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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북한방송(대표 김성민)은 지난 98년 한 국군포로가 탈북한 이후 북에 남은 가족들이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는 장면을 목격한 탈북자의 편지를 11일 소개했다.
편지는 1998년 국군포로 직계 가족들이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기 전 함경북도 온성역전에 집결했던 당시 현장을 목격한 내용을 담고 있다.
편지를 보낸 탈북자 김성국(가명)씨는 2004년 12월 탈북해서 올해 초 국내로 들어왔으며, 98년 탈북 국군포로도 이미 국내에 입국해 있다.
김씨는 “그 국군포로를 남한에서 직접 만나 소식을 전하고 싶었지만 아무리 수소문을 해도 찾을 수 없었다”며 “인터넷을 통해서라도 사연을 전하고 싶다”고 사연을 소개한 이유를 밝혔다. 그는 최근 남한의 비전향장기수가 사망 후에도 북으로 송환됐다는 소식을 듣고 당시 일이 문득 떠올랐다고 한다.
편지는 가족들이 수용소로 끌려가며 탈북 국군포로의 친딸과 그녀의 자식들이 생이별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편지는 “수용소로 끌려가는 딸이 눈물을 머금고 주변을 맴도는 초췌한 젊은이(수용소행이 면제된 ‘형부’)에게 무언의 부탁을 하던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형부, 제 딸들을 죽지만 않게 돌봐주세요. 제발 부탁이에요…” 눈물이 그렁그렁한 여인의 두 눈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피를 토하는 듯한 절절한 그 무언가가 여인의 눈가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라고 회상했다.
김씨는 편지 마지막 부분에서 “그 눈물을 가셔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불쌍한 그 애들을 품어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프겠지만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을 이름 모를 그 국군포로 분에게 드리는 이야기 입니다”라고 가족들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저 북녘 땅에서 고통 받고 있는 이 나라의 수많은 국군포로들을 위해 대한민국정부에 하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아래는 편지의 전문.
6년 전 일입니다. 혹시 당사자도 알고 있는 사연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일이 어느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어서 글로 적어봅니다. 가을 어느날 새벽, 온성역에 난데없는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역전 대합실에, 도살장에 끌려가는 황소보다 더 안쓰러운 표정을 지은 사람들이 횡으로 늘어서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차림새가 특이했습니다. 아무리 못살고 못 먹어도 어디 나들이 가거나 출장을 갈라치면 어느 정도의 차림새는 갖추는 것이 북한사람들의 마음인데 가족인듯 싶은 그들은 그냥 집에서 막일하다 나온 차림을 하고 있었습니다. 얼핏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습니다. 멀찌감치 그들을 바라보며 사람들이 하는 말을 얻어듣자니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는 가족인데, 국군포로 가족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부터 그들을 지켜본 사람들의 이야기로는 물 한모금 못 먹고 늘 그렇게 서있었다는 것입니다. 모두 세 가족이었습니다. 한 가족은 국군포로 당사자의 가족이고, 나머지 두 가족은 국군포로의 자녀들로서 2년 전에 출가하여 딴 살림을 하던 사람들이였다 합니다. 국군포로라는 사람은 장교로서 6.25때 인민군에 포로가 되었으며 53년 포로교환 당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북한에 남게 되었고 (함경북도)경원군 하면탄광에서 탄광 일을 하다가 60년대 초에 하면탄광이 조락, 그래서 온성군 상화탄광으로 이송되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던 그가 1998년에 탈북하여 오매에도 그리던 고향 남한으로 간 것입니다. 이런 것을 두고 북에서는 사건이라고 하지요. “사건”이 있은지 얼마 안 되어 그의 가족들이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없다는 그 생지옥 정치범수용소라는 곳으로 끌려가게 된 것이다. 그날,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간 사람들은 당사자(남으로 간 국군포로)의 직계가족들인 아들과 며느리, 손자와 손녀, 그리고 두 딸을 포함해서 모두 일곱 명이었습니다. 가족 중 남은 것은 큰 사위(보위부에서 강제 이혼 시켰다고 하더군요)와 그의 자녀 2명, 그리고 둘째 딸의 자녀(둘째 사위는 병으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2명, 합쳐서 모두 5명이였다. 직계 자손들만 끌려가다 보니 다행히도 제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남은 자식들이 더 문제라고, 보는 사람마다 혀를 차는 것입니다. 큰 딸의 자식들인 경우는, 남편이 남아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지만 둘째딸의 자녀들은 맡길 곳이 없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래도 형부라고 주변을 맴도는 초췌한 젊은이에게 둘째딸이 눈물을 머금고 무언의 부탁을 하던 모습이 지금도 선 합니다. “형부, 제 딸들을 죽지만 않게 돌봐주세요. 제발 부탁이에요…” 눈물이 그렁그렁한 여인의 두 눈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니, 제가 표현력이 부족해서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데 정말, 피를 토하는 듯 한 절절한 그 무언가가 여인의 눈가에 매 달려 있었습니다. 부부가 열심히 수족을 놀려도 하루 한 끼 걱정이 끊길 날 없는데 올망졸망한 네 식솔을 무슨 수로 거느린단 말입니까. 주인 잃은 강아지보다 더 가볍고 애처롭게 느껴지던 어린 운명들이었습니다. “엄마, 어디가?······” 철없는 어린것들이 울며 떼쓰는 위험천만한 모습도 모습이지만 자식들을 마지막으로 품에 안고 몸부림치는 여인의 눈물범벅이 된 얼굴도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열차가 도착하자 발길질까지 해대며 엄마 품에서 자식들을 떼어내던 보위부의 호송인원들… 정말이지 그 순간, 저뿐이 아닌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해도 너무한다고 혀를 찼었습니다. 그때로부터 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남한의 비전향 장기수가 죽어서라고 고향으로 가게 되었다는 소식들 듣고 보니 그때일이 문득 떠 오른 것입니다. 무정한 열차의 마찰음 소리, 그보다 더 아프게 내 마음을 흔들던 애들과 엄마의 아픈 울음소리… 그 눈물을 가셔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불쌍한 그 애들을 품어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프겠지만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을 이름 모를 그 국군포로 분에게 드리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저 북녘 땅에서 고통 받고 있는 이 나라의 수많은 국군포로들을 위해 대한민국 정부에 하는 이야기입니다. |
이현주 대학생 인턴기자 lhj@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