 남북체제 경쟁의 대표적 사례였다.

북한이 지난 1959년 첫 북송선을 띄웠을 때 남한의 격렬한 반응과 그 이후 1974년 남한이 재일교포 모국방문 사업을 벌인 것은 이를 잘 말해준다.

북한의 북송 사업은 1984년 사실상 중단됐고, 그때까지 북송된 교포는 8만-9만명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지난해 호주 국립대 스즈키 교수는 비밀해제된 국제적십자사 문서를 통해 일본 정부가 그동안 재일동포 사회와 북한의 요구에 따라 인도적 차원에서 북송을 승인해줬을 뿐이라고 주장해온 것과 달리 재일교포의 범죄율이 높고 빈곤한 가정이 많아 생활보호 재정 부담이 많은 점 때문에 북한의 북송사업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협력했음을 밝혀내기도 했다.

특히 북송자중엔 재일교포와 결혼한 일본 배우자들도 최소 1천500명 이상 포함돼 있는 것으로 동구권 외교문서에 나타나 있다. 북한과 일본간 일본인 처 귀환문제의 시발점은 수십년전 북한과 일본의 협력에서 비롯된 셈이다.

북한이 의기양양하게 북송사업을 시작했다가 수년만에 시들해진 것은 북한의 실상이 알려진 데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옛 평양주재 공산권 외교관들의 관찰로는 북송자들이 북한 내부에서 체제불안 요인이 됨에 따라 북한 스스로도 흥미를 잃은 측면도 강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 재일동포 북송사업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도와

▲김일성, 북송사업 자신감 표명 = (1959년 5월14일 헝가리 대사관 보고서) 김일성은 5월8일 헝가리 당 대표단에게 북한이 일본을 떠나려는 재일교포들을 수용할 만큼 충분히 강해졌다고 말했다.

▲소련 선박 지원 = (1959년 12월16일 헝가리 대사관 보고서) 소련 대사관의 율린 동지 말로는 북한 적십자사와 소련 선박회사가 선박 3척에 대한 용선 계약을 체결했다. 이들 선박으로 약 3천명을 수송할 예정이다.

남한 정부가 12월13일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남한 해군이 경계태세에 들어간 데 대해 소련 배의 선장은 배가 공격받으면 적십자사기와 소련기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미국 충돌 방지 부심 = (같은 보고서) 서울의 동양통신에 따르면 12월14일 남한 주둔 유엔군의 미군 사령관이 유엔군 소속 군인들은 북송 차단을 위한 (남한의) 어떤 행동에도 참여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미군 사령관은 남한 국방장관에게도 한국군에 대해 같은 조치를 취하도록 일렀다.

▲북송교포 특혜 = (1960년 5월10일 헝가리 대사관 보고서) 대규모 재일교포 북송이 계속되고 있다. 청년들은 대학에 등록했다. 전문 기술자들의 임금 수준은 북한의 다른 숙련공이나 기술자들 보다 훨씬 높다. 일부 공장에선 지배인보다도 높다.

북송 교포들은 거의 모두 신축 건물에 안락한 집이 주어졌다. 임대료나 전기세도 내지 않는다. 첫 몇달동안은 식품과 난방도 공짜다.

이들에게 좋은 식품을 공급하기 위해 북송교포 전용 특수상점이 평양에 여러 곳 생겼다. 다른 일반 백화점보다 상품이 풍부하다. 체코와 루마니아 동지들에 따르면 가격은 다른 곳보다 낮다. 도시거주 북송교포들은 공공 교통비도 내지 않는다.

▲북송자에 대한 반감과 동요 = (1960년 5월10일 헝가리 대사관 보고서) 북송교포의 기술이 북한 숙련공보다 나은 것은 사실이나 임금이 그렇게 차이나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소련, 체코, 루마니아, 몽골 동지들과 얘기해보니 모두 북송교포에 대한 특혜가 북한 노동자들에게 나쁜 인상을 줬을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 노동자들은 조만간 생필품 공급과 임금 특혜에 문제를 제기할 것이며, 이미 그런 소리들이 들리고 있다.

북한 노동자들은 특히 북송교포중 애국심이 아니라 “다른 목적”을 가진 사람들도 많이 포함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북한의 조선노동당은 일부 파괴요소들이 잠입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북송교포를 사시해선 안된다고 달래고 있다.

(1960년 8월1일 헝가리 대사관 보고서) 북한 노동자들은 실제로는 북송자를 별로 안좋아 한다. 북송자들에게 좋은 집을 주기 위해 자신의 집에서 쫓겨난 사람이 많다.

▲북송교포 분석 = (1961년 3월 동독 대사관 기밀보고서) 1960년말 무렵까지 북한은 북송 선박을 54차례 보내 약 5만3천명을 북송했다. 이들 중 94%는 남한 출신이다.

700명은 전문기술자, 300명은 과학자와 예술가, 4명은 의사나 약사. 재일교포 배우자인 일본인 1500명도 포함됐다.

자영업자와 중소기업 소유주들이 가장 잘, 그리고 가장 빨리 북한 생활에 적응했다. 이들이 가져온 공장 설비와 부품, 자동차 등은 높은 이윤을 냈고, 직장에서 최고직을 얻을 수 있도록 해주는 등의 이점이 있었다.

전문기술자들도 사정이 좋다. 특수 전문기술이나 지식에 따라 고용됐다. 일본에서 높은 세금과 극도로 열악한 생활여건 때문에 가장 고통받던 계층이었던 농민들도 대부분 생활이 나아졌다.

▲일본의 북송 적극 권장 = (같은 보고서) 1961년 1월 북한의 신문과 라디오에서 북송 보도와 발표가 눈에 띄게 줄었다.

1961년 2월 3일 일본 적십자사는 북한 적십자사가 “독감 유행을 막기 위해 북송을 일시 중단한다”는 전보를 보냈다고 발표했다.

북송동포, 일본 친지들에게 “북에 오지 마라” 편지

당일 일본 적십자사는 북한에 “55차 선박을 즉각 보내라. 니이가타에 735명이 기다리고 있으나 독감에 걸린 사람은 없다. 북송자들에게 예방접종을 해주겠으니 의사도 함께 보내라”는 내용의 답신 전보를 보냈다고 도쿄의 인터내셔널 라디오가 보도했다.

▲북송중단 배경 분석 = (같은 보고서) 북송이 중단된 실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북송자들이 일본 친지들에게 생활여건을 이유로 오지 말라고 편지를 보냈다.

2.북송자 통제가 힘들다. 우리 대사관은 북송 청년들이 떼지어 평양에 나타난 것을 봤다. 그들끼리 만나는 장소가 따로 있고, 경우에 따라선 말썽을 부렸다.

3.북송자를 통해 휴대용 라디오, 녹음기 등이 북한 주민에게 보급됐다. 특히 북한 청년 교육에 어려운 문제가 생겼다.

4.북송 청년들이 자전거, 라디오, 시계, 가죽옷과 지갑, 양복, 녹음기 등을 판 돈으로 살면서 직장도 얻으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해 ’암시장’이 번성했다.

5.북한 당국은 북송자를 오지를 포함해 북한 전역에 분산배정했으나 이를 어기고 대도시로 이주한 사람이 많다.

6.여성 북송자들은 일본에서처럼 다양한 상품을 살 수 없어 불만이 커졌다.

7.안보와 방첩면에서도, 일본을 통해 공작원과 간첩을 침투시키려 하는 남한의 적에게 북송은 손쉬운 침투 기회가 된다. 또 휴대 라디오 등 간첩행위와 사보타주용 수단이 북한에 유입되는 기회도 됐다.

이같은 문제들을 북한 당국이 공개 시인한 것은 아니다. 다른 나라 대사관 외교관들의 관찰과 대화ㆍ만남을 통해 확인한 것들이다./워싱턴=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