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금강산은 남한 땅이로구나”

▲ 금강산 중턱에 故 정몽헌 회장을 기리는 추모비석이 있다

필자가 처음 금강산을 가본 것은 1989년 5월 어느 날.

평양을 방문하니 농사철(농번기)이라 업무를 볼 수 없었다. (농사에 동원되어)며칠을 그냥 평양에서 무모하게 보낼 수 없으니 안내원이 금강산 관광을 가자 하기에 이것저것 준비해 일행 4명이 평양을 출발했다.

원산여관에 들러 점심을 먹고 잠시 휴식한 후 금강산으로 곧장 달렸다. 중간 휴식처에 들렀는데, 우리나라 금강휴게소와 흡사한 곳이었다. 자그마한 강물 형 호수와 작지만 주변 산세가 아름답다. 자연산 꿀 벌통에는 벌들이 부지런을 떨며 드나든다.

가게에는 담배며 과자류며 음료수가 있고, 가게 주인격인 지배인이 특별히 지하로 안내하여 대형 장독뚜껑을 열어 보라고 한다. 기절할 뻔했다. 큰 뱀들이 얽히고설킨 채 술에 취해(?) 잠들고 있다. 뱀으로 담근 보약(?)을 구경하고 나니 소름끼쳐 오히려 기분이 나빴다. 서둘러 휴게소를 떠났다. 일행(운전수, 안내원 2명)은 소주잔 크기에 한잔씩 마시곤 ‘오늘 저녁 힘쓸 데가 없는데 어카나(어떡하나)?’라며 말을 주고받았다. 1잔에 1달러씩 받고 판다.

5월의 금강산은 맑은 공기, 맑은 물, 자연 그대로를 가슴 깊숙이 넣을 수 있었다.

금강산 관광지구, 우리 땅으로 변해가는 것 느껴

이렇게 금강산을 다닌 것이 몇 년 사이에 다섯 번이다.

처음에는 지금의 금강산 호텔이 금강산 여관이었고, 여관 현관 앞마당에 검은 곰 2마리를 키웠었다. 언젠가 갔더니 먹이 주는 아이의 팔을 당기는 사고를 쳐서 없앴다는 말을 들었다.

동해에서 배편으로 금강산을 갈 때 처음엔 외국인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몇 개월 후에 허가가 나서 호화선박을 타고 밤을 새워 북한의 고성항(장전항)에 도착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언제 활발한 관광이 이뤄지나 했는데, 벌써 세월이 흘러 온갖 기쁨과 슬픔이 뒤범벅되기가 몇 년이다.

2005년 12월. 이번에 통일부 파주지구 통일교육위원의 신분으로 육로를 이용하여 버스를 타고 가 보는 금강산은 호기심뿐이지 감동스럽진 않았다. 중요한 사실은 이 금강산 관광특구가 행정상 북한 땅이지 느낌은 전혀 북한 땅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남한화 되어었다는 것이다.

금강산 산행만 하고 먹고, 자고, 떠들고… 상점에서 별 특이한 것도 살 것도 없는데 북한측 일꾼들은 오며 가며 슬금슬금 눈짓으로 인사한다.

필자는 그저 북한사람에게 말을 건네 보는 것으로 순간의 짜릿(?)한 느낌과 북한땅 금강산에 와 봤다는 기분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예사롭게 넘길 관광객들이야 담담한 금강산 여행이겠지만, 나의 눈에는 “아- 여기가 바로 한국 땅이구나! 우리 땅으로 변해 가고 있구나! 아니 이미 변했구나!” 하는 느낌이 왔다.

주차장 안내판 기둥에 매달린 작지만 고성능 스피커에서는 최신 힙합이 크게 울려나오고, 차는 온통 현대와 기아차다. 북한을 상징 선전하는 광고물은 거의 없고 있는 것도 눈길을 끌지 못한다. 온정각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모두가 ‘현대’의 일꾼들과 약간의 조선족 동포들과 북한 일꾼만 있을 뿐. 전체적인 인상은 한국 땅이었다(이렇게 살금살금 먹어 들어간다면, 또 개성도 이렇게 먹어 들어간다면 서두를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남측의 출국수속과 북측의 입국수속을 마치고 온정각으로 가는 동안 버스 안내원도 우리의 아들딸들이 아주 자유롭게 편안한 내용으로 웃겨가며 내용도 좋고 듣기 쉽고 능숙했다. 과거 북한 안내원들보다 훨씬 부드럽게 우리 객을 맞이했다.

금강산 고(故) 정몽헌 회장 유품묘

옛날엔 북한측 안내원을 ‘강사’라고 하여 이들의 시간계획대로 무조건 가기 싫은 코스도 따라 움직였지만, 지금은 가기 싫은 곳은 안 가도 되고, 그 시간에 호텔에서 잠을 자도 된다. 상점이고 온천장이고 자유롭게 드나들다가 목적지로 가는 셔틀버스만 타면 된다.

금강산에 가면 슬픈 사연의 비석과 그 옆에 나지막하게 조용히 자리잡은 묘가 있다. 아버지의 뒤를 따라 금강산에 혼을 바쳐 활발한 사업을 하다가 정치꾼들에게 이용당하고 억울한 누명까지 뒤집어쓴 채, 고민하다 세상을 떠난 고 정몽헌 회장의 마음을 기리는 비석이 있다.

이 비석을 볼 때 그저 참 안 됐다는 마음뿐이었는데, 그 바로 옆에 조용히 자리한 ‘유품 묘’를 보는 순간 슬픈 마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의 부인 현회장과 자녀들의 슬픈 마음은 어느 누구도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이유 불문하고 우리는 고인과 그의 가족들에게 진심으로 위로의 마음을 오래토록 아끼지 말고 보내야 할 것이다.

금강산관광을 위한 시설들은 나라가 직접 시행해도 불가능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역시 현대는 정주영 영감님이 아니면 할 수 없다는 증거가 눈에 보인다. 현대는 세계적인 실력으로 다듬어져 있는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현대’다.

도착한 날 저녁식사는 자유롭게 해결하기로 하고 필자는 식당 동관으로 갔다. 서관은 뷔페식이라는데 시간이 좀 늦었다. 메뉴를 보니 한국식단 그대로다. 국밥류를 주문했다. 식사종류는 10달러로 거의 평균화 되어있다. 10달러를 주고 영수증을 가져왔는데, 바로 아래에 11,000원이라고 표시돼 있다. 국밥을 보니 좀 부실한 듯하여 밥을 한 그릇 더 주문했더니 추가로 요구한 공기밥은 돈을 안 받는다고 한다. ‘공기 밥’이라는 표현만 봐도 여기가 바로 남한이다.

금강산 관광, 한국돈 사용할 수 있어

버스에서 관광 중 필요한 모든 안내는 다 해줬다. 달러를 사용하지만 만일 달러가 없으면 한국 돈을 카드에 입력해 사용할 수 있다고 안내해줬다. 그러나 직접 한국 돈을 사용할 수 있다는 안내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 원화를 어디서든지 직접 사용할 수 있게 내부적으로는 양해되어 있었다.

상점 점원도 현대측 사원과 북측일꾼이 나란히 함께 근무하고 있다. 하루 매상의 계산도 나란히 앉아 하고 있었다. 참 보기가 좋았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교섭과 노력, 또 속상하는 과정을 겪으면서 이뤄졌는지 나는 알 수 있었다.

우리 관광객들도 이런 애로 사항을 알고, 정부는 싫어해도 대한민국은 싫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과거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의 관광을 자유로운 관광으로 바꾸기까지의 현대의 노력도 칭찬을 아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는 이번에 금강산관광을 통일부 지원금으로 갔다. 우리의 세금으로 관광까지 시켜주면서 북에 인심을 꼭 써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해서 처음에는 거부했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통일부 통일교육위원이 된 지 해를 넘길 때까지 진정한 통일교육에 대한 교육을 어디 가서 시켜 본 일도 없어서 남북경협 자금인 세금으로 관광을 한다는 것도 양심상 내키지 않았다.

전국의 학생들과 교사들까지도 다들 그렇게 가는데 부담가질 필요 없이 가자는 주변 통일위원들의 권유에 가기로 결심했지만 금강산 도착까지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동명이인? 김찬구가 두 명인 이유

게다가 지난해 대북사업 16년의 실화를 실명으로 엮은 책 “아, 평양아–”(비봉출판사)를 출판하면서 북한과의 인연을 끊다시피 하고 살고 있었다. 주변에서 ‘당신은 이제 북한에는 다 갔다!’ 라고 걱정을 해주기도 하고, 심지어 어떤 기관에서는 당분간 밤길 조심하는 게 좋겠다는 걱정스러운 충고까지 해 주는 판이다.

한국측 출국장에서 문제가 생겼다. 안내원이 ‘김찬구’를 찾는다. 나는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수속을 돕는 안내원을 만났더니 또 다른 김찬구를 찾는다는 거다. 내 이름이 흔하질 않아 ‘다른 또 한사람의 김찬구는 없다.’고 했다. 그래도 꼭 동명이인이라고 우기면서 계속 찾는다. 있을 리가 없다. 계속 이름을 부른다. 동료들은 ‘이제는 잡혔다’고 놀린다.

또 하나의 김찬구 서류를 보니 아니나 다를까, 또 하나 ‘김찬구’가 있다. 알고보니 나의 옛날사진(통일부 통일교육위원 서류에 붙은 사진)으로 한번 더 수속이 되어 있는 것이다. 동일인물이 두 사람으로 신청된 것이다. ‘현대’는 현대대로, 통일부도 나름대로 사진을 현대에 제공하다보니 졸지에 두 사람이 되고 만 것이다. 나는 서류를 비교해 주면서 한 사람을 취소했다.

돈이 사상 무너뜨려

나는 안내에게 부탁하여 통일교육위원들과 같은 호텔에 머물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호텔 지배인이 시간이 늦었으니 저녁식사부터 하고 오라고 하면서 어떻게든 연구해보겠다고 한다. 식사 후 돌아오니 마침 호텔 총지배인이 휴가 중이라 부 총지배인(이형균 차장)이 자기숙소를 내주어 별관에서 아주 편히 쉬게 되었다. 박순복 지배인에게도 감사하는 마음을 여기에 남긴다.

산행 중 산길에서 판매하는 작은 매점에 일하는 사람만 북한측 일꾼이고 그 외엔 전부 북한측과 현대가 동등하게 함께 일하는 모습에서 하나의 민족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롭게 놀라운 사실은 산행 중에 팔고 있는 고사리며, 복분자며, 버섯종류며, 사탕이며, 간솔로 만든 술잔이며 달러가 없다고 하면 “남조선 돈도 받습니다. 사십시오. 아래 상점에서 파는 물건은 남조선에서 가지고 온 겁니다. 여기는 전부가 조선에서 생산되는 진짭니다”라며 거리낌 없이 말 하는 그들의 얼굴에서 물건을 많이 팔아야 한다는 의욕을 쉽게 읽을 수가 있었다. 돈! 이것이야말로 사상을 무너뜨리게 할 수 있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런 이유 없이 그들이 처량해 보이고 불상해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우리네들도 겨우겨우 안정돼 가던 나라가 새로운 정부는 민주주의 기둥을 뽑아버리고, 천방지축 정신없이 한풀이로 나라를 다스릴 때 북한은 더욱 더 힘찬 단결로 우리의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

그들은 동족이라는 미명 아래 우리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고, 무엇이 조국을 위하고 애국하는 것인지도 모르는 채 ‘우리는 하나다’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온 ‘비생산적’ 국민의 일부가 난동을 부린다. 넋나간 정치꾼들은 동조의 박수를 끊임없이 쳐대고 있다. 이건, 나라를 그냥 넘기고 싶은 것인지…

청와대가 민주주의 기둥 역할 제대로 못해

대한민국 1번지(청와대)에서 재계약 불가의 ‘5년 외상전세’로 사는 사람이, 해야 할 민주주의 기둥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뒤죽박죽 세상을 어지럽히고 머리 아프게 살고 있다. 남한 사람들을 보면 앞날이 캄캄한 것도 모자라 지구 밖으로 떠나고 싶다. 그런데도 유독 북한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안타까운 건 무슨 연유일까?

청와대의 지붕을 행여 ‘홍와대'(紅瓦臺)의 지붕으로 바꿀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상상하고 싶지도 않고, 무섭기까지 하다. 동족이면서도, 형제의 나라이면서도 서로 으르렁거리고 적대시 하며 살아야만 하는 관계 때문일까?

참으로 부끄러운 민족이고 자존심 상하게 하는 현실의 ‘조선반도’다. 그래도 애국하는 선량한 국민의 수가 많기에 희망을 가지고 기대해보고 싶다.

이번 금강산관광은 정부에 참으로 고마움을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서도, 북한에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우리국민들이 현장 경험을 하면서 나와 똑같은 감동적인 애국적 느낌을 가져주기를 바라고 싶다.

김찬구 /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연구위원

<필자약력> -경남 진주사범학교 졸업 -국립 부산수산대학교 졸업, -LA 동국로얄 한의과대학졸업, 미국침구한의사, 중국 국제침구의사. 원양어선 선장 -1976년 미국 이민, 재미교포 선장 1호 -(주) 엘칸토 북한담당 고문 -평양 순평완구회사 회장-평양 광명성 농산물식품회사 회장 -(사) 민간남북경협교류협의회 정책분과위원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경남대 북한대학원 졸업-북한학 석사. -세계화랑검도 총연맹 상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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