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중위 장선생’ 한맺힌 조국 귀환기

▲ 국군포로 장선생씨가 중국에서 동생에게 쓴 편지

6월 초순, 재미 인권운동가 故 남재중 박사님의 추모기도회를 마치고, 무거운 마음으로 사무실로 돌아오던 그때, 중국으로부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몇해 전 탈북을 시도했다가 북송되어 고초를 겪었던 국군포로를 도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분의 성함은 장선생. 6.25 전쟁 당시 중위로 복무하다가 전쟁포로가 됐다. 현재 남한에 있는 가족들의 사정도 여의치 않고 중국 내 브로커와의 문제로 아주 어려운 상태에 처해 있다고 했다. 더구나 우리가 도와야 할 대상은 대한민국 육군 장교 출신이었다.

자초지종을 상세히 전달 받은 후, 우리 <피랍탈북인권연대>의 개입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우리가 도와야 할 분은 조국을 위해 청춘과 목숨을 바친 국군포로다. 또한, 그 분은 94년 조창호 소위 입국 이후 최고위급 육군 장교 출신이다. 더 이상 위험한 상황에 그냥 방치할 수 없다는 생각에, 즉각적이고도 구체적인 구명작업에 돌입하였다.

1차적으로 중국 내 브로커와 국내 브로커, 그리고 남한 가족간에 있었던 그간의 사정을 살피는 것이 급선무였다. 먼저 국내에 있는 가족을 먼저 만나 지금까지의 과정을 들어보기로 했다.

우선 전화로 연락을 취했으나 가족들의 반응이 냉담했다.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평소 국군포로 구명활동을 하면서 수많은 가족들을 만났으나, 이와 같은 반응은 처음이어서 적잖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입국 과정에서 가장 큰 문제가 여기서 발생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다음날 곧바로 국내 가족들을 면담했다.

가족들, 중국 내 브로커들에 시달려

서울 성내동의 골목길에 접어들었다. 오래된 건물들 사이로 사진에서 본 국군포로 장선생님과 꼭 닮은 어르신 한분이 우리를 맞았다.

독실한 천주교 집안이신 그분들과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그동안 국내외 브로커들로 하여금 말 못할 정신적, 물질적 고통을 받았다고 했다. 모든 것이 의심스럽고 탐탁지 않은 상황임을 피부로 느낄 수가 있었다.

국군포로들의 구명에는 국군포로 당사자와 남한 내 가족, 그리고 지원단체가 굳건한 신뢰감 속에 한마음이 되어야 모든 것이 무사히 마무리될 수 있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가족들에게 작은 신뢰감이라도 나눌 수 있도록 노력했지만, 가족들의 상처와 불신의 골은 생각보다 너무 컸다. 가족들의 싸늘한 시선을 뒤로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이틀 후 가족들에게 마지막으로 연락을 취했다. 이번 장선생님 입국 문제는 대한민국의 국가 존립과 관련된 중대한 사안이니만큼, 가족들이 나설 수 없다면 저희 단체를 중심으로 송환노력을 다하겠다고 했다. 그 통화를 끝으로 국내 가족들과의 연락은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중국 내 브로커로부터 안전하게 장선생님을 인계받는 것. 이것은 한국정부에게 인계하는 작업보다 몇 배나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는 많은 자금과 중국공안의 추적, 브로커의 농간 등 넘어야 할 산들이 많기 때문이다.

국군포로 송환자금 마련, NGO에게는 너무 어려운 난관

가장 먼저 송환자금을 확보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송환자금만 마련되면 우리가 우위를 점한 가운데 브로커들과 협상이 가능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요즘 ,북한인권단체들은 말 그대로 수백만의 아사자가 나왔다는 90년대 중반 북한의 ‘고난의 행군’을 똑같이 겪고 있다. 북한인권단체의 활동을 결코 달가워하지 않는 현 정부에서 북한인권운동이란 고난을 자처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무실 임대료에 쩔쩔매는 상황에서 수천만 원을 마련한다는 것은 나무에서 고기를 구하는 격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평소 친분이 있는 지역 어르신으로부터 구명비용을 차용할 수 있었는데, 모든 것이 감사하고 하느님의 귀하신 은혜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다음 순서는 우리 조직이 장선생님을 인계받는 일이다. 자금이 송금되고 신변을 인계받는 것은 큰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이후 혹시 있을지 모르는 브로커들의 추적, 그리고 중국 공안의 급습, 이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중국 내 악덕브로커들은 국군포로를 인계할 때 돈을 챙기고, 인계 이후 뒤를 밟아 소재를 파악한 다음, 중국 공안(또는 사조직)이 안가를 급습하여 인질로 잡은 후 재협상을 요구, 또다시 금품을 요구하는 일도 실제로 있기 때문에 여기에 모든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몇 번이나 차를 갈아타고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추적을 피해 안전한 피신처로 장선생님을 모셨다는 연락을 받은 것이 6월 말, 남북장관급회담에서 국군포로, 납북자 송환 협상이라는 기대할만한 합의가 이루어진 이후였다. 최초 연락 이후 근 1개월 만에 안전한 상황이 마련된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가장 빠른 시일 내에 안전한 방법으로 대한민국 정부에게 장선생님을 인계하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피를 말렸던 긴 귀환 여정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게 된다. 또한, 이번 사건을 계기로 국군포로 송환활동에 큰 전환점을 마련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풍까지 겹쳐 건강 최악

그날 이후 한국정부와 관계부서는 긴박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중국 브로커에게서 인계받은 장선생님의 건강 상태가 너무나 좋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몇 해 전 중풍을 맞았으나 치료 한번 받아보지 못한 처지였다. 게다가 1953년 포로 당시 폭탄 파편에 관통상을 입은 다리의 후유증으로 제대로 걷지도 못하였다.

24시간 도움을 주는 사람이 옆에 있어야 하는 여건에서, 중국 내 활동가들과 한국에서 초조하게 상황전개를 지켜보고 있던 나로서는 여간 곤욕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하루하루가 긴장 그 자체였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으리라.

7월 7일 오전. 약속 시간을 지키기 위해 장선생님을 모시고 있던 안가에서는 비상이 걸렸다. 장선생님도 긴장이 되셨는지 그날따라 음식을 제대로 드시지 못하고 혼자서 일어서지도 못하셨다.

협조자의 등에 업힌 채로 약속장소로 가셨다는 연락 이후, 몇 시간이 흘렀다. 안전하게 영사관으로 가셨다는 연락을 받고서야 긴 한숨과 함께 모처럼 편한 마음으로 사무실 의자에 기대어 보았다. 모든 것이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었다.

몇일 전 국군포로, 납북자 송환을 다루는 남북적십자 회담이 개최됐다. 북한 회담 관계자들에게 이번 장선생 입국과 그의 건강상태를 알려서 북한에 있는 국군포로의 인도적 처우와 송환을 요구할 필요도 있었다고 본다.

협상전략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라도 북한당국에게 그들이 저지른 반인륜적 범죄행위의 산 증인인 팔순 노병의 초췌한 모습을 확인시켜줄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국군포로에게 조국은 무엇인가?

공은 우리정부로 넘어갔다. 대한민국 정부가 진정 국민의 정부인지 확인하는 것은 장선생님의 입국에서부터 확연히 드러났다.

대한민국 육군 장교는 죄인마냥 뒷꽁무니로 숨어서 27일 대한민국 땅을 밟았다. 대한민국의 살아있는 양심들과 국군포로, 납북자들의 즉각 송환을 바라는 모든 국민들의 열렬한 환영속에, 우리의 노병은 당당하고도 자랑스럽게 조국의 부름을 받아 싸웠고, 조국이 그리워 죽지 않고 살아서 이렇게 돌아왔노라고 말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다시 한번 그들을 외면했고, 다시 찾은 조국이 그들을 그다지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인상만 심어 주었다. 마치 죄인처럼 쉬쉬하며 그들을 맞았다.

과연 국군포로들이 몸바쳐 싸운 조국은 이들에게 무엇이란 말인가?

북한주민들이 독재 권력으로부터 해방되는 그날, 북한인권을 외면했던 비열한 회색주의자들과 역사의 반동들이 북한주민의 심판대에 오르는 그날, 우리 모두는 조국을 위해 청춘과 생애를 바친 국군포로 당사자들과 유족들로부터 증오의 철퇴를 피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도희윤/피랍∙탈북인권연대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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