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시간은 김정일의 편에서 떠났다

‘김정일 중병설’에서 촉발된 각종 북한 관련 보도들이 계속 봇물을 이룬다. 확인, 비확인 보도가 뒤섞여 있고, 사실과 추측이 혼재돼 있으며, 막연한 ‘희망사항’이 확실한 ‘미래전망’으로 오도되기도 한다.

김정일의 통치행위가 어려울 경우 ‘군부 집단지도체제로 갈 것’이라는 막연한 논리가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고 마치 사실처럼 보도되고 있다.

13일자 중앙일보 4면에 ‘청와대 고위관계자’의 발언이 인용되었다.

『청와대의 고위 관계자는 김 위원장의 건강 이상에 따른 북한의 집단지도체제 도입 가능성에 대해 “북한은 이미 집단적인 지도체제, 이른바 민주집중제 형태로 운영되고 있는 게 아니냐”고 말했다.
그는 특히 “1974년 김일성 주석의 후계자로 지목돼 후계 수업을 받아 왔던 김정일 위원장과 달리 김정일 위원장의 아들인 정남과 정철은 나이가 어린 데다 별다른 정치적 경험과 공적이 없다”며 “김 위원장의 후계 구도는 어떤 형태로든 군부가 관여하는 집단지도체제일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다.』(“김정일 쓰러지고 2~3일 후 정보 입수…지금은 혼자 양치질” 기사)

이 기사에 등장하는 ‘청와대 고위관계자’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그가 진짜로 “북한은 이미 집단적인 지도체제, 이른바 민주집중제 형태로 운영되고 있는 게 아니냐” “김 위원장의 후계 구도는 어떤 형태로든 군부가 관여하는 집단지도체제일 가능성이 높다”고 발언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건 정말 큰일이다. 노무현 청와대의 3류 얼치기들의 말을 그대로 녹음해서 다시 틀어놓은 것 같다. 평범한 국민도 아니고, 항공기에 비유하면 대한민국 주조종실인 청와대에서, 그것도 ‘고위관계자’가 이런 판단을 하고 있다면 그는 더이상 청와대에 있어서는 곤란하다.

지금 대한민국은 외교안보 분야에서 매우 중요한 한 시기를 통과하려 하고 있다. 앞으로 불과 10년 후에 지금의 이 시기를 되돌아 본다면, 현재의 대한민국이 외교안보 분야에서 얼마나 중요한 시기였던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이처럼 중요한 시기에 청와대에서 잘못된 판단을 하는 고위 관계자가 있다면 우리나라가 앞으로 어디로 갈지 매우 불안해진다.

볼셰비키 혁명 시기 레닌의 당조직 이론에서 나온 집단지도체제, 민주집중제는 북한 현대사 60년동안 한번도 실시된 적이 없다. 소련공산당 제20차 당대회(1956년 2월)에서 스탈린의 개인숭배가 비판되면서 재등장한 ‘집단지도체제론’은 1956년 8월 조선노동당 전원회의에서 연안파, 소련파의 박창옥, 최창익 등이 당시 김일성의 독재를 비판하면서 들고 나온 것이다. 이들은 당 기관 등에서 ‘집체적 지도체제’를 요구했다. 이것이 북한 현대사에서 그 유명한 ‘8월 종파사건’의 촉발제가 되었고, 여기에 걸린 사람들은 죄다 해외로 도망가거나 깡그리 숙청을 당했다. 조금이라도 연루된 사람들은 전 가족이 죽거나 통제구역으로 들어간 초대형 숙청사건이었다.

더욱이 김정일이 1964년 당 사업을 시작한 이후에 터진 ‘갑산파’ 사건도 김일성 1인체제에 도전한 종파사건이었다. 김정일은 이 갑산파 사건 처리과정에 참여했다. 이후 북한에서 ‘집단지도체제’니, ‘민주집중제’니 하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김정일은 ‘김일성유일사상체계’를 세운 장본인이다. 또 김정일이 ‘종파’를 근원적으로 없애버리기 위해 고안해낸 것이 바로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이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집단지도체제나 민주집중제가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으려면 당 대회, 전원회의가 있어야 하고 그나마 최후의 보루로서 정치국 회의라도 있어야 한다. 지금 중국이 하고 있는 시스템이 ‘민주집중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김정일 체제는 중국 체제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고 도무지 비교하기도 어렵다. 지금까지 북한정권이 바뀌지 않은 근본이유가 다른 ‘종파’가 형성되는 것을 철저히 사전에 차단했기 때문이다.

‘집단지도체제’라는 말 자체가 ‘지도자’ 1인 외에 다른 정치적 종파가 생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정일은 ‘종파’라는 말 자체를 극도로 싫어한다. 농담을 섞어 말한다면, 만약 지금 김정일이 거의 죽어가는 상황이라고 가정하고 누군가 김정일의 귀에 “지도자 동지, 우리도 집단지도체제 한번 해볼까요?”라고 말한다면 아마도 다 죽어가던 김정일이 벌떡 일어날 것이다.

그런데, 명색이 청와대 고위 관계자라는 사람이 “북한은 이미 집단적인 지도체제, 이른바 민주집중제 형태로 운영되고 있는 게 아니냐”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는 게 도대체 말이나 되는가?

필자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차라리 그 보도가 ‘오보’(誤報)이기를 바란다. 그런 수준의 사람이 청와대 고위관계자로 있으면 국민들이 불안해 할 것은 불문가지다. 아니면, 차라리 그 고위 관계자가 어느 돌팔이 전문가로부터 한마디 주워들은 것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기자 앞에서 좀 ‘아는 체’ 하려고 무심코 한 말이었으면 좋겠다. 북한은 집단지도체제라는 것이 도저히 가능하지 않는 사회다.

물론 ‘8월 중순 경 김정일이 뇌졸중으로 쓰러졌다’는 국정원장의 국회 보고가 사실일 가능성이 높은데, 그렇다면 북한의 주요 기관은 그 이후 한 달 가까이 어떻게 움직여 왔는지 궁금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혹시 ‘집단으로 의사를 결정하는 협의체 비슷한 게 작동하는 게 아니냐’는 의문을 가질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평소에 김정일이 지시해놓은 대로 해왔다고 봐야 옳다. 김정일이 쓰러졌다면 그의 신체를 관리하는 의사들이 모여들어 응급처치에 들어갔을 것이고, 김정일이 평소에 지시해놓은대로 정확한 진단과 치료를 위해 중국 등 외국 전문의들이 불려들어 갔을 것이다.

그리고 김정일 경호를 맡은 호위국에서 다른 사람의 접근을 철저히 차단했을 것이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을 것이다. 김정일은 92년 경 말을 타다 떨어져 몇 달간 중앙당 비서들도 만나지 않은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당, 군, 국가기관들은 평소에 하던 대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번에도 크게 다를 바 없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월 중순 이후에 발생한 북한의 영변 핵시설 복구 움직임 같은 중요한 행위는 의문이 들 수 있다. 필자는 그것도 이미 만들어놓은 로드맵에 따라 움직인 것으로 본다. ‘미국이 우리를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해주지 않으면 핵시설을 복구하면서 미국을 압박하자’는 김정일과 주요 관련 기관이 만들어놓은 지침에 따른 것으로 본다.

그런데도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가 “북한 군부가 김정일 공백의 틈을 타서 권력투쟁 했을 가능성”을 보도한 배경에는 ‘김정일은 핵을 포기할 수도 있을 것’ 이라는 막연한 희망사항이 섞여 있었기 때문에 그들 눈에는 ‘이해하지 못할 북한의 행동’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권력투쟁 가능성’ 같은 ‘소설’이 나올 수 있다.

북한 군대가 김정일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했는데, 김정일이 모르고 넘어가면 모를까 나중에라도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들은 십중팔구 ‘줄초상’이다. 또 김정일이 관리하는 주요 장령급(장성) 군인들은 줄초상이 날 것을 스스로 잘 알기 때문에 김정일의 뜻에 반하는 짓을 하겠다는 생각 자체를 하기 어렵다. ‘군인들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선험적 인식은 북한식 사고방식이 아니라 ‘남조선식’ 내지 서방식 사고방식이다.

어떤 사람들은 김정일이 병상에 있을 때, 또는 김정일 유고(有故)시에 ‘국방위원회’가 집단지도체제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북한이 선군정치를 하고 있고, 국방위원회가 국가 지도기관이니까 그런 주장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주장도 거의 ‘소설’로 보아야 할 것이다. 어떠한 경우라도 김정일이 의식이 있고 지시가 하달될 수 있을 때는 ‘집단지도체제’라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국방위원회는 국가기관(내각)과 최고인민회의(의회)를 지도하는 기관이다. 그래서 김정일이 ‘국방위원장’ 자격으로 국가간 정상회담에 나서는 것이다. 또 국방위원회에 당, 군의 주요인사들이 모여 있으니까 집단지도체제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국방위원회는 국가기관과 의회의 지도기관일뿐 노동당처럼 조직체계를 갖춘 기관이 아니다. 말하자면 ‘머리’만 있고 몸통과 팔다리가 없다. 따라서 국방위원회가 집단지도체제의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은 ‘나는 아직도 북한을 잘 모른다’는 말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북한 체제를 움직이는 곳은 아무리 다 떨어진 조선노동당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이며, 그중에서 비서국이며, 그중에서도 ‘조직지도부’다. 김정일은 총비서-조직비서-조직지도부장이다. 만약 지금 김정일의 차남 김정철이 조직지도부에 상근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적어도 지금 이 순간 김정일이 생각하는 후계자는 ‘김정철’이라고 판단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에는 ‘김정일이 양치질 할 수 있다더라’는 보도에서부터, 앞으로 발생할지 않을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추측 보도까지 실리고 있다.

‘김정일 유고와 북 급변사태’는 정규 어젠다가 되었다

자, 그렇다면 최근의 ‘김정일 사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현재 우리 앞에 놓인 핵심 사실관계는 두 가지다. 첫째 ‘9월 9일 북한정권 수립 60주년 행사에 김정일이 불참했다’는 확인된 사실관계(confirmed fact)가 있고, 둘째, 김정일의 불참한 이유가 건강이상 때문이며 “김정일이 뇌출혈로 수술을 받았고 현재 회복중에 있다”는 국가정보원장의 국회 보고가 있다.

첫번째는 조선중앙TV 화면을 통해 확인이 되었고, 김성호 국정원장의 보고 내용도 비록 물증(hard evidence)을 제시하진 못했지만, 여러 정보와 정황을 감안하면 상당한 신뢰도를 갖는다. 그 뒤를 이은 각종 분석이나 해설, 주장, 미래전망 등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어쨌든 실체가 없으며, 앞으로 ‘두고 보아야 할 문제들’이다.

하지만, 이번에 확인된 김정일의 건강이상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간단히 말하면 북한문제에 관해 ‘국면’이 바뀌게 된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4막5장 연극에 비유하면, ‘김정일이 정권수립 60주년 행사에 불참했으며, 건강이상이 확인되었다’는 이 한 문장 때문에 북한문제는 제3막이 끝나고, 제4막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지금까지 김정일의 건강문제는 주로 ‘설’(說)이 많았다. 설사 건강에 이상이 있다해도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문’에 그쳤다. 하지만 ‘소문 상황’과 ‘사실 상황’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비유하자면, 자신이 암(癌)에 걸렸지만 그 사실을 모르고 생활할 때와, 전문의에 의해 암으로 진단되어 객관적 사실로 확인된 이후에는, 그 사람의 인생관, 살아가는 목표, 생활방식이 다 달라지는 것이다. 김정일의 건강이상에 따른 ‘북한문제’도 이와 비슷한 공통성이 있다. 어째서 그런가?

보통 ‘북한문제’라고 할 때 1)핵문제 2)개혁개방 문제 3)식량문제 4)인권문제 5)한반도(동북아)평화체제 문제 6)평화통일 문제가 주요 어젠다(agenda)이다.

지금까지 이들 항목에서 ‘김정일의 유고와 北 급변사태’는 정규 어젠다가 아니라 비정규 어젠더, 즉 ‘상수(常數)’가 아닌 ‘변수(變數)’로 평가돼 왔다. 다시 말해, 김정일의 유고는 ‘장차 어느 시기에 찾아올지도 모를’ 불투명 어젠더였으나, 이제부터는 ‘앞으로 반드시 다뤄야 하는’ 어젠더로 되어버린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한국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북한 주변국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특히 한국은 지난 10년간 김정일의 유고나 북 급변사태를 언급하면 ‘남북관계를 경색시킨다’ ‘북한을 자극한다’는 등의 해괴망칙한 논리가 횡행하였고, 이런 가운데 ‘북 급변사태를 언급하는 사람들은 전문가가 아니며 극우보수’라는, 참으로 웃기지도 않는 돌팔이들의 주장 때문에 완전히 헝크러진 대북정책을 기초공사부터 새로 해야 하는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또 주로 북한의 핵문제 해결에 집착해온 미국이나, 탈북자 문제와 핵문제가 주요 사안이었던 중국, 핵과 납치자가 중요했던 일본도 지금부터는 ‘김정일 유고와 북한 급변사태’에 더욱 구체적으로 대비해야 하게 되었다. 이들 국가에서도 김정일의 유고가 ‘잠복성 문제’가 아나라 ‘현안’으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그러면, ‘김정일 유고와 북 급변사태’가 정규 어젠다로 되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예컨대 한국정부는 북 급변사태에 관한 검증과 대비책 마련에 들어가야 한다. 청와대, 총리실, 국방부(한미연합사), 국정원, 외교부 등이 관련 업무를 시작해야 한다.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무회의,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점검 아젠다가 된다.

이러한 상황은 다른 분야에 여파를 미친다. 대북정책의 우선순위에 변화가 생기며 급하지 않은 경협문제, 남북교류 분야 등은 때로는 우선 순위에서 밀려나고, 김정일의 건강이상의 정도, 북한 내부 동향 관찰과 분석 분야에 업무가 더 늘어나게 된다. 좀더 시간이 지나면 이같은 변화는 궁극적으로 남북간 통일방식의 문제 등 북한문제를 둘러싼 모든 분야에서 근본적이고 전면적인 점검을 추동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사회적으로도 이와 관련한 관심과 논의도 늘어나게 될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주변국은 ‘한반도 문제’ ‘동북아시아 안보환경 문제’에 대한 정책에 변화가 일어난다. 아울러 한 미 중 일 러 등은 국제협력 분야에서 ‘북 급변사태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라는 중차대한 국제 아젠다가 떠오르게 되면서, 한 미 중 일 러 간의 수면 위, 수면 아래의 관계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지금 바로 우리 눈 앞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런 점에서 연극으로 치면 막(幕)이 바뀐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크게 막(幕)이 바뀌는 곳은 역시 북한 내부일 것이다.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아무리 김정일의 건강에 ‘문제는 없다’고 해도 정권수립 60주년에 김정일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심각한 건강이상’ 외에 다른 설명 방식을 찾기 어렵다.

북한 내부에서는 ‘지도자 동지’의 건강이 실제로 나쁘다 해도, 그 사실이 외부 언론에 보도되는 등 객관화되어 공개될 때와 공개되지 않을 때는 큰 차이를 갖는다. 전체주의 수령독재 사회에서 수령(=‘장군님’이 대리)의 공백은 곧 ‘국가의 공백’을 의미한다.

만약 지금 김정일이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장기간 병상에 누워있을 수밖에 없는 처지라면, 병상에서 자신의 지시를 받아 내려먹일 ‘말 심부름꾼’을 누구로 할 것이며, 혹시 그 심부름꾼을 못믿는다면 그를 감시, 견제할 사람을 누구로 할 것이며, 그 심부름꾼을 어느 기간 정도 사용하고 언제쯤 갈아치우는 것이 좋을지도 생각할 것이다.

누가 될지 알 수 없지만 만약 그 ‘말 심부름꾼’이 행여 ‘권력을 대리 행사하는 듯한’ 태도를 보일 경우 그 역시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그런 점을 아주 잘 아는 사람이 ‘말 심부름꾼’이 될 것이고, 김정일 역시 자신의 권력을 대체하기 어려운 사람을 ‘말 심부름꾼’으로 쓰려할 것이다. 따라서 김정일이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상황이라면 당분간 북한 내부에 큰 변동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은 30년 이상 독재체계를 계속 강화해왔기 때문에 이 방면에는 도가 튼 사람이다. 어느 길목을 잡고 있으면 독재체계에 누수가 생기지 않을지도 잘 알고 있다. 또 당, 군 엘리트들에 대한 감시와 통제와 상(賞)과 벌(罰)을 더 현격하게 강화하는 방법이 있다. 아무래도 ‘벌’이 더 심해질 것이다. 그런 가운데 김정일은 극비리에 가족, 친인척, 최측근들을 중심으로 후계자를 결정하는 과정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이 기간이 상당히 길어질 경우에도 김정일 체제가 과연 ‘불안 속의 안정’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안정된 후계체제로 들어가지 못하고 김정일이 계속 또는 간헐적으로 병상에 누워 있어야 하는 경우다.

북한 현대사를 아주 널찍하게 나누면 ‘90년대 식량난 이전의 북한’과 ‘식량난 이후의 북한’으로 나눌 수 있다. 좀 무식한 분류법이지만 정치사상의 변화- 먹고사는 방식의 변화(배급 축소/시장 확대)-권력구조 변화(先軍)-전 사회적인 가난, 부정부패-인민들의 생활방식 변화-사고방식 변화-북한정권의 불리한 대외관계 등등을 감안하면 일리가 없는 것이 아니다.

90년대 이후의 북한은 특히 외부 정보(중국, 한국)가 많이 유입되었고, 외부에 대한 주민들의 관심이 늘어났다. 그리고 당에서 해결해주는 생활에서 각자 알아서 먹고 살아야 하는 생활로 바뀐 것이다. 90년대 이전과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다. 먹고사는 방식도 외부(중국)와의 접촉을 통한 방식이 더 늘어났다.

앞으로 김정일의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소문이 북한 내부에서 퍼져나가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휴대폰 때문에 북한 내부로 뉴스가 알려지는 속도도 매우 빠르다. 지금은 북한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오랫동안 숨기기 어렵다. 김정일의 건강 이상이 권력 내부는 물론 일반 주민들도 알게 되면 현 체제의 변화를 더 원하게 될 것이다.

또 김정일을 핵(core)으로 해서 바깥 동심원을 형성하는 가족-친인척-측근-당, 군, 내각 주요인사-기본계층이라는 구조 내부에 균열과 갈등, 중대한 변화가 올 수 있다. 그러나 급작스런 변화보다는 천천히 누적적으로 변화가 진행될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김정일은 핵포기-개방과 같은 획기적인 결단을 내리기는 더 어려워질 것이며 ‘자기 방어’에 집착하게 될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물론 ‘집단지도체제’는 예상하기 어렵다.

그리고 매우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이제부터 ‘시간은 더이상 김정일의 편이 아니다’는 사실이다. 이 움직일 수 없는 ‘물리적 진리’가 김정일을 거꾸러뜨릴 것이다. 지금까지 시간은 늘 ‘종신직 수령’인 김정일의 편이었다. 임기가 있는 한국, 미국 정부는 한없이 늘어지는 김정일의 지공전술 앞에 무력했다.

그러나 이제부터 김정일이 시간에 쫓기기 시작할 것이다. 공수(攻守)가 바뀌는 것이다. 사실 오래 전부터 공수를 바꿀 수 있었던 남북관계는 앞으로 확실히 ‘갑’과 ‘을’의 위치가 바뀔 것이다. 아마도 이런 것을 ‘운’(運)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앞으로 우리정부가 해야 할 일은 ‘북한의 미래’ ‘한반도의 미래’ ‘동북아의 미래’를 둘러싼 한국-미국-중국과의 협력관계를 어떻게 구축해 나갈 것이냐 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 분야에서 매우 현실적이고 스마트한 해결방안을 찾아내야 한다.

이제, 전문가들의 숙제는 더욱 분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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