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곽드러낸 노대통령 4단계 통일방안

“독일식 급속한 붕괴 원치않아”…‘통일 밑그림’ 제시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4박5일간의 독일 국빈방문기간에 초보적 수준이지만 나름의 통일 방안을 제시해 주목된다.

물론 특단의 ‘베를린 선언’이나 참여정부의 체계화된 통일정책이라고 말할 정도는 아니지만 평소에 갖고 있던 남북관계 및 통일에 대한 철학을 체계적으로 정리, 자신만의 통일관을 펼쳐보였다는 점에서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노 대통령의 통일 방안은 분단과 통일의 역사적 현장인 베를린에서 독일 지도자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조금씩 윤곽을 드러냈고, 두번째 방문지인 프랑크푸르트 동포간담회에서 보다 상세한 그림을 그려냈다.

◇“한반도 통일은 예측가능한 프로세스 거쳐야” 14일 새벽(이하 한국시간) 숙소인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열린 동포간담회에서 노 대통령은 급속한 붕괴과정을 거쳤던 독일과는 다른 통일방식을 선호한다는 점을 분명히했다.

독일은 급작스럽게 들이닥친 페레스트로이카(개혁). 글라스노스트(개방)의 물결 여파로 급속한 붕괴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비용이 많이 들었고 엄청난 후유증을 겪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노 대통령은 연설에서 “북한은 갑작스럽게 붕괴할 가능성이 매우 낮고 한국 정부는 그런 것을 조장할 생각이 없고, 여야(與野)도 마찬가지”라고 강조했다.

아직까지 우리가 북한을 감당할 만큼 견고한 경제구조를 갖추지 못하고 있는 만큼 북한 경제를 우리와 비슷한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선 경제협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짚은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또한 노 대통령은 “한반도 통일은 예측 가능한 프로세스를 거쳐서 매우 안정된 절차로 진행돼야 한다”점을 역설했다.

나아가 “설사 북한에서 어떤 사태가 있더라도 북한 내부에서 상황을 통제해갈 만한 내부 조직적 역량이 있다고 본다”고까지 말했다.

한국은 김정일(金正日) 체제의 붕괴나 체제변환을 절대 원치 않고 있으며, 설사 그런 조짐이 있더라도 북한 내부의 역량으로 이를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4단계 통일방안 내용 그러면서 노 대통령은 “한반도 통일의 경우 천천히 준비해 먼저 평화구조를 정착시키고 그 토대위에 교류협력을 통해 관계를 발전시키고, 북한도 통일을 감당할 만한 역량이 성숙되면 국가연합 단계를 거쳐 통일되면 좋을 것”이라고 구체적인 단계를 제시했다.

이른바 평화구조 정착→교류협력 강화통한 남북관계 발전→국가연합 단계→통일 등 4단계의 통일방안을 제시한 셈이다.

다만 노 대통령은 평화구조 정착을 위해선 북한의 핵문제가 최우선으로 해결돼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북한이 6자회담이라는 다자(多者) 대화의 틀로 조속히 복귀해 모든 것을 논의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독일 유력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자이퉁(FAZ)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의 태도 변화를 강도높게 촉구한 것도 이런 흐름과 맞물려 있다.

다만 과거와 달라진게 있다면 북한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살얼음위를 걷듯 조심스럽게만 접근해왔던 것과는 달리 북한에 대해서도 ‘할 말은 하겠다’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한 점이라고 볼 수 있다.

노 대통령은 지난 10일 베를린에 도착해 첫 공식 일정인 동포간담회에서부터 남북문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했다.

“때로는 남북관계에서 쓴소리도 하고, 얼굴 붉힐 때는 붉혀야 한다”며 분명한 입장을 천명했고, 북한의 핵포기가 전제되지 않고선 우리도 일방적으로 끌려다닐 수만은 없다는 ‘상호주의 원칙’도 강조했다.

이 때문에 대북 포용정책을 골간으로 한 노 대통령의 대북 기조가 바뀌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한때 제기됐다.

그러나 정부 당국자들은 “대북 정책기조가 바뀐 것은 아니다”고 부인했다. 실제 노 대통령의 이날 발언 이후 우리 정부의 정책기조에 변화가 초래되는 조짐은 전혀 감지되지 않고 있다.

◇북한, 중국.베트남식 개방 바람직 노 대통령은 북한이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기존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개혁.개방의 길로 나서는게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거듭 확인했다.

북한이 진정 개혁.개방의 길로 나설 의향이 있다면 얼마든지 지원할 용의도 있다는 점도 확실히했다.

다만 “북핵이 해결돼야 대북지원이 가능하다”는 이른바 ‘선(先) 북핵해결, 후(後) 대북지원‘ 원칙은 고수했다.

노 대통령은 12일 드 메지에르 전 동독 총리 등 독일 통일관련 인사들을 접견한 자리에서 “북핵문제가 해결되어야 지원이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같은 날 독일 제1야당 기민당의 앙겔라 메르켈 당수를 만난 자리에서는 “한국민들은 통일 이전에라도 북한의 개혁, 개방을 위해서 부담해야할 비용이 부담스럽더라도 감당하는데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인 남북한의 통일에 대한 강력한 염원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11일 볼프강 티어제 독일연방 하원의장을 만난 자리에서는 “독일의 통일은 20년전부터 예측됐지만 정작 한달 전에는 아무도 예측을 못했다”며 “역사의 진보는 이처럼 구체적인 과정은 예측하지 못하지만 멀리 내다보면 궁극적으론 갈 곳으로 간다는 것을 보여주는게 아니냐”고 반문했다.

노 대통령은 이런 문제가 해결되면 남북한이 ‘국가연합’ 단계를 거쳐 자연스럽게 통일로 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 확신을 드러냈다.

이와 관련, 남북은 지난 2000년 6월15일 정상회담을 통해 한국의 ’연합제’안과 북한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에 대해 공통점이 있다고 인정, 이런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하겠다고 선언했지만 그후 남북한간에 통일방안에 대한 논의가 전혀 진전되지 않고 있다.

결국 노 대통령은 독일의 통일을 가치있는 것으로 평가하지만 엄청난 통일비용 등 진통이 적지않았던 점을 감안, 단계적 접근을 통해 ‘한국식‘ 통일을 이뤄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연합

소셜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