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 문제, 세계진보진영의 숙제

▲ 방리유 지역에서 발생한 소요사태가 전국으로 확산됐다

영화 『13구역』에는 공권력이 포기한 도시의 한 구역이 나온다. 그곳엔 폭력과 마약이 난무하고 갱들의 법칙만이 존재한다.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공공기관은 모두 철수했으며 학교도 폐쇄되었다. 파괴되고 지저분한 회색 빛 건물들만이 그들의 미래를 보여 준다.

‘13구역’을 지키는 것은 경찰이 아니라 총을 든 갱들이다. 공권력이 하는 일이란 이 구역을 그저 외부세계와 철저히 격리시키는 일이다. 영화에서 시당국은 결국 ‘13구역’을 통째로 날려 버릴 끔찍한 궁리를 한다. 그리고 영화는 ‘13구역’과 이를 파괴하려는 정상국가의 싸움을 조명한다.

영화에 나오는 13구역은 미래의 구역이다. 과장된 미래에나 예상가능 한 것이지 현재는 아니라는 말이다. 현실의 우리 주변에 저런 구역이 존재한다는 것은 선뜻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 공권력이 완전 무장 해제되거나 도리어 겁을 내며 결국 모두 철수한 이런 구역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프랑스의 소요 사태를 통해 조명된 어두운 뒷골목의 상황은 영화의 13구역이 지극히 현실 가능한 공간임을 상기시켜 준다. 국가 부재, 공권력의 포기가 투영된 곳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국가가 그 책임을 방기한 채 끝없는 소외와 상실 속에 방치된, 꿈을 잃은 회색 빛 공동체가 있었다. 프랑스의 방리유는 바로 그와 같은 곳이었다. 파리의 외곽지역을 뜻하는 방리유는 영화의 13구역처럼 공권력조차 들어가기를 무서워하고 싫어하며, 그 공권력이 쓰레기 하치장 정도로 그냥 쓸어버리고만 싶어 하는 그런 곳이었다.

프랑스의 톨레랑스와 그 뒷 그림자

이번 프랑스 소요 사태가 주는 충격은 이러한 소요가 다른 곳도 아닌 프랑스에서 일어났다는 데에서 더욱 커진다. 자유, 평등, 박애의 위대한 근대정신은 차치 하고라도 가장 존경스러운 미덕인 ‘관용’, ‘똘레랑스’로 유명한 프랑스. 그런 곳에서 그 ‘똘레랑스’와는 정반대에 있는 극단의 차별과 방기가 존재하였다니 그 암울한 뒷그림자가 놀라울 뿐이다.

사태의 촉발은 방리유에서 아프리카계 소년들의 죽음이었다. 무슬림 모두가 금식에 들어갔던 라마단의 마지막 날, 주린 배를 안고 집을 향해 달려가던 소년들은 멀리서 보이는 경찰의 검문을 보고 그저 집에 빨리 가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다른 길로 피해 달렸다.

이를 발견한 경찰이 무작정 추격하였으며 무의식적으로 겁에 질려 달아나던 소년들은 송전소의 높은 담을 넘었고 그만 변압기에 추락하여 2명의 소년 모두 감전사하고 말았다. 이에 경찰은 주변에서 일어난 절도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검문을 하려 하였을 뿐 추격전은 없었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사건 당일 주변 지역에서 절도 사건은 없었던 것으로 드러나면서 방리유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유럽에는 북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에서 유입된 아랍계 이민자들이 많다. 한 해에 유럽에 유입되는 합법 이민자는 약 130만 명 가량이다. 그런데 이보다 훨씬 많은 700만 명 가량이 불법 이민을 시도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유럽 각국에 살고 있는 무슬림 이민자들은 약 2,500만 명 정도인데 사태가 발생한 프랑스의 경우 약 500만 명이 살고 있으며 영국은 약 200만 명, 독일은 약 300만 명, 네덜란드 약 1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들 이민 노동자들은 유럽의 노동 시장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대거 유입되었는데 경제 부흥에 한창 열을 올리던 유럽의 부족했던 노동력 문제를 그들이 해소해 준 것이다. 유럽 사회는 지금도 이민 노동자들의 노동력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이민자들은 5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으로 통합되지 못한 채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는 하층민의 생활과 시간이 갈수록 가중되는 인종 차별 속에서 방치되고 있었던 것이다.

무슬림 이민자, 가난 대물림

차별에 시달리던 무슬림들은 대도시 외곽으로 모이기 시작하였으며 점차 그들의 집단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그곳은 황량한 빈민촌이 되어 갔으며 가난의 대물림과 국가의 외면 속에서 회색 빛 상실의 구역으로 전락해 간 것이다. 이들에게 주어지는 일자리는 소위 유럽의 백인들이 꺼리는 소외 업종들이며 유럽에서 나고 자란 2세대, 3세대 젊은이들에게 조차도 성공의 기회는 쉽사리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번 프랑스의 소요 사태는 유럽 사회에 반성과 성찰의 기회를 던져 준다. 유럽 사회는 자신들을 위해 갖은 고생을 하였으나 진정으로는 그들의 노고에 응당히 보답하지 않았던 자신들을 돌아보게 될 것이다. 그들의 깊숙하고도 가까운 곳에서 그들이 먼저 눈을 돌리고 해결해 가야 할 숙제가 있음을 직시하는 것이다. 유럽 사회는 프랑스 사태가 주변국으로 확대될 것에 대해 우려를 하고 있다. 사태가 진정되는 속에서 그저 안도만 할 게 아니라 그 우려만큼이나 이번 일을 진정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에도 외국인 노동자가 40만 명이 넘는다. 그들은 우리가 꺼려하는 소위 ‘3D 업종’에 종사하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멸시와 차별 문제는 이미 많이 이야기 되어 왔다. 경제가 어려워 일자리가 없다고 하지만 작은 사업장에서는 일손 부족을 호소한다. 힘들고 더럽고 위험해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그런 일들을 외국인 노동자들이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합법 이주와 불법 체류 사이에서 완전히 해결할 수 없는 어떤 문제는 존재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며 필요한 일을 그들이 도맡고 있는 엄연한 현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인간으로서는 누구도 차별 받을 수 없으며 인간으로서는 누구도 고귀한 존재라는 것을 우리는 진실로 인식하고 실현해야 한다.

세계 공동체의 발전은 장차 국가 간 높이를 더욱 낮추는 방향으로 진행될 것이다. 세계 진보의 방향에서 본다면 국경의 높이는 낮아질수록 좋으며 인종 민족 종교적 벽은 더욱 사라져 가야 한다. 이런 방향에서 국가적 협력과 제도의 마련이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며 이는 시간을 두고 꾸준히 진행되어야 할 내용이다.

그러나 그러한 ‘제도’의 문제보다 더 가깝고도 어려운 것은 내 안에 있는 ‘진실’ 이었다. 진정 타인을 또 다른 나로 받아들이고 인간이라는 공통 존재로서의 정체성 외에 그 어떤 편견과 거부감도 개입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것이다. 그것은 내 안의 이방인(異邦人)에 대한 문제이다.

프랑스의 소요는 ‘내 안의 이방인’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것은 일견 유럽의 일그러진 자화상이다. 내 안에서 이방인을 만들고 그를 돌아볼 줄 몰랐던 부끄러운 자화상, 그것을 이들의 분노가 돌이켜 보여 주는 것이리라. ‘똘레랑스’의 그늘에 존재했던 진정한 그 무엇을 말이다.

이종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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