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순 군관학교 추방 사건… “수령 한마디에 산골로 쫓겨나”

[북한 비화①] 김일성 교시-김정일 유훈 집착으로 하루아침에 가정 풍비박산났다

예전에 국방대학이 있던 자리(붉은 선, 자강도 강계시 석현동)에 2000년대 초반 이제순 군관학교(노란 선)와 강계공대(녹색 선)가 이전해 왔다고 한다. /사진=구글 어스 캡처

2000년대 초반 이제순 군관학교 가족들은 하루아침에 ‘혁명의 수도’ 평양 시민이었다가 두메산골 ‘자강도’로 추방 아닌 추방을 당해야 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다름 아닌 김일성의 지시 때문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여기서 이제순은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시기 국경 연선에서 국내 공작을 보장했던 책임자였다고 북한 당국은 주장한다. 1937년 ‘혜산 사건’ 당시 고문으로 사망했는데 김일성은 그의 업적을 기린다는 명문으로 국경경비사령부 군관학교에 그의 이름을 붙이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소식통에 따르면, 이후 탄탄대로를 밟던 이 대학은 1990년 하달된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돌연 쇠락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와 관련, 김일성은 당시 ‘국방과학 분야의 최고 수재들을 육성하는 국방대학(현 김정은국방종합대학)이 수도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아쉽다’ ‘곁에 두고 싶다’는 교시를 하달했다고 한다.

지시는 즉시 집행됐다. 1990년 가을부터 현재 부지인 평양시 용성구역 중이동에서 건설이 시작된 것이다. 이 작업엔 국방과학원 연구소 연구사, 종업원은 물론 군수공업부 산하 제2경제위원회 군수공장 노동자, 현장기사들로 이뤄진 돌격대들이 동원됐다.

물론 국방대학 재학생들도 당연히 빠지지 않았다. 완공(2000년)될 때까지 약 10년 동안 건설 현장에 나가지 않은 학생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이처럼 ‘자력갱생’의 방식으로 국방대학도 건설됐고, 이 과정에서 당국은 학생들의 수업권을 침해했던 셈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가 남아 있었다. 바로 ‘국방대학 본 부지(자강도 강계시 석현동)에 어느 단위를 보낼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다. 즉 자강도 산골로 누가 추방될 것인가가 관심사로 부상했다.

당국은 은밀히 의견을 모았고, 최종적으로 평양시 용성구역 림원동에 있던 ‘이제순 군관학교’가 최종 낙점됐다. 이 대학이 국경 경비 군관 양성기지인 만큼 연선 지역으로 가야 되지 않겠냐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당국은 당연히 이주 명령 전 이 사실을 비밀에 부쳤다. 평양시에 살고 있던 관련 군관 및 가족들의 반발이 뻔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배급은 똑같이 준다고 하더라도 하루아침에 산골 자강도로 내려간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뒷감당은 누가 하나’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드디어 명령이 떨어지던 날, 학교 교직원들과 가족들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이혼한다’는 이야기도 나왔고, 심지어 ‘이대로 죽겠다’는 사람들까지 있었다고 한다. 당시 평양 시민들 속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돌았다. ‘캄파주사병에 들어가 살지언정 평양은 못 떠난다.’ 그만큼 지방행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국방대학 가족들은 자강도 지방민에서 혁명의 수도 평양 시민으로, 이제순 군관학교 가족들은 이와 정반대의 처지에 놓이게 됐다. 이는 급작스러운 김일성의 지시와 그 유훈(遺訓)을 받들겠다는 아들 김정일의 집착의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즉 ‘국방대학을 평양으로 올리라’는 김일성의 교시 한마디에 이제순 군관학교의 많은 가정은 풍비박산이 났고, 아직까지도 ‘강제 추방당한 그때를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는 한탄의 목소리가 높다고 소식통은 지적하고 있다.

한편 원래 국방대학의 부지는 이제순 군관학교 혼자 쓰기에는 넓었다. 때문에 30% 가량은 현재 강계공대가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평양시 용성구역 중이동에 현재 김정은 국방종합대학(1990~2000년 공사 진행)이 들어서 있다. /사진=구글 어스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