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화 종파사건은 선전부 몰락 전주곡

▲ 2000년대 초반 삼지연에 건설된 살림집들 ⓒ연합

지난 2002년 10월 북한 조선중앙TV는 “삼지연군에 수천세대의 현대적 살림집을 지어 주민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주었다”고 요란하게 선전했다. 이후에도 삼지연군에서는 현대식 주택과 체육관, 편의시설 등의 건설 사업이 추진됐다.

당시 건설사업은 전국에서 모여든 ‘당 사상 선전일꾼돌격대(6.18돌격대)’가 담당했다. 6.18돌격대는 삼지연 일대 살림집과 1호도로 건설사업을 차근차근 추진했다. 관련기사 바로가기

선전선동부는 마침내 삼수발전소 건설이라는 대형 발전소 건설프로젝트를 추진해 김정일의 신임을 얻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김정일도 선전선동부의 적극적인 사업추진을 반기며 조직지도부가 이를 책임지고 밀어주라고 지시를 내렸다. 이후 조직지도부와 선전선동부의 주도권 다툼은 첨예화됐다. 이 싸움의 첫번째 희생양은 ‘당사상선전일꾼돌격대’가 출범한 바로 삼지연군 당 책임비서 이영화였다.

잠시 이영화와 김정일의 일화를 소개하고 넘어가자.

“장군님을 만나러 왔다”

1999년 6월 김정일이 양강도 삼지연군을 방문했다. 양강도 당 책임비서 강○○(전 자강도당 조직비서 2003년 출당철직, 정치범수용소에 수감)이 백암역으로 김정일을 마중 나가 혜산시까지 수행했다.

김정일이 삼지연 초대소(김정일 특별별장)에 도착했을 때 호위책임을 맡고 있는 부하로부터 보고가 들어왔다.

삼지연 군당 책임비서 이영화가 장군님을 뵙겠다고 호위 병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제 1차단소를 통과했다는 내용이다. 김정일의 호위망을 뚫고 들어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당시 이영화는 호위국 군관이 권총까지 빼들고 저지시켰지만 “내가 삼지연군 주인인데 우리군에 오신 장군님을 내가 뵙는것이 응당하다”고 소리를 지르며 차단소를 무단 통과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오히려 김정일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 놈 배짱이 보통 아닌데… 한번 만나보자!”고 해 두 사람의 만남이 성사됐다. 김정일은 이후 삼지연에 올 때마다 이영화를 만나 함께 술도 마셨다.

조직지도부에 ‘딱’ 걸린 표식비 사건

김정일이 양강도를 방문하면서 대동한 중앙방송위원장(훗날 중앙당 선전선동부장) 정하철과 선전선동부 부부장 최춘황도 이영화를 눈여겨 보았다.

2000년 12월 ‘당사상선전일꾼돌격대’가 조직되자 인구 2만 5천명밖에 안되는 삼지연군에 연인원 5만명의 돌격대가 밀려들었다. 이영화는 학교 건물까지 모두 돌격대원들의 숙소로 이용하도록 조치했다.

돌격대는 중앙당 선전선동부의 주도 아래 있었기 때문에 이영화는 함께 파견돼있던 조직지도부 일꾼들에게 미처 관심을 두지 못했다.

2002년 11월 삼지연 살림집 건설사업을 기본적으로 마친 돌격대는 혜산에서 삼지연에 이르는 ‘1호도로(김정일 전용도로)’ 건설에 진입했다.

공사가 한창이던 2003년 3월 삼지연군 이명수로 가는 도로를 건설하는 중에 돌격대원들이 도로 표식비를 함부로 처리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명수 혁명전적지로 가는 길’ 이라고 쓰인 높이 60cm 폭이 60cm 되는 자그마한 대리석 표식비였다. 표식비는 같은 표식비이지만 ‘혁명전적지로 가는길’이라고 써진 점이 일반 표식비와 다른 점이었다. 옛날 도로가 사라지면서 이 표식비는 쓸모가 없어졌다.

이영화 종파사건은 조직부의 날조

당시 도로건설을 맡았던 이명수 혁명전적지 답사 관리소장이 “아무 필요도 없으니 땅에 묻어버리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표식비를 땅에 묻는 순간 그 길을 지나던 중앙당 조직지도부 지도원의 눈에 이 장면이 들어왔다.

혁명전적지 도로표식비를 땅에 묻는 것을 본 그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조직지도부는 즉각 삼지연 군당간부들과 사적부분일꾼들의 사상투쟁회의를 개최했다. 목표는 중앙당 선전선동부를 철직시키는 것이었다.

당시 사상투쟁 회의에서는 ‘우리 당의 혁명전통을 거세 말살 하려는 반당 반혁명적 종파행위’라는 무시무시한 죄명이 덧씌워졌다.

조직지도부는 사건을 확대하기 위해 전 양강도적인 사상투쟁회의를 소집했고, 선전선동부에 누명을 씌우려고 무진 애를 썼다. 하지만 사실 이정표를 의미하는 표식비를 땅에 묻었다는 것만으로는 중앙당 선전선동부를 몰아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조직지도부는 중앙당 선전선동부를 연루시키지 못한 채 선전선동부장 최춘황의 측근인 삼지연 군당 책임비서 이영화만을 제거하기로 했다.

2003년 5월. 두 달 동안 평양까지 불려가 사상 검토를 받은 이영화는 출당(당에서 제명되는 것. 출당자는 다시 권력계열에 들어설 수 없음), 해임돼 양강도 운흥군 ‘8월광산’ 노동자로 쫓겨 가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삼지연 군당 책임비서, 군당 선전비서, 선전부장, 삼지연 인민위원회 사적과장을 비롯한 간부들이 아무 죄도 없이 무더기로 출당, 철직돼 농촌과 광산으로 쫓겨 갔다.

하루아침에 반당 반혁명 종파분자가 된 이명수 답사관리 소장은 농촌으로 추방된 지 한 달만에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북한에서 비서처 비준대상(군당책임비서, 조직비서, 선전비서는 중앙당 비서처 비준대상임)은 김정일의 사인이 있어야 해임할 수 있다. 김정일은 한 때 신임을 보이던 간부도 필요하다 싶으면 단호하게 철직시켰다.

중앙당 선전선동부도 불똥이 자신들에게 튈 것을 우려해 이영화를 보호하지 않았다.

‘당 사상 선전일군 돌격대’를 내세워 조직지도부를 누르고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했던 선전선동부는 이때부터 허물어 지고 있었다.

이영화 사건은 당시 당 중앙위 선전선동 비서였던 정하철과 제1부부장 최춘황의 몰락을 예고하는 전주곡이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