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 죽을거면 적진에서 죽자는 심정이었다”






▲6.25전쟁용사 김화서 씨
6.25 무용담을 들려주고 있다. ⓒ데일리NK


1950년 6.25전쟁 당시. 턱없이 부족했던 병력탓에 사람만 있으면 다 끌어가던 시절, 당시 26살의 청년 김화서(86세)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김 씨는 6.25전쟁의 공로로 금성화랑무공훈장을 받은 용사(勇士)다.


50년 7월 초 1주일동안의 교육기간이 끝나자 그는 1사단 15연대 2대대 2중대 1소대 1분대소속으로 경상북도 경산에 배치 받았다.


당시 인민군은 한 달여 만에 가산과 대구 외각의 팔공산 부근까지 진격한 상황이었다. 대구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 인민군은 맹공격을 펼치고 있었다.


팔공산이 무너지면 대구, 부산까지도 위험한 상황이었다. 지원된 6,500여명의 국군병력이 필사적으로 팔공산지구를 사수하고 있었다.


매일 억수같이 쏟아지던 장대비도 방어에 걸림돌이었다. 김 씨는 매일 같이 오는 비에 총에 녹이 쓸어서 자동발사가 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한 번 발포하고 나면 총을 발로 차고 손으로 당겨야 겨우 장전됐다.”


인민군은 밤에 주로 공격했다. 매일 밤 박격포가 비와 함께 쏟아졌다. 순간순간이 죽을 고비였다. 박격포에 맞은 전우는 뼈가 가루가 돼서 날아갔고 멀리서 박격포를 맞은 전우는 반송장이 되었다. “포탄이 떨어질 때는 온몸의 털이 솟을 정도로 공포스러웠다”고 말했다.  


9월 중순경까지 전개된 팔공산 전투는 국군이 쓰러져도 시신을 파묻어 줄 시간도 없을만큼 치열하게 전개됐다. 하지만 남진하는 인민군 제 2군단 예하 제 1사단을 물리치고 대구 외곽선을 사수한 의미 있는 전투였다.


9월 15일 역사적인 인천 상륙작전을 계기로 국군은 북진하기 시작했다. 국군은 그때부터 미군과 연합해서 싸울 때가 많았다. 9월28일 마침내 국군은 서울을 점령했다.

김 씨는 “아, 전쟁이 끝나나보다”라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인민군은 전멸하듯 쓰러졌다. 국군은 확인사살을 하면서 개성 쪽으로 진격했다. 전투력을 상실한 인민군은 평양 쪽으로 후퇴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해서 평양을 탈환하라”고 명령했다. 국군은 황해도 김천 쪽으로 북진하기 시작했다.


김 씨는 평양에서 수륙양용전차(육상·수상·수중에서 기동할 수 있는 전차)를 타고 대동강을 건넜다. 수륙양용전차는 18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었고 몇 십대 정도가 배치되었다.

그는 비록 인민군의 사기가 저하됐다곤 하지만 ‘사지’로 가는 기분에 소름이 돋고 마음이 불안했다고 회상했다. 전투에 많이 참가한 그였지만 공격명령이 떨어지면 그렇게 떨릴 수가 없었다고. 그는 그걸 참고 이겨내야만 했다. “이왕에 죽는 거 적진에서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김 씨가 속한 부대는 육지에 도착하자마자 산비탈을 통해 평양에 진입했다. 인민군은 끝까지 평양을 사수하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연합군과 국군의 전투기, 전차를 포함한 총공격에 버텨내지 못하고 후퇴했다. 국군은 한발자국 한발자국 조여들어 평양 내각 본부를 탈환하고 정부 산하 청사를 점령했다.


10월28일 경 이승만 대통령도 평양에 당도했다. 이 대통령은 당시 민간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평양 시청 앞에서 강연했고 국군은 계속 북진했다.


김 씨는 당시 분대장으로 미군전차부대를 옹호했다. 1개 중대가 탱크 12~14대쯤을 보유하고 있었다. 김 씨는 전차에 올라타서 이동했고 전차가 서면 전차에서 10발자국 정도 물러나 5~6명의 전우들과 함께 전차를 호위했다. 당시 전차 잡는 ‘대전차기뢰’를 적군이 곳곳에 파두었기 때문에 공병대는 지뢰탐지기로 전차가 갈 길을 미리 탐지했다. 대전차기뢰를 밟으면 전차 하나가 날아갔다.


전우가 머리에 실탄을 맞아 굴러 떨어지는 등 전차를 호위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였지만 김 씨는 전차에 올라앉으면 기분이 좋았다. 적은 전차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사기가 저하된 인민군은 후퇴하기에 급급했다.


전차를 운전하는 미군은 분대장인 그를 불러 가끔 씨레이션(미군전투식량)과 양담배를 주면서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김 씨는 미국군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영어를 못 해서 말을 못했다. 하지만 양담배를 함께 피우며 전우애를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들은 눈빛으로 말 한마디보다 깊은 의미를 주고 받았다.


인터뷰 내내 김 씨는 60년 전의 이야기를 차분한 어조로 설명했지만 “전쟁이 한스럽다”는 그의 말에서 참담한 실상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회 서울특별시은평구지구에서 1년에 한두 번씩 국립묘지에 가서 어디에 묻혔을지도 모를 동료들과 전쟁영웅들을 생각하며 참배한다고 한다.


김 씨는 “올 해는 6.25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다시는 이러한 전쟁이 있으면 안 된다. 같은 민족이 피를 흘리지 않고 현명하게 통일해야 한다”며 “전쟁 때를 생각하면 인민군이 많이 밉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고통 받았다. 하지만 그 분들이 받았을 고통도 똑같다고 생각한다. 서로 이해하고 평화적으로 함께 나아가야 할 길을 찾아야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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