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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가족협의회 홍보대사로 활동하면서 참여정부 5년 간 북한에서 살아야 할 사람들이 남한에 많이 살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납북자 문제를 북한에 강력하게 요구하지도 못하고 북한이 할 변명을 대신하고 있는 사람들 많이 봤죠.”
‘난 남자다’의 가수 이광필은 얼마 전부터 납북자 문제 해결을 위해 발 벗고 뛰고 있다. 자신의 고등학교 동창인 이재환 씨가 북한에 납치된 사실을 알게 된 이후 그는 최근에는 자신의 3집 앨범에 ‘친구’라는 노래를 담아 납북자 문제를 세상에 알리고 있다.
MIT 박사과정에 있다가 87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납북된 ‘이재환’은 가수 이광필의 숭문고등학교 재학시절 2,3학년 같은 반 친구였다. 자신의 친구가 납북되었다는 소식을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보면서 그는 처음에는 ‘그래도 살아있다면 언젠가 만나겠지’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던 중 2001년 북측 적십자가 통보한 친구의 사망소식을 듣고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는 게 그의 고백이다. 지금은 누구 보다 납북자 문제 해결을 위해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있는 이광필 씨를 7일 그가 경영하고 있는 서울 신촌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이 씨는 지난 해 말에 40여 일간 정부기관을 돌며 벌인 납북자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차량시위’를 벌였다. 지난 달 27일에는 일본 ‘납북자 송환을 위한 국민 대집회’에서 일본인 납치자를 그리는 ‘메구미’라는 노래를 불렀을 당시를 회상하며 “(한국과 일본의) 납북자에 대한 관심의 정도가 너무 다르다는 걸 느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특히 납북자의 가족들이 단상 위에 앉고 관방장관을 비롯한 의원들이 단상 아래에 참석한 것도 그렇고 자신이 일본어로 바꿔 부른 노래 ‘메구미’를 듣고 눈시울을 적시는 많은 참석자들이 한국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는 것.
납북자 문제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인식차를 직접 목격한 이 씨는 더 많은 활동과 노력을 다짐했다. 그는 “처음에 자진 월북이라는 얘기도 나왔던 친구의 납북과 죽음에 대해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을 하고, 정말 죽었다면 유해라도 돌려받아야 한다”며 가을에는 그가 부른 ‘친구’의 제목을 ‘이재환’으로 바꿔 리메이크 할 계획도 밝혔다.
[다음은 가수 이광필 씨와의 인터뷰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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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집 ‘MISSING’에서 ‘친구’라는 노래가 실제 고등학교 동창인 이재환 씨를 그리워해서 만든 곡으로 알고 있는데, 친구와 노래에 대한 얘기를 좀 해달라.
“재환이는 숭문고등학교 2,3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절친했던 친구다. 그 친구는 MIT에 갈 만큼 공부를 잘하는 모범생이었고 나는 그렇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재환이와는 친했다. 87년도에 납북 보도를 보고 너무 놀랐다. 그 때는 나도 외국에 있을 때였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납치돼 북으로 갔다는 수사결과가 나중에 나왔다. 처음에는 살아만 있으면 언제든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99년에 재환이가 탈북하려다 붙잡혀 정치범수용소에 갔다는 소식을 국정원을 통해 들었다. 재환이 여동생이 전단지 뿌리는 안타까운 모습을 봤다. 언젠가는 친구를 위해 뭐든 하겠다는 생각을 그 때 하게 됐다. 2000년 정상회담 후에 이산가족 생사확인 과정에서 2001년에 북측 적십자에서 ‘이재환 사망’을 통보해왔다. 재환이 어머니가 울부짖는 모습을 보면서 무척 가슴이 아팠다.
죽었다면 유해라도 송환해야 하는데 그런 이야기가 없었다. 그 후에 하게 된 납북자가족협의회 활동 중에 내가 가수니깐 납북자와 관련한 노래를 한 번 만들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해왔다. 그래서 만든 노래가 ‘친구’다. 재환이와 고등학교를 같이 다니던 때를 생각해 7080의 감수성으로 포크송을 만들었다.”
-작년에 이와 관련해 차량시위를 벌인 걸로 알고 있다.
“석환(이재환의 동생)이하고 의논해서 자동차 시위 시작했다. 국정원과 청와대 앞까지 가봤다. 권력기관이라는 곳은 다 돌았다. 납북됐을 당시 처음에는 자진 월북이란 얘기도 있었다. 당시도 그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친구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납북자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그런 기획을 하게 됐다. UCC도 만들어서 포털 사이트에 올렸다. 11월 20일부터 12월 31일까지 40여 일간 했다.”
-납북자가족협의회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봉사활동도 열심히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2004년 8월 4일부터 해외에 있는 해외에 입양된 분들이 한국에서 하는 행사가 있었다. 그 분들이 오랜만에 고국에 오는데 잊지 못할 선물을 하고 싶어서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앨범을 내서 드리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낸 것이 1집 앨범 백야(白夜)다. 아리랑이라는 곡을 스위스, 벨기에, 덴마크 입양인들 3명과 합창했다. 사실 그게 가수가 된 동기가 됐다.
예전에 언론에 보도된 적이 있는 사지절단 장애우를 12년 간 후원하고 있다. 단순히 돈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친구와 전화통화도 학고 상담도 한다. 현재 그 친구가 대학에 다니고 있다. 사제가 되기 위해 카톨릭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그 친구 바람처럼 훌륭한 사제가 되면 좋겠다.
납북자가족협의회 활동도 기억이 많이 남는 활동이다. 활동하면서 보니까 참여정부 5년 간 북한에서 살아야 할 사람들이 남한에 많이 살고 있더라. 납북자 문제를 북한에 강력하게 요구하지도 못하고 북한이 할 변명을 대신하고 있는 사람들 많이 봤다. 나도 친구를 잃어서 마음이 아프지만 납북자 가족 분들도 아픔이 많은 분들이다. 그런 분들한테 ‘자진 월북’이라고 할 수는 없는 거다.”
-27일 일본 ‘납북자 송환을 위한 국민 대집회’에서 ‘메구미’를 일본어로 불렀다. 당시 상황이나 분위기를 자세히 좀 듣고 싶다.
“사실 일본을 처음 가보는 거였다. (납북자들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인가 보고 싶었다. 납북자 가족들을 단상에 앉혀놓고 그 밑에는 의원들과 관방장관까지 왔더라. 관심의 정도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내가 한국말로 부른 ‘메구미’가 실내에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일본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힘이 들었다. 한국에서 고쳐서 외워간 것을 현지에 도착해서 한 번 더 수정했다. 내가 노래를 하는데 메구미 부모님이 눈물을 흘렸고,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사회자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울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좀 의아했다. 한국 가수가 일본어로 ‘메구미’를 부르는 것에 감동적이었을 것이다. 직설적인 가사도 일조했다고 본다.”
-좀 다른 이야기로 옮겨가서 요즘 저작권을 강화하는 추세에 있는데 이광필씨는 홈페이지에서 발매한 앨범의 듣기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이러면 앨범 판매에 차질이 생기지 않나?
“어치피 돈 벌 생각하고 한 거 아니다. 이런 앨범이 더 이상 나오지 않고 이런 노래가 더 이상 불려지지 않는 날이 오기를 바라면서 퍼트리려고 했다. 그래서 작사는 내가 했지만 곡 쓰신 분들과도 협의해서 그냥 들을 수 있게 했다. 처음에 낸 앨범도 그렇고 이번에 낸 3집도 그렇고 많이들 듣고 문제의식을 같이 하면 좋겠다. 2집만 약간 상업성이 가미돼 있다.”
-가수이면서 사업가이기도 하고 사회 활동도 활발히 하는데 자신은 스스로를 어떻게 보는가?
“나는 내가 ‘가수 이광필’이라고 생각한다. 또 그렇게 사람들 기억에 남고 싶다. 나중에 ‘가수 이광필이 어떤 가수였다’, ‘어떤 노래를 불렀다’로 평가받고 싶다.
사회 활동과 관련해서는 다른 연예인들이 하지 않으려고 하니까 괜히 내가 좀 특별한 것처럼 보이는 거다. 연예인들이 가치 판단에 있어 지조의 개념이 너무 눈치코치다. 본인들이 손해날 짓은 절대 안한다. 나라고 다른 건 아니지만 문화적 컨텐츠를 바르게 가자는 생각에서 하는 활동들이다.”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활동 계획에 대해서 밝혀달라.
“친구 때문에 너무 가슴이 아파서 지워지지가 않는다. 그렇다고 북한 전부를 미워하는 건 아니다. 북한 주민들은 도와야 한다. 300만이 죽었다는 얘기도 이해가 안 되는데 또 기근이란다. 우리가 도와줄 건 도와주고 북한은 납북자 송환해주면 된다.
지금도 재환이 어머님하고 전화통화를 한다. 재환이 유해를 송환해주지 않는 거 보면 어디엔가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지금껏 견뎌오다가 얼마 전에 (이재환 씨의) 사망신고를 하셨다고 전화가 왔다. 내가 이 정도 아프면 부모님은 정말 오죽하겠는가.
가을에 ‘친구’를 깨끗한 창법으로 다시 불러서 ‘이재환’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낼 계획이다. 재환이 같은 친구와 재환이 가족 같은 가족이 다시 생기지 않기를 바라며 열심히 노래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