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가족상봉 합의’, 현대가 나설 일인가?

다섯 번이나 체류기간을 연장하며 김정일과 면담을 시도했던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17일 돌아왔다.

현 회장은 기자회견 장에서 ▲금강산 관광 재개 ▲군사분계선 육로통행 재개 ▲개성관광 재개 및 개성공단 사업 활성화 ▲백두산 관광 추진 ▲추석 전 이산가족 상봉 등 5개 항목에 대해 북한 아태평화위는 합의했다고 밝혔다.

현 회장은 ‘작년 금강산 사고와 관련해 앞으로 절대 그런 일 없을 것’이라는 김정일의 말을 전하며 “이번 방문 기간 중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면담이 이뤄져 금강산관광 재개 등 당면현안에 대해 폭넓게 이야기 했다”고 면담 과정을 소개했다.

현 회장의 방북 결과 보고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현대그룹과 북측 아태평화위가 합의했다는 ‘이산가족 상봉’ 문제다.

현 회장과 김정일간 합의는 말 그대로 현대그룹과 북한당국 사이에 오간 합의일 뿐이다. 현 회장은 금강산·개성관광 중단으로 막대한 매출 손실을 입고 있는 현대아산의 회생을 위해 북한의 절대 권력자 김정일의 ‘메시지’가 필요했을 것이고, 김정일은 김정일대로 현대아산을 활용할 자신의 복안에 따라 만남을 가진 셈이다.

그런데 현 회장은 지금까지 남북당국간 채널을 통해 다뤄졌던 ‘이산가족 상봉’문제를 단독으로 북한 당국과 합의해 버렸다. 정부는 현 회장의 방북 시점부터 오늘날까지 ‘현 회장을 통한 대북 메시지 전달은 없다’고 강력히 주장해 왔다. 그렇다면 현 회장 개인이 들고 온 이 엉뚱한 ‘합의문’을 우리 국민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현 회장이 정부로부터 따로 언질을 받지 않았다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와 같은 약속을 남겼다는 말인가? 만약 정부가 현 회장을 통해 북측과 이면 협상을 벌인 것이 아니라면, 현 회장의 ‘이산가족 상봉 합의’는 향후 남북관계에서 우리 정부의 역할에 큰 혼선을 야기할 수 있다.

만약 공동합의문의 당사자인 현대 그룹이 이산가족 상봉 행사의 일 주체가 된다면 우선 그 모양새가 너무 해괴하다. 어차피 남쪽에서 상봉이 이뤄질 가능성이 희박한 상황에서 북쪽에서 상봉 행사를 진행하려면 정부의 역할이 필수다. 그렇다면 민간 기업이 합의한 내용을 정부가 보조하는 형식이 되는 꼴인데 과연 개별 민간기업이 이산가족 상봉을 추진하는 것이 국민 상식에 합당한지 의문이다. 또 현대그룹이 대한적십자사와 협조해 상봉행사에 필요한 모든 비용과 절차, 상봉자들의 신변안전 등을 책임질 수 있는지도 궁금해진다. 현 회장은 무슨 생각으로 현대그룹의 이름이 들어간 공동합의문에 이산가족 상봉 문제를 포함시켰는지 국민들 앞에 입장을 밝혀야 한다.

반대로 합의는 현대그룹이 했으나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정부에게 떠넘겨 질 경우 정부는 안으로는 심각한 정치적 부담을 지면고 북측으로 부터는 상당한 수준의 압박을 받게 될 수 있다. 북측이 이산가족 상봉을 다른 현안과 연동시킬 경우 남북관계 주도권 자체가 북측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산가족 문제는 당사자들의 고령화와 사망으로 인해 그 어느 남북문제보다 시급성을 요하는 현안이다. 때문에 남북관계에서의 원칙과 절차를 존중할 여유가 없는 이산가족들은 어떤 방식이 됐든 상봉자체를 강력히 요구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잘못하다간 북측이 일방적으로 차단해왔던 이산가족 상봉이 마치 우리정부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재개되지 못하는 것과 같은 모양새로 변질 될 지 모른다.

여기에 이명박 정부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친북세력들까지 ‘인도주의’를 앞세워 ‘정치공세’를 벌일 경우 우리 사회는 극심한 내홍을 피할 수 없다. 결국 김정일 정권은 이산가족 상봉의 대가로 제 멋대로 우리정부에게 횡포를 부리고 남남갈등을 적극 활용할 수 있는 여지가 크게 늘어나게 돼 ‘원칙에 따라’ 북한을 관리하려던 정부의 대북정책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현 회장과 김정일의 합의에 대한 북한 매체들의 선전도 예사롭지 않다. 로동신문은 17일 ‘공동발표문’을 보도하면서 “김정일국방위원장께서는 따뜻한 담화를 하시면서 현정은회장의 청원을 모두 풀어주시였다”고 주장했다.

특히 이번 공동발표문에는 북측이 대남압박용으로 줄곧 주장했던 6․15, 10․4 합의를 빼놓지 않고 강조하고 있다. 김정일의 위신은 한껏 높이면서도 6․15, 10․4 선언에 따라 현대그룹과 사업을 재개 하는 모양새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정부와 현대그룹은 이번 현회장의 방북 결과에 대해 국민들 앞에 책임 있는 해명을 내놓아야 한다. 그 해명이 어떤 것이던, 추후 남북관계는 더욱 요동칠 수밖에 없게 됐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어렵게 쌓아 왔던 대북정책의 ‘원칙’이 현 회장의 방북으로 훼손된 것이 아닌지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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