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8일과 19일 비보(悲報)와 희소식이 함께 전해졌다. 슬픈 소식은 북한인권 개선을 위한 국제사회의 역할을 강조했던 바츨라프 하벨(Vaclav Havel) 전 체코 대통령의 부고(訃告)였고, 기쁜 소식은 북한인권유린의 범죄자 김정일의 사망 뉴스였다.
하지만 하벨 전 대통령의 부고 소식은 김정일이라는 인권유린자의 사망 뉴스에 묻혀 사람들에게 잊혀졌다. 그의 부고는 김정일 사망 뉴스 보도 전날인 18일 전해졌다. 북한인권운동 진영에서도 하벨 전 대통령에 대한 추모 행사를 제대로 준비할 경황이 없었다.
윤현 북한인권시민연합 이사장은 “하벨 전 대통령은 국제적으로 북한인권운동을 공론화 시킨 인물이자, 한국 북한인권 운동가들에게는 매우 고마운 사람”이라고 높이 평가한다.
그는 지난 2002년 9월 북한인권시민연합에서 주최한 프라하 북한인권국제회의를 준비할 당시 하벨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 체코의 NGO인 피플인니드(The People in Need Foundation·PINF)의 토마스 포야르(Tomas Pojar) 사무국장을 통해 처음 만났다고 한다.
‘유렵의 양심’이라고 불리는 하벨 전 대통령은 체코슬로바키아의 마지막 대통령이자 체코의 첫 민선 대통령이다. 국민들의 절대적인 신임과 지지로 3회에 걸쳐 대통령직을 연임했다.
그는 ▲필라델피아 자유메달 ▲간디 평화상 ▲미국 대통령 자유의 메달 ▲쿼드리거상 ▲서울 평화상 등 국제적으로 권위 있는 각종 상을 수상했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적은 없지만 수차례 후보로 오르기도 했다. 특히 1989년 ‘무혈혁명’으로 유명한 ‘벨벳혁명’을 통해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화를 이룩한 것으로 유명하다.
윤현 이사장에 따르면 하벨 전 대통령은 2002년, 윤 이사장과의 첫 만남 이후부터 북한인권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졌다. 그 이후 북한인권과 관련된 국제 행사를 통해 “북한 주민을 위해 희망의 메시지를 계속 전달해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주장해왔다. 북한인권시민연합이 개최하는 국제대회에는 매번 축사를 보내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하벨 전 대통령은 대통령 임기를 마친 후 북한인권 활동에 더욱 적극적이었다. 2004년에는 워싱턴포스트(WP)에 기고한 칼럼을 통해 “EU·미국·한국·일본 등 세계 민주국가들이 북한인권 개선을 위해 노력해야한다. 정치범수용소·재중 탈북자들의 강제 북송 등 북한인권개선문제가 북한정권과의 협상의 주요 아젠다가 돼야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2006년 10월에는 셸 망네 본데비크(Kjell Magne Bondevik) 전 노르웨이 총리, 엘리 위젤(Elie Wiesel) 1986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와 함께 UN 안전보장이사회에 “UN은 북한인권 개선을 위해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라. 북한 인권문제에 대한 안보리의 행동은 1994년 르완다 대학살 같은 비극을 막기 위해 안보리 15개 이사국이 만장일치로 승인한 2005년 결의에 따라 정당성이 보장된다”는 요지의 인권보고서를 제출했다.
2009년에는 다큐영화 ‘요덕 스토리’ 홍보물에 출연, “20년 전 체코는 자유를 출산했다. 이제 당신의 차례”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윤현 이사장은 “하벨 대통령이 내게 건넨 첫 말은 ‘인권문제는 보편적인 가치다. 정치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던데,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였다. 그러면서 북한 인권 실태에 대해 자세히 알려달라고 요청했다”고 하벨 대통령과의 첫 만남을 회고 했다.
윤 이사장은 “하벨 전 대통령은 나와 첫 만남 당시 폐암 수술을 두 차례나 받은 상태라 몸이 온전하지 않았다”면서 “그럼에도 탈북자의 증언과 북한인권실태에 대한 설명을 꼼꼼히 들으며 자신의 의견도 내비쳤다. 그때 이후 하벨 전 대통령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국제사회가 북한인권 개선을 위해 나서야한다고 역설하고 다녔다”고 말했다.
그는 “하벨 전 대통령은 유럽·미국 등 선진국에서 인권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추앙·존경을 받는 사람이다. 김정일의 죽음에 그의 부고소식이 묻히는 것을 보면 한국은 여전히 세계의 변두리라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유럽과 미국은 하벨 서거 행사·추모대회가 열리고 있으며 각종 언론들도 이에 주목하고 있다”면서 “우리나라의 민주화 운동가·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왜 그의 죽음에 대해 한마디 추모의 말조차 하지 않는가”라고 토로했다.
한편 ‘북한인권시민연합’은 오는 6일 4·19 혁명 기념도서관에서 ‘(사)4월회’ ‘주한체코공화국 대사관’과 함께 하벨 전 대통령의 추모식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