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은 불변의 가치, 문제될 때마다 언급해야”

(조선일보 2005-12-6))

5일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개막된 ‘문명과 평화’ 국제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바이츠제커 전 독일 대통령을 홍준호 부국장대우가 만났다. 바이츠제커는 베를린 장벽 붕괴를 전후한 10년간 대통령을 지냈다. 다음은 문답 요지.

―한국의 어떤 이슈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는가.

“한국을 처음 방문한 건 40여년 전이다. 당시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이후 유럽의 데탕트 정책과 한국의 햇볕 정책을 비교 연구했다. 가난했던 나라를 이처럼 짧은 시간에 세계 주요 국가로 성장시킨 한국민에 대해 경애심을 갖는다.”

―독일 통일 15주년이다. 동서독민의 완전한 통합으로 가는 데 얼마나 더 시간이 필요한가.

“냉전 종식과 함께 미국과 소련은 독일의 통일에 대해 신속하게 합의했고, 유럽 주변국들도 인정해줬다. 어려움은 국내적으로 더 컸다. 동서독민들은 40여년간 서로 다른 교육 시스템에 의해 교육받았고, 경제적 통합 역시 힘겨운 과정을 거쳐야 했다. 동독 경제는 통일된 이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완전 통합은 한 세대쯤 걸릴 것이다.”

―한국에서는 북한 공산독재정권과 북한 백성을 분리해 북한 백성은 지원하되 공산독재정권에는 단호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북한 정권을 지원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북한 백성을 돕는 길이라는 주장도 있다. ‘자유 민주주의’의 가치를 우선해야 한다는 입장과 ‘같은 민족끼리’를 더 우선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나뉘기도 하는데.

“한국과 독일은 비슷한 게 거의 없다. 동독과 서독은 냉전 기간에도 서로 교신했다. 동독 사람들은 퇴근 후 매일 저녁 서독 TV를 시청해서 서독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또 냉전 종식과 함께 구소련 블록 국가에서는 정권 교체가 당연시되는 분위기였다. 따라서 서독은 한국과는 달리 동독에 대해 정권 교체를 요구할 필요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 간에 대화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남북한 간에 상호 방문할 수 있느냐, 남북한 간 경제 교류가 있느냐 등이 본질적인 문제다. 한국 기업들이 북한에 공장을 설립하고, 남북한 근로자들이 함께 공장에서 근무하는 등 진정한 남북 간 대화가 이뤄지면 불필요한 갈등 없이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정권 교체를 요구하는 정책은 권하고 싶지 않다.”

―얼마 전 유엔이 북한인권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북한 인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접근을 하는 것이 옳다고 보는가.

“북한의 정권 형태에는 서로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유엔 헌장에 명시돼 있는 인권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인권은 전 세계 어디서든 지켜져야 하는 불변의 가치다. 북한 인권 문제는 제기될 때마다 언급해야 한다. 유엔은 인권 보호라는 원칙을 지켜야 하며, 북한 인권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인권 문제도 다 언급해야 한다.”

―서독은 동독의 인권 침해 문제에 어떻게 대처했는가.

“동독은 동독을 탈출하는 사람들이 장벽을 넘는 것을 금지했다. 장벽을 넘는 사람들을 사살했다. 서독은 동독의 인권 침해 사례가 발생할 때마다 아주 강력하게 항의했다.”

―재임 중 나치 독일의 범죄를 반성하고 독일과 독일인의 역사적 책임을 일깨웠다. 일본은 과거에 대한 진심어린 반성을 하지 않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일본에서도 같은 질문을 받는다. 일본은 섬이다. 섬사람들은 이웃이 없다. 아시아 대륙까지 상당한 거리가 있다. 영국과 유럽 대륙 간에도 거리가 있고, 미국 역시 큰 대양에 갇힌 섬이다. 반면 독일은 유럽 대륙의 한 복판에 있다. 이웃이 너무 많다. 역사는 상호 침략으로 점철됐다. 2차대전 종전 직후 이웃과의 좋은 관계는 유럽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었다. 독일은 과거사 앞에 솔직하고 공개적인 방식으로 사죄했다. 우리 모두 세계화의 시대에 살고 있다. 서로 협력할 필요가 있다. 모든 일본 사람, 모든 일본 정치인, 모든 일본 정부 관료들이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방문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희망을 가질 필요가 있다.”

―유럽은 하나의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는 반면, 동북아는 핵무기에 매달리는 북한정권과 중국·일본 간의 갈등을 비롯한 불안정 요인들이 많다. 동북아가 평화와 공동번영으로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는가.

“전 세계적으로 협력이 이뤄져야 한다. 유럽에서는 각국의 규모가 비슷하기 때문에 비교적 손쉬웠다. 아시아에서는 거대한 중국과 세계 2위의 경제 대국 일본이 있다. 한국 역시 세계 11위의 대국이다. 아시아의 작은 나라들을 파트너로 포함시키는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

―독일에서 대연정이 출범했다. 메르켈 정부가 개혁할 부분은 무엇인가.

“현재 독일은 사회 시스템을 개혁 중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력의 경쟁력 제고 방안이다. 노동 개혁은 슈뢰더 전 총리 때부터 시작됐다. 독일은 연방제도 때문에 통치하기가 참 힘든 나라다. 노동 개혁 등 사회적 시스템에 대한 개혁을 이루려면 지방 정부의 도움이 필요하다.”

―냉전이 끝나고 난 뒤, 유럽과 미국의 이해 관계는 더 이상 일치하지 않고 있다. 독일은 유일한 초강대국 미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가. 메르켈 정부하에서 대미(對美) 관계는 회복될 것으로 보는가?

“미국과 독일의 관계는 항상 돈독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정치적으로 생각이 좀 다를 수는 있겠지만 기본적인 파트너십은 안 바뀐다.”

―미국의 단극(單極)체제는 얼마나 지속될 것으로 보는가. 미국에 도전이 되는 또 다른 극은 유럽인가, 중국인가? 인도와 러시아의 잠재력은 어떻게 보는가?

“러시아가 세계적으로 가장 큰 나라다. 비록 재래식이긴 하지만 아직도 막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중국도 눈여겨봐야 한다. 인도는 다양한 문화와 언어, 인종을 갖고 있고 빈부차도 크지만 중앙정부에서부터 지방 정부까지 전국 단위의 선거를 두 달마다 치른다. 서로 다른 점을 충분히 민주적인 선거 방식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증거다. 미국은 세계 최강대국이지만 혼자서 모든 걸 할 수 없다는 걸 안다. 이란이 좋은 본보기다. 이란에 대해서는 미국과 유럽이 분업해 대처하고 있다.”

바이츠제커는…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85) 전 독일 대통령은 독일에서 가장 존경 받는 정치인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괴팅겐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그는 기민당 소속으로 1969년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베를린 시장을 지낸 뒤 1984년부터 10년간 대통령(재선)을 지냈다. 대통령 재임 중 나치의 범죄를 반성하고 독일의 역사적 책임을 강조했다. 특히 1985년 5월 2차 대전 종전 기념 40주년 연설에서 “이날은 연합군의 승전일일 뿐 아니라, 독일 민족이 나치로부터 해방된 날”이라고 말했다.

현재 유엔의 ‘미래를 연구하는 모임’ 공동의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1980년대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 구명운동에 나서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