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따른 탈북자 망명신청과 황장엽 선생의 경우

탈북자 마영애씨의 미국 ‘정치망명’ 신청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심정은 안타깝고 착잡하다.

현재 마씨 외에도 미국에 체류하면서 망명을 신청 중인 탈북자가 더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미국의 인권단체 ‘휴먼라이츠 프로젝트’의 주디 우드 변호사는 13일 자유아시아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에서 망명을 신청한 탈북자가 15~20명이며, 이들 대부분이 한국에 정착했다가 멕시코 등을 거쳐 밀입국한 경우라고 밝혔다.

탈북자의 망명신청에 대한 최종 판단은 물론 미국정부의 몫이다. 또 마씨의 정치망명 신청 자체는 그 사유의 사실 여부를 떠나 개인의 권리와 자유에 속하는 측면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김정일 독재정권과 2천3백만 주민들이 처한 참혹한 현실, 그리고 북한의 인권실현을 위한 한국과 국제사회의 역할 등을 종합적으로 감안하면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탈북자들의 망명신청을 그리 간단하게 볼 문제가 아니다.

북한 민주화 1차 기지(基地)는 남한

지금까지 북한인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세계적인 이슈로 부각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사람들은 유럽과 미국의 인권운동가들이었다. 이 때문에 한국의 진정한 진보세력과 북한인권운동가들은 외국 인권운동가들의 헌신성에 감사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도덕적 부채(負債) 의식을 갖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한국의 대다수 탈북자들과 북한인권운동가들이 더 열심히 뛰려고 노력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북한의 인권실현과 민주화를 위해 노력해야 할 첫 당사자는 한국정부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북한의 인권실현과 민주화가 왜 대북정책의 기본원칙과 목적이 되어야 하는지조차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이 때문에 북한인권 문제는 나중에 제기해도 된다는 식의 기능주의적 수단쯤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결국 북한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속셈과 무식이 죄인 셈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를 지금 노무현 정권이 영원히 대표하는 게 아니다. 어차피 앞으로 1년 반 정도만 지나면 이 정권은 국민의 심판대에 올라서야 한다.

마영애씨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한국에서 북한인권운동을 하다 탄압을 받았으니 자유로운 미국에서 열심히 운동을 하는 게 더 낫지 않으냐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말인즉 틀리지 않다. 그리고 외국의 인권운동가들과 연대하는 것도 당연한 이야기다.

하지만 ‘정치망명’ 문제는 좀더 깊이 생각해보야 한다. 북한의 인권실현과 민주화를 위한 1차 기지(基地)가 남한이 되어야 옳은가, 외국이 되어야 옳은가? 남한과 외국에서의 활동이 각각 역할이 있겠지만 그래도 어디가 주체가 되어야 할까? 그것은 남한이다.

황장엽 선생의 냉철한 판단

이 대목에서 우리가 참고해야 할 사례가 있다. 황장엽 선생의 경우다. 황선생은 김대중 정부 시기부터 방미(訪美)문제로 숱한 어려움을 겪다 2003년 11월에야, 그것도 아주 짧은 기간동안 미국에 다녀올 수 있었다. 황선생의 방미를 방해한 김대중 정부의 행위는 명백한 ‘탄압’이었다. 필자는 그 과정을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다. 황선생의 방미 전 어느 월간지에서 ‘황장엽 미국 망명 추진설’이라는 기사가 나온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오보였다. 황선생은 방미 전에도, 그 이후에도 미국망명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황선생은 북한을 떠나 남한에 온 행위도 ‘망명’으로 표현하는 것을 거부하고 되도록 ‘남행’(南行), 또는 ‘조국의 다른 한쪽을 찾아왔다’고 썼다.

일부 알려진 사실이지만 황선생은 방미 기간 중 교포들로부터 망명권유를 받은 적이 있다. 당시 김대중 정부에 이은 노무현 정부의 탄압을 감안하면 재미교포들의 권유는 황선생에 대한 존경심과 나름의 현실적 판단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황선생은 망명권유를 거부했다. 그 이유가 뭘까?

황선생은 북한을 떠나올 때부터 북한의 인권실현과 민주화의 전초기지가 남한이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정일 독재정권을 개혁개방 민주주의 정부로 교체하고 북한의 민주화를 실천해야 할 당사자는 물론 북한인민이다. 그러나 현재 북한인민은 김정일 정권의 인질로 잡혀 있다. 따라서 단기간 내에 이들이 독재정권을 교체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렇다면 남한과 국제사회가 해야 할 역할은 무엇일까. 그것은 남한이 북한 민주화를 위한 1차 기지가 되고, 미국을 비롯한 동맹국과 국제사회가 남한과 연대하여 도와주는 것이다. 황선생은 이것이 북한민주화의 정도(正道)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대외 이미지, 모두가 심사숙고해야

마영애씨를 비롯한 일부 망명신청 탈북자들의 심경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사회적 약자인 탈북자에 대한 편견, 남한적응의 어려움, 김대중-노무현 정권으로 이어지는 음양의 탄압이 일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탄압이 황장엽 선생에게 가해진 무게만큼 되는 것도 아니고, 외국에 정치망명을 신청할 정도로 극단적인지를 곰곰히 되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황선생 말고도 자유북한방송의 김성민 대표나, 김태진・강철환 북한민주화운동본부 대표를 비롯한 대다수 탈북자들이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이 활동하고 있다. 정치망명은 쉽게 생각하고 쉽게 행동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만약 탈북자들의 정치망명이 이어져 대한민국의 이미지가 인권탄압이 심한 지역으로 대외에 알려진다면, 외국에서는 한국이 과연 북한민주화를 위한 1차 기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될 수 있다. 이는 북한민주화를 위한 남한의 역할을 부인하는 데 일조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다. 냉철한 판단이 요구되는 것이다.

정치망명 신청이 진정으로 북한인권을 생각해서인지, 남한사회에서의 일시적인 불편함을 피하기 위한 것인지도 스스로에게 다시 물어봐야 한다. ‘탈북자도 엄연한 대한민국 국민’임에 틀림없으니까, 불편함이 분명히 있다 하더라도 먼저 대한민국을 진정으로 사랑하는지를 물어봐야 하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만 보장되는 사회가 아니다. 그와 똑같이 대한민국 공동체를 사랑해야 할 책임과 의무도 지게 되어 있다. 책임과 의무가 불편하다면 찬바람 부는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자유와 권리를 찾아온 의미도 무색하게 된다.

망명신청 일부 탈북자들의 신중한 재고를 다시 한번 요청한다.

손광주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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