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는것은 변태수령체제…얻는것은 北주민 희망

I.


이명박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밝힌 통일세에 대하여 논란이 일고 있다. 가뜩이나 이런 저런 세금에 허덕이는 서민들에게 또 다른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 옳으냐는 지적부터 김정일 정권을 불필요하게 자극시키는 부적절한 행위라는 비판이 있다.


다른 한편 가능하면 북한정권을 옹호하고 있는 민주당이나 노골적으로 북한정권이라면 감싸는 민주노동당의 반응은 더 언급할 필요도 없이 통일세에 비판적이지만, 한나라당 역시 전반적으로 ‘웬 통일세?’라는 떨떠름한 표정이다.


실제로 현재 한국에서 통일논의는 국민들로부터 그렇게 환영받는 주제가 아니다. 형제간에도 재산싸움이 벌어지는 판국에, 국민들은 알지도 못하는 북한주민을 위해 많은 돈을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이런 와중에 통일의 당위성이나 현실성에 대한 논의 없이 대통령이 ‘돈 이야기’로 통일논의의 물꼬를 트자고 나왔으니 반응이 시큰둥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통일세는 현실적인 문제이다. 그것은 북한의 급변사태가 조만간 닥칠 것이라거나, 대통령이 일반 국민이 모르는 북한의 내부사정을 알고 있으리라는 추측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올바른 통일이 무엇인지, 그 올바른 통일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를 따지기 위해서도 통일세, 즉 통일비용에 관한 이성적 논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통일세 논의와 함께, 어마어마한 액수의 통일비용을 언론들은 언급하였다. 그러나 기존의 통일비용 추정이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인지는 조선일보의 8월 15일 보도에 잘 나와 있다. 랜드연구소의 한 국제경제 전문가는 “북한을 남한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드는 비용은 1조7천억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추정하였고, “피터 벡 미 스탠퍼드대 아시아․태평양센터 연구원은 통일비용으로 최대 5조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처럼 엄청난 액수의 통일비용계산은, 실직자에게 실업수당, 의료수당, 주거수당, 직업교육 등 각종 사회보장비용을 지불해야만 하고 또 그럴 능력이 있는 독일의 통일과정을 모형으로 삼은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구동독 주민들에 대한 생활비 지급이 통일비용의 대부분이었던 독일의 경우, 막대한 통일비용의 감수는 구동독지역에서 생산성 향상을 오랫동안 지체시켜 왔다. 사실 독일은 통일을 선택한 것이라기보다는 통일이 독일에 쓰나미처럼 몰려 왔기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 한마디로 엄청난 재력을 갖고 있던 국가의 통일방법이었고 다행히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지금 독일에서 통일의 가치와 의미를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경부터 통일된 독일에서 ‘일부’ 독일국민들이 막대한 통일비용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자, 남한 주도의 통일을 극력 반대하고 두려워하던 한국의 좌파들은 국민에게 ‘통일비용공포’를 조장하여 흡수통일을 언급조차 해서는 안 될 기피개념으로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나 흡수통일이란 애매한 표현이며 더 정확히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로의 통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한국좌파는 자유민주주의로의 통일을 결사반대한 것이다.


동시에 한국좌파는 햇볕정책을 통해 남북이 화해하고 북한에 상당기간 원조를 계속하여 북한 경제를 끌어올리면, 그때 가서는 통일에 대한 논의를 할 수 있다는 점진적 통일론을 제시하여 국민들은 이런 통일론을 흡수통일의 합리적 대안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런 햇볕정책-점진적 통일론이 완전히 허구라는 사실은 김대중과 노무현 정권이 막대한 대북원조를 하였음에도 김정일은 개혁․개방의 반보도 옮기지 않았다는 점에서 분명하다. 그러나 햇볕주의자들은 “아직 충분히 북한에 주지 않았다”는 주장을 통해 햇볕정책을 일종의 종교적 신념으로 만드는 데에 일부 성공하였다.


그러나 점진적 통일론은 심정적으로 통일의 당위성을 부정하지는 못하지만, 계산적으로는 통일의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자기모순적 입장을 ‘통일은 일단 미래세대로 넘기자’는 식으로 적당히 얼버무린 것에 불과하다. 바로 이런 이유로 지금까지의 이른바 ‘로드맵 통일론’, 즉 각종 3단계 통일론이란 통일지향이 아니라, 실은 분단관리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비판이 터져 나온 것이다.


II.


그러나 통일비용이란 오로지 특정한 통일 방식을 전제하였을 때에만 의미가 있다. 앞에서 외국학자들이 계산한 통일비용이란 간단히 말해 한국의 두 가구가 ‘한국’의 한 가구를 부양한다는 지극히 비현실적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왜냐하면 생활력이 강하기로 이름난 북한주민들은 통합기간으로 설정된 30년의 세월동안 모두 백수로 지낸다는 것을 가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인권연구소 소장 윤여상 박사는 실은 한국의 두 가구가 ‘조선족’의 한 가구를 부양하는 수준이면 충분하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통일비용 공포는 초호화결혼식 비용을 결혼비용이라고 못 박고, 우리는 그런 돈이 없으니 결혼할 수 없다는 생각과 동일하다. 정말 사랑하여 결혼을 원하는 젊은 남녀는 불필요한 결혼비용을 줄이고 양쪽 집안이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만족할 것이다. 왜냐하면 젊은 이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통일비용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흔히 통일비용의 내역을 위기관리, 사회통합, 소득격차 해소 등으로 나눈다. 그러나 통일비용의 진정한 의미는 북한주민들에게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낫다’는 희망창출에 있다. 이런 점에서 남북 간의 소득격차가 엄청 크기에 감당해야 할 통일비용도 막대하다는 주장은 잘못된 발상에 기인한다.


통일비용을 희망창출의 비용으로 볼 경우 남북 간의 소득격차가 크기 때문에 통일비용은 훨씬 더 적어질 수 있다. 왜냐하면 북한 경제는 더 이상 낮아질 수 없기에 정상적 경제재건 정책이 추진된다면, 마치 2차 세계대전 후의 유럽처럼, 매일 매일 복구되는 삶에 북한지역에는 미래에 대한 낙관주의가 넘칠 것이다. 이것이 핵심이지, 소득의 절대액수나 남북 간의 평균화가 관건이 아니다. 소득은 중요한 요소이지만, 행복에는 희망이 더 큰 영향을 끼친다.


궁극적으로 한 세대가 걸릴 수밖에 없는 ‘남북통합과정’에서 통일비용은 북한주민이 스스로 희망창출이 가능할 때까지 남쪽의 지원하는 비용이 되어야 하며, 이 과정에서도 남북 간의 엄청난 상호이익이 발생함은 명백하다. 우선 남북 모두 수많은 분단관리 비용이 사라져, 그중 상당액수가 통일비용으로 전환될 수 있다.


또 북한의 경제성장이 시작되면 한국에도 경제․사회적 이익이 적지 않게 돌아올 수 있다. 북한의 저임금을 이용한 기업의 경쟁력 강화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 과거 개발시대에 척박했던 한국의 현실에서 경제를 일구어 낸 현재 60대 이상의 ‘젊은 노인’들이 한국에는 수두룩하다. 이들은 국내외 시장경제를 알고 있고 맨 땅에서 경제기적을 일으키는 노하우를 갖고 있는 귀중한 인재들이다. 이들이 현재 한국에서는 할 일이 없다.


 III.


그러나 통일비용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경제적 측면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현재 세계경제대국으로 일어난 중국의 요즈음 행태로 보아 중국이 남북한의 자유민주주의체제 통일을 원하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다.


천안함 폭침과 한미합동훈련에 대한 중국의 반응 뿐 아니라 한국전쟁의 기원, 동북공정과 티베트 문제에서 보인 중국정부의 태도는 역사위조도 불사하는 패권주의로서 아직 중화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08년 북경올림픽 성화 봉송과정에서 서울에서 일어난 중국유학생의 안하무인격 태도는 바로 이런 역사 왜곡이 장기간 계속되어 중국의 젊은이들이 진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중국이 한국에 갖는 경제적 위상은 점차 절대적이 되어, 한국의 대중국 발언권은 미약하기 그지없는 수준으로 낮아지고 있다. 우리는 물론 남북의 통일이 중국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점을 외교적으로 설득해야 한다.


그러나 가장 합리적이고 외세의 영향을 덜 받는 통일방안은 남북 국민과 당국자들 간의 합의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 경우 통일을 ‘공식적으로는’ 남북의 내부문제로 간주하는 중국도 개입의 명분을 상실한다.


그렇다면 북한 당국자에게 자유민주주의 체제로의 통일을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우선 김정일 생전에는 전혀 기대할 수 없으며, 김정일 이후라도 북한의 현 체제가 유지되는 한 통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판단할 때 북한의 현재 수령주의 패쇄 공포체제는 유지가 절대 불가능하다. 북한 체제의 올가미가 풀어질 수밖에 없는 물적 토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작년 12월에 있었던 화폐개혁이 실패하고, 다시 시장이 더 큰 자생력, 저항력을 갖고 북한사회에 돌아왔다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그 결과 공공연하게 도와주는 것 없이 훼방만 놓는 북한정권을 비판하는 모습도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따라서 길게 볼 때 비록 굴곡이 있을지언정 북한사회가 갈 수 밖에 없는 길은 수령체제의 와해이고, 이 과정에서 친중정권이 들어서서 북한을 개혁개방을 하든 안하든, 급변사태가 나서 무정부 상태로 가든 안 가든 종착점은 하나다. ‘북한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당사자는 궁극적으로 한국뿐이라는 사실이다. 천안함 사태 와중에서도 김정일이 한국정부에 이명박-김정일 회담을 제의했다는 점은, 그 전술적 천박함에도 불구하고, 북한을 크게 도와 줄 수 있는 자는 한국뿐이라는 사실을 말한다.


따라서 김정일 이후 북한당국에게 한국은 통일과정은 이러이러하고, 통일비용은 최대 이정도라는 것을 제시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북한의 엘리트 집단부터 헐벗은 꽃제비에 이르기까지 잃는 것은 변태수령체제이며 얻는 것은 희망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제시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통일세 화두를 정파적 이해와 현실에만 국한된 단견으로 비판하기 보다는, 통일을 이제 한국 사회가 피할 수 없는 아젠다로 간주하여 진지하게 논의해야 한다.


현재 한국사회에는 좌우가 통일된 한반도의 체제에 대하여 상이한 표상을 하고 있을뿐더러, 우파 진영 내부에서도 통일의 완급과 관련하여 서로 다른 의견이 표출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런 통일관의 차이를 무시하거나 어느 일방의 통일관을 교조적으로 신봉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점은 남북의 한국인이 역사상 가장 위험하고 또 중요한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여 최선의 통일방안을 창조해야 할 의무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유비무환(有備無患)이지만, 우리는 최선의 준비를 해야 한다. 여기에 북한문제의 중요성과 심각성을 깊이 이해하는 지식인들이 이제 나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