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헤즈볼라 전후 2년만에 ‘포로·주검’ 교환

2006년 7월 이스라엘과 헤즈볼라 간의 끔찍한 전쟁을 기억할 것이다. 당시 전쟁이 촉발된 것은 헤즈볼라가 국경지대에서 이스라엘 병사 두 명을 납치한 사건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헤즈볼라 측에 납치 병사를 즉각 돌려줄 것을 요구했으나 헤즈볼라 측은 도리어 이스라엘에 수감된 헤즈볼라 대원들을 전원 석방하라는 요구로 맞섰다. 이스라엘은 병사 구출 명목으로 헤즈볼라에 대한 전격적인 공격을 감행하면서 전쟁은 전면전으로 번지게 됐다.

이후 전쟁은 34일에 걸쳐 이어졌으며 유엔의 중재로 겨우 휴전에 들어갔다.

2년이 지난 지금에야 당시 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피랍 병사에 대한 포로 교환 절차가 16일 진행되었다. 이스라엘과 헤즈볼라는 16일 오전 9시 경 이스라엘 북부 하니크라 국경통과소에서 양측의 포로들을 교환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헤즈볼라는 이스라엘로부터 헤즈볼라 수감자 5명을 석방하는 조건으로 자신들이 납치한 병사 두 명을 돌려주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피랍 병사들은 이미 살해된 상태였으며 이스라엘은 16일 오전 9시 피랍 병사 에후드 골드와세르와 엘다드 레게브의 유해가 들어있는 두 개의 관을 넘겨받았다.

이스라엘은 사실상 두 병사가 이미 숨졌을 것으로 추정하면서도 이번 포로교환을 추진해 왔다. 두 병사의 사망은 이날 포로교환 과정에서 처음 공식 확인됐으며 마지막까지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있던 유가족들은 사망 사실에 오열하였다.

이스라엘은 유엔이 지켜보는 가운데 DNA 검사를 실시하며 신원이 확인되면 곧 자신이 수감하고 있는 레바논인 5명을 헤즈볼라 측에 인계하게 된다.

헤즈볼라 수감자들은 같은 날 새벽 교도소에서 국경 근처 림만 군사기지의 수용시설로 이감돼 대기 중에 있다.

이스라엘과 헤즈볼라는 이 교환 절차가 마무리되면 2006년 전쟁 당시 사망한 이스라엘 병사들의 유해와 팔레스타인 및 헤즈볼라 전사들의 시신 190여 구를 맞교환하게 된다.

이스라엘은 15일 각료회의를 개최해 포로교환안을 최종 비준했다.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대통령은 교환안에 서명한 직후 기자회견에서 “이스라엘은 살인자를 용서하는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면서 “우리는 테러리스트를 석방하고 싶지 않지만 조국을 지킨 두 병사를 고향으로 데려와야 하는 도덕적 의무를 다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이번에 이스라엘이 석방하는 핵심 인물은 사마르 쿤타르이다. 그는 16세의 나이로 1979년 다른 무장대원들과 함께 이스라엘 북부의 한 아파트에 침입, 3명의 이스라엘인을 살해한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다. 그 외 포로 4명은 2006년 전쟁 당시 이스라엘에 붙잡힌 헤즈볼라의 무장대원들이다.

쿤다르의 석방을 두고 이스라엘에서는 반대가 거셌다. 이스라엘인들은 쿤다르가 저지른 만행을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쿤타르는 1979년 4월 다른 무장대원 3명과 함께 고무보트를 타고 이스라엘 해안에 침투했으며, 경찰관 1명을 사살하고 북부 나하리야의 한 아파트에 침입하였다. 이들은 평범한 시민 대니 하란과 4살 난 딸을 인질로 잡아 해변에서 무자비하게 살해함으로써 이스라엘인들을 더욱 분노케하였다.

쿤타르는 생포됐고 다른 대원 2명은 현장에서 사살됐으며, 함께 붙잡힌 대원 1명은 이스라엘 교도소에 투옥됐다가 1985년 포로교환으로 석방됐다.

레바논은 쿤다르를 비롯한 전사 5명의 귀환을 기념해 16일을 임시 공휴일로 선포했다. 이스라엘인들에게 ‘살인마’가 헤즈볼라에겐 최고의 ‘영웅’인 것이다. 이스라엘의 포로 석방에 대해 헤즈볼라 측은 “이번 포로교환은 이스라엘이 패배를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라고 논평했다.

이번 포로교환은 독일의 중재가 컸다. 유엔의 위임을 받은 독일은 약 18개월에 걸쳐 이스라엘과 헤즈볼라를 설득, 포로교환을 중재하였으며 마침내 성사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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