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내분종용, 과격 수니파 뿌리를 캐보니…

▲ 내전 상황으로 치닫는 양 분파간 갈등

수니파의 시아파 성지 폭탄테러 공격으로 시작된 양 분파간 갈등이 장기전 양상을 띄면서, 이라크 재건 사업에도 적신호가 켜지고 있다.

이라크는 인구의 약 65%가 시아파이며 나머지는 수니파로 구성돼 있다. 수니파는 또 쿠르드족(약 15%)과 아랍족(약 20%)으로 나뉘어진다. 1979년 사담 후세인이 권력을 장악한 이래 20여 년간 소수의 아랍 수니파가 쿠르드족은 물론 다수의 시아파를 지배해 왔다.

후세인의 철권 통치는 같은 종파인 쿠르드족에 대해서도 잔혹하기 이를데 없어 1989년 독가스를 살포해 단 5분만에 쿠르드족 마을 5천 여명의 주민을 학살한 사건은 대표적 반인륜적 범죄행위로 꼽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후세인은 걸프전으로 일시 실각했을 당시 봉기를 일으킨 시아파에 대해서도 학살을 자행, 약 30만명을 살해하고 암매장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시아파와 수니파간의 갈등은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마호메트의 후계를 둘러싼 대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호메트가 아들이 없이 운명함으로써 추종자들 사이에서 그의 후계를 두고 다툼이 벌어졌다. 훗날 시아파로 분류된 분파는 마호메트의 사위 알리를 후계자(칼리프)로 주장했다. 한편 아랍 부족장 회의 슈라(SHURA)는 만장일치로 다른 인물인 아부 바크르(632년~634년)를 초대 칼리프로 선출하였다.

수니파-시아파, 전통적 갈등 관계

시아파의 후계자인 알리는 추후 4대 칼리프에 선출되는 등 분파간 통합의 계기가 마련되기도 했으나 그가 죽자 다툼은 다시 불거졌다. 알리의 첫 아들 하산의 갑작스런 죽음은 수니파의 독살로 전해졌으며 둘째 아들 후세인이 최후를 맞이한 카르발라 전투는 시아파에게 역사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부여한다.

시아파는 후세인이 죽은 1월 10일이면 기이한 의식을 치르는데 순례객들은 칼끝으로 자신의 몸을 난자하며 피를 뿌리는 끔찍한 행진을 거행한다. 이는 수니파의 살육으로부터 후계자를 지키지 못한 데 대한 원한의 확인이자 참회의 의식이다. 후세인은 죽음 직전 “명예로운 삶이 굴욕적인 삶보다 낫다”는 말을 남김으로써 훗날 이슬람 순교의 씨앗이 되었다.

이라크에서 후세인 철권 통치 기간에 벌어진 의도적인 타종족, 타종파에 대한 탄압과 살인은 위와같은 종파간,종족간 원한을 강화하기에 충분했다. 따라서 후세인 축출과 함께 진행된 이라크 신정부 구성에 시아파가 대거 진출하게 되는 상황앞에서 수니파는 잠재적 공포를 강하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현재 새로운 이라크가 연방주의, 공화주의를 표명하고 있는 이상 이라크의 시아파가 후세인 시절의 독점을 요구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수니파의 시아파 성지 공격은 내전을 유발할 목적을 띈 수니파 과격 집단의 의도적 행동으로 풀이되고 있다.

수니파 과격 집단은 시아파, 수니파 간의 전통적 대립을 적극 활용 혹은 자극함으로써 시아파 중심의 새로운 이라크 자체를 파탄내는 데 우선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이종철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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