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는 1990년대 중·후반 국가공급체계가 급속히 무너지면서 적자생존(適者生存)을 위해 자연스럽게 ‘장마당(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제 시장은 주민들뿐만 아니라 고위 간부들까지 일상생활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생활수단으로서의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다.
북한 당국이 과거 시장을 ‘폐쇄-재개’, ‘축소-확대’를 되풀이했던 것과는 달리 김정은 체제 들어서는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주민들에 대한 식량, 생필품 공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불가피한 선택’으로 인식하고 시장 활동을 묵인하고 있을 것이란 분석이다.
특히 김정은은 ‘먹는 문제 해결’ ‘인민생활 향상’을 중시하면서 새로운 경제관리개선조치(일명 6·28방침)를 점진적으로 실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당분간 시장 활동에 대한 묵인은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같이 시장 활동에 대한 통제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시장과 국영 기업들 간의 일정한 관계가 형성되는 등 시장화가 조금씩 진척되고 있는 모양새다.
북한의 시장 시스템을 이해하게 된다면 주민들의 생활은 물론, 당국의 정책 방향성도 예측가능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시장에 대한 정책 방향이 향후 북한 정권의 정책 방향을 가늠해볼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
데일리NK는 지난 9일 함경북도 회령 시장을 통해 북한 시장화와 함께 정책 변화 가능성에 대한 논문을 발표한 곽인옥(사진)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선임연구원을 만났다. 북한의 한 지역에 대한 시장화가 어떤 정책 변화를 가져오는지를 조사, 발표한 박사학위 논문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연구는 북한의 접근성이 차단된 상황에서 최대한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국내 입국 300여 명의 탈북자들과의 심층 면담을 통해 이뤄졌다.
[다음은 곽인옥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선임연구원 인터뷰 전문]
-북한 시장에 대한 연구는 통계자료를 확보할 수 없어 어려운 주제로 평가된다. 함경북도 회령 시장에 대한 연구를 하시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는가.
“북한 주민 생활에서 이제는 시장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고 판단했다. 이에 시장을 연구하면 북한 주민의 현재의 삶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회령 시장을 연구하게 된 이유는 현재 한국에 정착된 탈북자 중 회령 출신이 많은 점도 심층적인 분석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던 계기가 됐다.
또한 북한 시장 연구에서 중국과 맞닿아 있는 국경지역부터 시작해 내륙 지방으로 확대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하다 보면 시장 간의 유통과 상호작용 등 북한 시장경제 시스템을 이해하고 밝혀내는 데 유용하게 작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회령 시장에 대한 조사를 위해 탈북자 300여 명과 면접 조사를 진행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도 일각에선 탈북자들의 신뢰성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북한이 폐쇄적이지 않다면 직접 가서 리서치를 해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탈북자들의 경험을 통해 시장에 다가가는 방법이 최선이라고 봤다. 또한 10명 정도의 탈북자들을 모아놓고 인터뷰를 한 적도 있다. ‘신뢰성’ 확보를 위한 것이었다. ‘구글 어스’를 통해 확보한 지도를 펼쳐놓고 회령 시장에 대한 공간적 실태를 밝히는 부분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다만 처음에 언급한 것처럼 부족한 부분은 있을 것이다. 부족한 부분을 지적하고 함께 이야기할 수 있다면 수용해 나가도록 할 것이다.”
-북한에 시장이 형성되면서 시장과 국영기업소가 여러 형태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 회령시 국영기업 공장기업소가 생산하는 30% 정도의 물품이 시장으로 흘러들어가 판매 금액이 자체(국영기업소) 이익으로 된다고 보고 있다. 또한 중국과의 합영 기업들은 북한 시장에 판매를 목적으로 설립된 것이다. 특히 담배, 술, 두부, 가구 등을 만드는 가내 수공업자들이 굉장히 많이 형성돼 생산과 소비가 함께 이뤄지고 있다.
북한이 인위적으로 식량과 생활필수품을 철저히 공급했었는데 국가배급시스템이 붕괴되면서 자생적으로 생존전략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북한 주민들이 모두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어 당국의 시장을 폐쇄해도 다른 곳에서 시장 거래가 이뤄지고 있는 만큼 ‘시장화’는 막을 수 없는 현상이 됐다.”
-시장이 네트워크 형성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다 보니 ‘정보교류’가 활발해지는 현상도 나오고 있다.
“시장에서 상인들이 나눌 수 있는 정보는 김정은 가계에 대한 것 빼고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특히 남한에 대한 정보를 당국에서 철저하게 차단하려고 노력하지만 이런 문화를 먼저 접하고 확산시키는 사람들이 상류층이기 때문에 단속을 하기도 쉽지 않은 경우도 많다.
남한 드라마 같은 경우에도 간부들이 단속을 하는 보안원들을 매수한 상황에서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중앙에서 직접 내려오지 않고서야 발각이 쉽지 않다. 이런 정보 교류나 단속도 ‘뇌물’이 성행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 뇌물이 주민들 사이에서는 일종의 ‘거래 비용으로 여겨지고 있다.”
-시장화를 촉진하는 데 있어 ‘핸드폰(손전화)’ 보급 확대가 미치는 영향이 작다고 볼 수 없을 것 같다.
“집 전화만 있었을 때에는 시장 활동에 있어 불편함이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핸드폰 활성화로 교류가 용이해져 물품 가격뿐만 아니라 환율까지 각 지역 상황을 파악할 수 있게 됐다. 핸드폰이 북한 시장을 하나로 연결해주는 네트워크 도구가 됐다는 것으로 예전에는 불가능했던 것들이 이제는 현실이 되는 것이다.
예로 가내 수공업의 발전과 교통수단의 활성화와 함께 전화를 통해 택배식으로 물건을 받는 현상이 늘어났다는 점이다. 또한 식당에 전화를 해서 뷔페식으로 음식을 시켜먹기도 하고, 몸이 아파 의사를 부르는 것도 시장에 전화를 하면 되는 식이다. 이런 점에서 북한 시장에서는 ‘고양이 뿔만 빼고 다 살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김정은 체제가 ‘6·28 방침’으로 불리는 새로운 경제개선조치 등 ‘인민생활 향상’에 대한 여러 가지 시도를 하고 있다.
“최근 김정은의 움직임에서 북한식 사회주의 계획경제는 실패했다는 점을 스스로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정은은 계획경제로는 북한 경제 발전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알고 있어 경제특구에서는 시장경제를 도입해 보고, 비특구 지역에서는 지금처럼 통제 아래 자연스럽게 시장 경제로 이행되는 방안을 시도할 것으로 보인다.
결국 김정은은 철저히 자신의 계획에 따라 경제발전과 성장을 위한 방안을 총동원하고 있다고 봐야 하는데, 이는 아주 고무적인 일이다. 이런 움직임이 지속된다면 시장화가 크게 진전될 것이고 생산 중심의 시장화도 꿈꿔볼 수 있을 것이다. 김정은은 ‘사상이념을 벗어난 경제성장’, 그것만이 정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하고, 우리(남한 정부)도 그런 북한을 도와줄 전략을 제대로 준비해 나가야 할 것이다.”
-회령 시장만이 아니라 앞으로 연구해야 할 지역이 많다. 향후 연구 계획이 있다면.
“북한 시장을 연구하면서 중국 동북 3성의 시장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렇게 네트워크를 형성하다 보면 북한의 시장이 글로벌화라는 영향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는데, 점진적으로 중국의 시장화를 닮아 갈 가능성도 연구해 보고 싶다.
또한 김정은 시대에서 시장화 제도의 변화 가능성도 중요한 연구 과제라고 본다. 시장 개혁 가능성을 주시하면서 어떤 제도적 변화를 할 수 있는지, 체제 붕괴를 방지하면서도 점진적인 북한만의 독특한 방법을 상정해 놓고 그에 따라 연구를 진행하겠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