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원 회고록, 알려지지 않은 얘기들

임동원(林東源) 전 통일부 장관은 8일 발간된 자신의 회고록 ’피스메이커-남북관계와 북핵문제 20년’에서 남북고위급회담에서 2000년 남북정상회담, 고농축우라늄(HEU) 문제로 불거진 제2차 북핵위기까지 20여년간 대북정책 및 협상의 현장을 기록했다.

다음은 임 전 장관이 그 현장의 주역으로서 펴낸 회고록을 통해 밝혀진 새로운 내용들이다.

▲김정일 “南 비료, 인민들이 매우 고마워 한다”= 남북정상회담 직전, 정상회담 때, 2002년 4월 등 3차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나 장시간 기탄없는 대화를 나눴던 임동원 전 장관은 김 위원장의 이례적인 발언들을 ’대화록’ 수준으로 정리해 회고록에 담았다.

정상회담 직전 면담 때, 김 위원장은 “주한미군은 공화국에 대한 적대적 군대가 아니라 조선반도의 평화를 유지하는 군대로서 주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미 1992년 우리는 김용순 비서를 미국에 보내 이러한 뜻을 미국 정부에 공식적으로 전달한 바가 있다”며 “너무 반미로만 나가 민족이익을 침해하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우리 역시 과거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미국과 관계정상화를 이루는 일을 중요한 과제로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이 정상회담에서도 똑같은 말을 하는 데 대해 김대중 대통령이 “그런데 왜 언론매체들을 통해 계속 미군철수를 주장하느냐고”고 묻자 김 위원장은 “미군철수를 주장하는 것은 우리 인민들의 감정을 달래기 위한 것이니 이해해주기 바란다”라고 답했다.

김 위원장은 정상회담에 앞서 방북한 임동원 전 장관에게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방문 때 전직 대통령들도 함께 오시면 좋겠다”며 “아마도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은 오겠지만 김영삼 대통령은 안올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고 “나의 서울 방문 문제를 벌써부터 논하는 것은 시기상조이지만 김영남 상임위원장이 먼저 서울을 방문할 수 있을 것이고 그 때 박정희 대통령의 묘소를 참배하게 하겠다”고 밝혔다.

결국 북측 대표단의 국립현충원 참배는 2004년 8.15남북공동행사에 참가한 김기남 노동당 비서를 통해 현실화됐다.
회고록은 정상회담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통일문제와 통일방안에 대해 밝힌 생각도 담았다.

김 위원장은 “대통령께서는 완전통일은 10년 내지 20년 걸릴 것이라고 하신 것으로 아는데 나는 40년, 50년이 걸릴 것으로 생각한다”며 “내 말은 연방제로 즉각 통일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건 냉전시대에 하던 얘기다. 내가 말하는 ’낮은 단계 연방제’라는 건 남측이 주장하는 ’연합제’처럼 군사권과 외교권은 남과 북의 두 정부가 각각 보유하고 점진적으로 통일을 추진하는 개념”이라고 강조했다.

김 위원장은 또 “남쪽에서 비료를 보내주어 감사하다. 인민들이 매우 고마워하고 있다. 비료 10만t이면 알곡 30만t의 생산효과를 가져온다. 3배의 생산효과가 있는 것”이라고 사의를 표시하기도 했다.

2002년 특사방북 때는 김 위원장이 임 전 장관에게 자신이 인터넷을 통해 남쪽의 사정을 실시간으로 접하고 있다면서 “부대를 방문할 때 지방에 묵으면서 밤에는 인터넷을 통해 남쪽 TV뉴스를 동영상으로 볼 수 있어서 참 편리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임 전 장관이 북한 화력발전소의 개보수에 대한 지원을 언급하자 김 위원장은 “내가 화력발전소 개보수는 이를 건설한 러시아가 맡아서 해야 한다고 러시아측에 요구했다”며 “그렇게 안하면 우리도 빚을 갚지 않겠다고 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정상회담, 처음엔 국정원장도 몰랐다 = 김대중 정부에서 햇볕정책을 총괄한 그이지만 남북정상회담 논의의 출발점에선 추진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는 국정원장으로서 2000년 2월3일 김대중 대통령에게 주례보고를 한 자리에서 비로소 “북한이 정상회담 추진 의사를 전해왔다.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이 현대의 이익치 회장과 요시다라는 사람을 만나 북측의 정상회담 추진 의사를 전달받았는데 이 문제 협의를 위해 곧 제3국에서 박지원-송호경 접촉을 갖자는 제의도 받았다”고 소식을 들었다.

북한의 정상회담 결심을 이끌어내는 데 도움됐던 ’베를린 선언’은 “발표 하루 전에 서울로 보내져 미국을 비롯한 우방국들에게 사전에 통보됐고 판문점을 통해 북측에도 전달돼 이 연설이 단순한 선전용이 아니라 북측에 진지하게 제의하는 성격임을 분명히 알렸다”고 임 전 장관은 밝혔다.

당시 남북정상회담에 합의하기 이전 남북 비밀특사 회담에 대해 알고 있었던 인사는 박태준 국무총리와 스티븐 보스워스 주한미대사의 보고를 받은 미국 대통령 및 국무장관 등 미국 최고위층 인사 5, 6명에 한정돼 있었다고 임 전 장관은 밝혀 남북정상회담 추진과정에서 미국과 공조에 역점을 두었음을 소개했다.

▲김정일, 이르쿠츠크 정상회담 제의 = 임 전 장관이 2002년 4월 특사로 방북했을 때, 김 위원장은 답방에 대해 “남쪽의 한나라당과 우익세력이 6.25전쟁에 대해 사죄하라, 칼(KAL)기 폭파사건을 사죄하라 하면서 방문 반대와 반북 분위기를 조성하며 위해를 가하겠다고 협박하고 있는 판에 내가 서울에 가는 것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키게 된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제3국에서 만나는 방안을 생각해보자”며 시베리아의 이르쿠츠크를 제시하면서 “이루쿠츠크에는 큰 호텔도 10여개 있다. 필요하다면 러시아 대통령과 3국 정상회담을 통해 시베리아 철도 연결문제도 협의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신중한 검토 끝에 수용 불가 결론을 내렸다. 미국을 비롯해 우방국의 오해를 살 수 있고 또 반드시 김정일 위원장이 남쪽 땅에 와야 답방 합의가 의미있게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임 전 장관은 당시 북한의 김용순 노동당 비서에게 메시지를 보내 “조기에 제2차 정상회담을 갖자는데 동의하며 개최시기는 6월 하순에서 7월 중순 사이가 좋겠으며 장소는 판문점 우리측 평화의 집으로 하자”고 제안하면서 “이르쿠츠크는 서울을 방문한다는 애초의 합의와는 거리가 멀어 국민과 주변국에 오해를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 비서는 회신에서 “판문점은 ’악의 축’이라며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미군이 관할하는 지역이므로 여기서 회담을 갖자는 것은 말도 안된다”며 “다른 남측 지역도 그 어느 때보다 우리를 군사적으로 위협하는 미군이 있고 인민들의 반미 반정부 시위로 혼란하고 불안전한 곳인데 장군님께서 귀측 지역으로 간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주장했다.

러시아의 이고리 이바노프 외무장관의 7월 방한을 앞두고 러시아 정부도 한국의 주러 대사를 통해 정상회담 주선 용의를 전달해왔지만 정부는 신중한 검토를 거쳐 이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고 임 전 장관은 소개했다.

이후에도 북측과 논쟁은 지속됐지만 북측은 “이 문제를 더 이상 논의할 필요가 없으며 제의를 철회한다”고 밝혔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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