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드디어 ‘남북문제 링’에 오르다

우리의 생활 구석구석에는 일본말들이 스며들어 있다.

그런 것들 중에 어릴 때 많이 들었던 말이 바로 ‘오야 마음’이다. 우리말로 ‘주인장 또는 보스’를 뜻하는 ‘오야지’가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이나 권한범위 내에서 맘대로 하는 걸 두고 못마땅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곧잘 쓰이는 표현이었다. 지금 많은 국민들이 이같은 ‘오야 마음’ 때문에 심기가 불편하지 않을까?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4일 남북정상선언을 내놓았다. 하지만 핵문제, 국군포로 및 납북자문제, 북한 인권 등의 문제는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절실한 과제이지만 북이 불편하거나 전략적으로 회피해온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자고로 협상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의제설정(agenda setting)’이다. 의제에 포함된 것에 대한 합의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지는 둘째 문제이다. 우선 ’무엇을 다룰 것인가‘가 첫째이다.

따라서 이번 남북정상회담은 의제설정에 있어 졸작이다. 얼굴을 붉힐 때 붉히더라도 말해야 할 것들이 다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사실 임기말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을 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무리수를 초래하지만 유리한 점도 없지 않다. 즉 실질적인 권한이 적은 만큼 책임도 적을 수 있으므로, 다음 대통령에겐 부담스럽지만 임기말 대통령은 상대적으로 적은 부담을 갖고 협상에 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권변호사 출신인 노대통령이 납북자, 국군포로 그리고 북한인권을 화끈하게 말했다면 얼마나 박수를 받았을까?

다시 현실을 보자. 문제는 이처럼 균형감각이 상실된 의제가 남북관계가 아니라 연말 대선으로까지 이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다분히 계산된 졸작일 가능성이 많다.

한동안 청와대와 여권의 필독서가 바로 조지 레이코프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Don’t think of an elephant)”였다. 정치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만든 링 위(프레임)로 상대방을 끌고 와서 싸우라는 것이 이 책의 요지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 남북정상 회담으로 연말 대선국면에 가장 위력적인 링이 개설된 것이다.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는 그동안 ‘경제’ 링 위에서 연전연승해왔지만 이젠 ‘남북정상회담’ 링으로 오르지 않을 수 없다. 그것도 노대통령이 정한 룰만 숙지하고 있는 심판이 버티고 있는 링으로 말이다.

당장 다음 달에 1차 남북 총리회담을 서울에서, 국방장관 회담을 평양에서 열 모양이다. 이어서 장관급회담과 경제협력추진위원회, 국회회담 등도 열자고 할 것이다. 대선 후보들은 이제 싫든 좋든 선언문을 구해놓고 이러한 프로세스에 대한 입장을 정하느라 골머리를 앓아야 한다.

남북정상회담 성과를 폄하하는데 시간을 보낼 때가 아니다. 또한 ‘남북정상회담 뒤치다꺼리’ 링의 심판을 바꾸기 위한 노력을 할 때다. 범여 ‘평화공세’를 쓸어내고 더 멋진 링을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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