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권자들은 이 낡은 ‘시네마 폴리티카’를 걷어차버려라

제18대 대통령선거가 한 달 여 남았다.


문재인·안철수의 후보 단일화 합의로 또다시 한국의 선거민주주의 가치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고, 민주주의는 정당정치를 통해 발전하며, 후보들은 정책을 내놓고 유권자들의 이성과 합리적 기준에 기반하여 심판받는다. 이것이 민주주의 선거의 교과서이다.


우리의 대통령선거는 한 번도 교과서대로 되어본 적이 없다. 1987년 노태우는 ‘중간평가론’으로 YS, DJ를 제치고 당선되었다. 이후 YS는 3당 합당, DJ는 DJP 연합, 노무현은 정몽준과 단일화로 당선되었다. 이회창은 ‘아들 병역비리’라는 김대업의 사기행각에 말려들어 대통령 후보로서 무슨 정책을 내놓았는지 기억도 없다. 이명박 대 정동영의 17대 선거는, 사실상 개표 전에 그 결과가 예측되었지만, 지금도 실체적 진실이 아리송한 ‘BBK’ 문제로 선거 전날까지 치고받았다.


이번 18대 대통령선거도 매우 특이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한 12월 19일 당선자의 성(姓)은 박· 문 ·안 중 하나가 될 것이다. 하지만 1987년 이후 25년이 지난 지금도, 영화 속의 주연들만 바뀌었을 뿐, 그 옛날 ‘단일화’라는 제목의 낡은 필름이  계속 상영되고 있다.   


이 때문에 11월 24일 이후 누구로 단일화 되느냐, 12월 19일 자정 무렵 대통령 당선자가 누구냐에, 대한민국 모든 유권자들의 시야(視野)가 완전히 묶여져 있다. 이것은 과거 전체주의 사회에서나 있었던 ‘극장식 정치(cinema politika)’의 전형이다. 소수의 정치꾼들이 대중들의 시야(視野)를 특정 대목에 묶어놓고 다른 곳을 전혀 못 보도록 하는 것이다. 극장에 들어가면 불이 다 꺼지고 관객들은 오로지 화면만 볼 수 있다. 정책검증도 필요 없고 인물검증도 필요 없으니, 무식한 대중들은 그저 ‘단일화 화면’만 보면서 따라오라는 이야기다.


대한민국이 전체주의 사회가 아님은 명백하다. 그런데도 정치꾼들이 하는 짓을 보면 “유권자들은 언제나 우리 뜻대로 구워삶을 수 있다”는 전제 아래 국민들을 바보로 아는 대중동원, 정치프로파간다식 선거의식이 저 밑바탕에 깔려 있다. 민주주의 선거 교과서 공부는 안 하고, ‘빨간책’부터 먼저 보는 불량학생과 하등 다를 바 없는 행태를 계속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다수 대중은 ‘객관적으로 볼 때’ 자신이 정치적으로 속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다. 그저 다중(多衆)들 속에 묻혀서 ‘이번에 단일화하면 누가 될까?’라며, 주어진 상황에 피동적으로 따라갈 뿐이다. 다중들의 사회적 의식은 그렇게 해서 소수의 정치꾼들에 의해 ‘팔려가는’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 유권자들의 시야가 11월 24일 이후, 또는 12월 19일 자정 무렵에 꽂혀 있어서는 안 된다. 하루 빨리 ‘2013∼2018년’으로 시야가 넓고 길게 이동해야 한다. ‘2013∼2018년’ 기간 동안 누가, 어떻게 하면 대한민국을 잘 이끌어갈 수 있겠느냐로 유권자들의 관심이 모아져야 한다.


중국공산당은 제18차 당대회를 하면서 “2020년에 전면적인 샤오캉(小康)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목표를 제시했다. 그때까지 중산층을 대거 늘여보겠다는 뜻이다. 2020년이라고 해도 불과 8년 남았다. 국가목표를 단위로 할 때, 특히 인구 14억의 중국과 같은 경우, 8년은 단기 목표 정도에 해당한다.


하지만 제18대 대한민국 대통령선거는 ‘2013∼2018년’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고 ‘정권 따먹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이래서는 희망이 없다.


우리사회는 앞으로 4, 5년 동안 혹독한 기간을 거치게 될  것으로 본다. 경제는 저성장이 아니라 제로 성장, 마이너스 성장으로 떨어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 경제가 나빠지면 없는 사람, 서민부터 고생이다. 경제가 침체하면 불법·탈법이 늘어나게 되어 있고 치안이 불안해진다. 여기에 가계부채, 부동산 붕괴, 복지비용 증가, 기업 해외 이전, 자본이탈 등등이 만약 좋지 않은 방향으로 순환될 경우, 우리사회의 미래는 불투명해진다.


대한민국을 둘러싼 외교·안보 환경은 우리가 능동적으로 대비하기도 전에 이미 그 중심축이 변화(shift change)하였다.


어떤 전문가(?)는 “우리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양다리 외교’를 잘 하면 국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런 사람도 ‘전문가’라고 하니 할 말이 없다. 국제관계를 움직이는 기본은 힘(군사력)과 돈(경제력)이지, 싸이의 말춤이 아니다. 소프트 파워는 힘과 돈의 토대 위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우리가 경제력, 군사력에서 미 중 일 러보다 객관적으로 우위에 있거나, 계속 유리해질 것으로 믿는 구석이 어디 한군데라도 있는가?  없다. 나라는 분단되어 있고, 우리는 북한정권에게 한쪽 다리가 묶인 상태에서 마라톤과 철인 3종 경기를 뛰고 있다. 이것이 있는 그대로 우리의 모습이며, 그나마 이같은 상황에서 믿을 만한 친구로 미국을 택하고 있고, 중국과는 이해관계와 협력의 폭을 넓혀가고 있을 뿐이다.


G2 시대의 개막을 알린 2011년 1월 미중 정상회담에서 양국은 41개항에 합의하였다. 41개항은 국제관계의 냉정한 맨얼굴과 한국의 초라한 외교적 모습이 다큐멘터리 필름처럼 그대로 담겨있다.


41개항 중 한반도 관련 조항이 6개항 있었지만 우리에게 유리한 조항은 하나도 없다. 대한민국 장병 48명이 사망한 천안함, 연평도 사건이 이름도 없는 ‘최근 사건들(recent developments)’로 표현되었다. “천안함 연평도 사건을 북한의 군사도발로 규정한다”라는 내용도 없고, 도발의 주체가 누구인지도 불분명하다. ‘한반도 비핵화가 중요하다’ ‘북한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우려한다’는 표현이 들어갔을 뿐이다. 이것이 현재 동아시아에서 대한민국이 위치한 외교적 모습이다.


21세기가 아시아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미국은 ‘아시아 회귀’를 하고 있고, 중국의 힘은 커졌다. 지구촌 식구들을 먹여 살릴 신성장 동력도 아시아에서 시작될 것이다. 드디어 아시아에 세계사의 변화를 주도하는 장(場)이 서고 있는 것이다. 미 중 일 러는 아시아 시대의 개막을 알리면서 그 첫인사(?)를 영토분쟁으로 시작하였다. 영토분쟁은 결말이 나지 않는 게임이다. 이 분쟁은 한없이 굴러갈 것이다. 그러면서 아시아에 다이내믹한 변화가 전개될 것이다.


이와 같은 변화는 대한민국에게 외교·안보·통일 분야에서 어떤 전략을 택할 것이냐를 명백히 묻고 있다. 그럼에도 이번 18대 대통령선거에서 외교안보통일은 유권자들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앞으로 몇 주 동안, 이 중요한 시기에 유권자들은 ‘문철수 극장’에서 상영되는 그 옛날 화면에 비가 오는 3류 국산영화 ‘단일화’를 또 봐야 한다.


아시아 시대를 맞이하면 대한민국에게 무조건 유리한가? 그렇지 않다. 그 답은 간명하다. 대한민국이 외교안보통일 분야에서 다가올 변화를 능동적으로 준비하고 변화의 큰 흐름에 주도적으로 올라타면 유리해질 것이고, 지금처럼 전혀 준비하지 못하고 불과 ‘향후 10년을 어떻게 할 것이냐’에 대한 물음에도 준비되어 있지 못하면, 또다시 ‘분단된 아시아의 변방국가’로 추락하게 될 것이다. 산이 높으면 계곡이 깊듯이 추락의 깊이도 클 것이다.


지금의 미-중 관계는 과거의 미-소 관계와 물론 다르다. 미-소관계의 대립과 갈등의 핵심은 자유민주주의 대 사회주의라는 사상과 이념의 차이였다. 이러한 본원적 갈등 요인으로부터 정치, 군사, 외교, 자원 등 모든 분야에서 이해관계가 충돌하였다. 하지만 지금의 미중관계는 비록 대외군사전략, 인권, 민주화, 자원확보 등에서 갈등의 여지가 있지만 사상과 이념의 차이에서 오는 본원적 대립이 아니다.


현재 중국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신좌파, 자유주의, 중화주의 등의 사상 논쟁이 어떤 결말을 가져올지 뚜렷하진 않지만, 적어도 중국이 마르크스-레닌, 마오주의로의 회귀는 이미 불가능해졌다. 따라서 향후 미-중 관계를 장기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냉전 시기보다는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협력과 동반이, 또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의 갈등과 대립이 교차되면서 진행될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 대한민국에게 요구되는 동아시아 외교적 전략의 게임이 복잡다단해졌다는 뜻이다.


대한민국은 앞으로 이같은 외교적 전략게임을 유리하게 가져가면서, 가능한 한 이른 시간 내에 자유·인권·민주주의·법치·시장의 가치를 한반도 전역으로 확대시키는 성공적인 한반도 통일시대를 열어야 하는 중차대한 시기에 와 있다. 이는 조선조 멸망 후 100여 년 만에 처음 맞는 민족사적 기회와 위기가 공존해있는 시기이다.


따라서 제18 대 대통령선거의 쟁점이 ‘향후 대한민국 10년’으로 모아져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또 선거쟁점이 ‘향후 대한민국 10년’으로 모아져야만 12월 19일 이후 대한민국 사회통합이 가능해진다. 지금 우리사회는 2013년 이후가 훨씬 더 걱정이다.  이번에도 우리가 또 국민통합·사회통합에 실패한다면 대한민국은 정말로 미래가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 유권자들과 언론이 이 낡고 오래된 ‘극장식 정치’와 ‘단일화 영화관’에서 과감히 시선을 거두어버리는 것이 나라를 사랑하는 행위가 될 것이다. 관객이 영화관 표를 사지 않으면 영화도 곧 썰렁해질 것이다. 선거란 유권자들이 후보를 뽑는 것이지, 후보선택을 강요당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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