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재평가 절실…자유시장경제 기틀 세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에 대한 한국 사회 평가는 사실 야박했다. 독재자라는 평가가 대부분이고 대한민국을 세운 건국대통령이라는 표현은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다.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내려진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무자비한 독재자’ ‘민족 분단의 장본인’ ‘친미주의자이자 친일파 등용’ ‘6·25 전쟁 발발시 수도와 국민들을 버리고 도주한 대통령’ ‘민족 지도자 김구 암살 사주’ 등으로 학계에서는 오랜 기간 비판적 시각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최근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면서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 지대한 공언을 했고, 한미 안보동맹의 틀을 구축했으며, 반공포로 석방이나 북한 수복 발언 등을 통해 우리의 국익을 챙긴 노련한 외교가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결국 6·25전쟁 당시 개입을 망설였던 미국을 끌어들여 한반도 전역의 공산화를 막아냈고, 한국사회에 자유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씨앗을 심은 장본인이라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이승만 전 대통령의 공과를 재평가를 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정체성 확립에 빼놓을 수 없는 과정이다. 지난 7일 대학생 신문 바이트(bait)는 서울대 이영훈 교수를 초청해 ‘대한민국 역사상식에 도전하다!’ 세 번째 시간을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이 교수는 대학생들과 함께 이승만에 대한 오해를 차근차근 해명했다. 


이 교수는 “이승만에 대한 오해와 소문들이 확대 재생산되는 경우가 있다”면서 “앞뒤 사정을 알고 이해한다면 그동안 알려진 사실들은 오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우선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이 한반도 분단을 초래했다는 비판에 대해 “한반도 분단의 시초는 이승만과 대한민국에 있는 것이 아니다”며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한 ‘정읍 발언’은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취지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토지개혁 조치와 관련 “북한의 ‘무상몰수 무상배분’는 결과적으로 농민들의 소유권을 박탈해 생산력 저하를 불러올 수 밖에 없다”며, 반면 “대한민국의 농지개혁은 원만하면서 합리적이고 장기적으로 농업혁명을 유발시킨 하나의 개혁”으로 평가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승만 정권 시절에는 사람들의 통념과는 달리 건강한 국민들과 관료들이 창의성과 능력을 발휘한 시대였다. 그러한 총체적인 기획과 지휘의 뒤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가 있었다”며 “정치적 비극 때문에 이 전 대통령의 성과가 사장돼 왔는데, 지금이라도 올바르게 재평가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독재자 이승만’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는 “그가 독재자라는 사실은 지탄 받아야한다”면서도 “하지만 권력과 부를 위한 후진국형 독재자가 아니었다”고 강변했다.


그는 “건국을 위한 나라 세우기 과정에서 통치 방법으로 독재를 선택했다. 이 대통령 서거 후 그의 집안은 보통생활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청렴하고 강직한 생활을 했다”며 “민주주의를 훼손한 행위는 이승만 대통령의 책임이 크지만 그와 같은 정치적 선택을 하게 만드는 당시 상황을 냉정하게 재평가해 볼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다음은 이 교수와 대학생들의 대담 요지]









대학생시사교양지[bait]가 마련한 ‘대한민국 역사 상식에 도전하다’ 대담에서 이영훈 교수는 “한반도 분단의 시초는 이승만 대통령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사진=대학생시사교양지[bait] 제공


– 이승만 전 대통령은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하면서 남북 분단을 조장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한반도 분단의 책임이 있는 것 아닌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정읍 발언’이 게재돼 분단의 책임을 이승만에게 돌리고 있다. 이승만과 그를 둘러싼 친일파·반민족 세력은 ‘반공파시즘’ 체제로서, 대한민국을 설립했다는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이와 함께 분단의 시초를 어디서 제공했는가라는 이야기도 나오게 되고, 여러 역사 선생님들은 그 책임을 이승만과 대한민국에 있다는 식으로 가르쳐 왔다.


하지만 한반도 분단의 시초는 이승만과 대한민국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승만이 단독정부를 수립하자는 ‘정읍발언’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정읍발언에 앞선 1945년, 9월 20일 전후로 스탈린이 북한 점령군 소련 사령관에게 광범위한 계급연합을 통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하라는 지령을 내린다. 이는 전후 세계의 주도권을 쥐기 위한 미·소 간 분쟁의 일환이었다.


이러한 미·소 간의 분쟁 속에서 소련은 미국에 이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기존에 확보하고 있던 점령지들 만큼은 확실히 소련이 장악한다는 정책을 내세우게 된 것이고, 북한에서는 이러한 스탈린의 지시를 이행하기위해 공산주의 체제 정비의 일환으로 토지개혁을 단행한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무산몰수 무상분배’라는 미명하에 토지개혁을 단행하고, 이에 재산을 빼앗긴 수십만의 북한인민들이 남한으로 내려오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분단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무상몰수 무상분배’로 인해 재산을 빼앗기고 고향을 등진 실향민들의 가슴 속에 증오심과 분노가 가득 찼고, 이 현실을 본 이승만은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한만이라도’ 정부를 세워야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곧 분단을 의미하는 발언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엄청난 반발과 충격을 안겼다.”


– 북한의 ‘무상몰수 무상분배’ 정책과는 달리 이승만의 ‘유상몰수 유상분배’ 정책은 지주들의 환심을 사기위한 것이었을 뿐 일반 농민들은 혜택을 보지 못했다는 주장이 있다.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조차도 토지개혁만큼은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해야했다는 발언을 한다. 하지만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했던 모든 토지개혁들은 실패했다. 중국에서도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시행은 공산주의를 정착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러나 수많은 인구에게 토지를 나눠주다보니 농업생산력이 떨어졌다. 생산력이 떨어지자 자연스럽게 이를 극복하기 위해 집단농업을 하게 됐고 결국은 사회주의의 비극이 발생한 것이다.


‘무상몰수 무상분배’는 이론적으로 소유권을 지불하는 것이 아니다. 소유권은 어디까지나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취득하는 것이다. 그런데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하게 되면 농민들에게 경작지는 생길지 몰라도 그것에 대한 처분은 농민이 할 수 없다. 결국은 국가가 토지를 소유하게 되는 셈인데, 이렇게 되면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 이른바 ‘국가적 농노제’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토지개혁은 적절하게 경작 가능한 범위를 초과하는 토지에 한에서 그것을 국가가 유상으로 수용하고 그리고 그것을 현실적으로 경작하고 있는 농민들에게 소유권을 유상으로 분할 상환하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 그렇게 되면 현실의 토지경작체제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소유권만 원만하게 변화시키는 훌륭한 토지개혁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생산력이 감소하는 부작용도 없다. 소작을 하던 농민들이 장기 분할 상환의 결과 자작농지를 확보하게 됨으로써 토지를 통한 수익 창출의 욕구를 갖게 되고, 결과적으로는 생산이 증가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의 농지개혁은 원만하면서 합리적이고 장기적으로 농업혁명을 유발시킨 하나의 개혁으로써 큰 사건이었다고 본다.”


– 김구 선생의 암살 배후에 이승만 전 대통령이 있다는 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설득력 있는 이야기 아닌가.


“먼저 김구와 이승만은 오래된 신뢰관계로 평생을 같이 해온 사이다. 해방시기에는 반탁운동을 같이 하며 동지적 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이승만은 폭력노선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이승만은 자신의 정적이라고 해도 테러로써 힘을 행사하는 것에 대해 종교적인 신념으로 거부감을 표하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김구가 독립운동을 할 당시 그를 극구 만류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고 한다.


이승만과 김구를 오랫동안 연구해 온 전문가들에 따르면 김구는 대한민국 건국 노선을 이탈해 북으로 올라가 남북협상에 참여하려 하지만 결국 북한의 입장을 강화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됐다. 또한 가장 명망 있는 정치 지도자가 건국에 참여하지 않음에 따라 당시 한국독립당(월남해 반공을 표방한 사람들로 주로 구성돼 있음)의 사람들이 굉장히 당황하면서 김구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들은 김구가 북한에 방문하는 것도 극구 만류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김구 암살사건은 안두희가 아니더라도 한독당 내부에서 누구든지 김구 선생을 향해 권총을 발사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김구는 그만큼 파장이 큰 정치적 행위를 자행했고 이 같은 일련의 사태는 김구 선생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한다.


최근 이화장에서 나온 김구 선생과 자유중국 대사의 대화록이 있다. 여기에 따르면 김구 선생은 대한민국의 성립에 정치적 자심감을 갖고 있지 않았다. 북한군의 위용을 보고 조만간 없어질 나라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대한민국은 조만간 없어질 나라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건국 과정에서 발을 뺀 것이고, 그것은 김구 선생의 큰 정치적 과오였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승만이 김구 선생 암살을 지시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 이승만 전 대통령은 6·25전쟁 발발 당시 서울과 시민들을 버리고 혼자 도망갔다는 비난도 받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국방태세가 붕괴하고 서울이 함락됐다는 것은 대통령으로서 책임을 면하기 힘들다. 6·25 전쟁 초기 이승만 대통령의 뼈아픈 실책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국민들에게 걱정하지 말라하고 혼자 내뺐다는 사실은 약간 과장된 부분이 있다. 서울과 시민들을 이용해 퇴각할 시간을 벌겠다는 그런 의도가 있었다는 사실은 왜곡된 것이다.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6·25 전쟁 당시 북한의 공격은 새벽 5시경 시작했다. 휴일이었던 그날 아침 9시 이승만 대통령은 경회루에 낚시를 하러갔다. 당시 국방부는 늘상 있어 온 북한과의 군사 충돌이 오늘은 좀 심각하게 벌어진 정도라고 판단하고 4시간이 지나도록 보고를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0시 30분 즈음에 이승만 대통령이 최초 보고를 받게 된다. 당시 휴가자들은 귀대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국방부 관계자들은 걱정하지 말라는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이에 시민들에게 걱정하지 말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방송을 내보냈다. 그렇게 25일 하루가 흘러갔다.


이승만 대통령이 북한과의 전면전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안 것이 새벽 3시 경이다. 그래서 맥아더 사령관에게 호통을 치며 지원요청을 했고, 이에 맥아더는 미 무스탕기 10대를 급파한다. 이에 국방부 관계자들은 무스탕기가 있으면 북괴를 막아낼 수 있다면서 대통령에게 상황 보고를 했다. 하지만 27일 새벽 2시가 되자 이기붕, 조병옥 신성모 등 당시 국방치안 책임자들이 이승만 대통령의 긴급 피난을 건의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 사수를 주장했지만 그들에 의해 새벽3시 기차로 피난길에 오르게 된다. 의정부가 뚫린 급박한 상황이라 ‘걱정 말고 생업에 종사하라’라는 방송을 피난 방송으로 바꿀 행정적 여력이 되지 못했다.


이 대통령과 국방·치안 관리들은 상황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보고 있었고 적어도 하루 전에 내보냈어야 할 대피 방송을 내보내지 않은 것이 큰 실책이었다. 고의적으로 서울시민들을 이용하거나 버렸다고 평가할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 이승만 전 대통령이 독재자라는 비판은 면하기 어렵다. 이에 대한 평가는?


“그가 독재자라는 사실은 지탄 받아야 한다. 하지만 권력과 부를 위한 후진국형 독재자가 아니었다. 그는 건국을 위한 과정에서 통치 방법으로 독재를 선택했다. 이 대통령 서거 후 그의 집안은 보통 생활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청렴하고 강직한 생활을 했다. 의도된, 기획된 독재자였다고 생각한다.


이승만은 자신을 대체할 인물을 찾아볼 수 없었던 것 같다. 미국과 대등한 외교를 하며 북진 통일을 주장할 인물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아는 것과 다르게 이승만 대통령은 친미주의자가 아니라 반미주의자였다. 철저하게 미국을 이용하는 정치가였다.


장면은 대미 외교에서 너무 온순해 미국의 뜻에 움직일 가능성이 컸고, 조병옥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판단했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세운 나라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10년 간은 자신이 나라를 자리 잡게 하겠다고 공공연하게 말했었다.  독립운동 당시에도 10년간은 민주주의를 국민들에게 교육할 필요가 있다는 발언도 해왔었다.


그래서 전쟁 도중 북진 통일의 기회가 찾아왔는데, 자신이 아니면 이 것을 성사시킬 사람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간선제를 직선제로 바꾸고 무리하게 장기집권을 한 것이다. 이 같이 민주주의를 훼손한 행위는 이승만 대통령의 책임이 크다. 하지만 그와 같은 정치적 선택을 하게 만드는 당시 상황을 냉정하게 재평가해 볼 필요가 있다.”


▶대학생 대담 참여자
김승재(연세대 신문방송학), 김형주(연세대 신문방송학), 김초롱(경희대 언론정보학), 이승수 (연세대 신문방송학), 황인혜(동국대 신문방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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