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북시인 설정식 ‘우정의 서사시’ 남겨

한국전 종군기자 티보 머레이가 헝가리서 출간서울국제문학포럼 참가 앞두고 논문에서 밝혀

월북시인 설정식(薛貞植·1912-1953)이 한국전쟁의 와중에 쓴 장편 서사시가 1952년 12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우정의 서사시’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간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이는 한국전쟁 때 북한에 파견돼 종군기자로 14개월간 활동했고, 휴전협정을 취재했던 헝가리 출신 소설가 티보 머레이(81)가 오는 24-26일 열리는 제2회 서울국제문학포럼에서 발표할 논문을 통해 밝혀졌다.

티보 머레이는 1951-52년 평양과 개성 등을 오가며 한국전쟁 관련 기사를 썼다. 헝가리에 귀국한 뒤 스탈린주의에 반대하며 혁명을 주도했다가 파리로 피신해 현재 파리 헝가리인권연맹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서울국제문학포럼에서 발표할 ’기억과 고통, 의심 그리고 희망’이라는 글에서 “1951년 8월 14일 폭격이 있은 직후 나는 휴전회담이 진행중이던 개성에 도착했다”면서 “그곳에는 북한에서 파견된 두 사람의 통역관이 있었다. 그중 젊은 사람의 이름은 설정식, 내가 알게 된 유일한 한국인 작가 바로 그 사람이다”라고 회고했다.

티보 머레이는 휴전협정 과정에서 북측 통역관이던 설정식과 가까워졌다. 그는 우정을 쌓는 과정에서 설정식이 1950년 12월 심장발작으로 헝가리가 지원한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것을 알았다.

티보 머레이에 따르면, 헝가리 의사는 직업군인이 아니었던 시인 설정식에게 ’글쓰기를 재개하면 어떻겠느냐’고 권유하면서 투병의지를 북돋워 줬다고 한다. 설정식은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헝가리 병원의 정경을 읊은 400행에 이르는 장편 서사시를 탈고했다.

설 시인으로부터 이 작품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티보 머레이는 어렵게 원고를 얻어 중국 언론사 소속으로 개성에서 일하던 공산주의자 기자들 가운데 영어를 할 수 있는 영국인과 호주인 기자에게 번역을 의뢰했다.

티보 머레이는 그렇게 탈고한 영역원고를 헝가리로 보냈고, 그것은 다시 헝가리어로 재번역돼 부다페스트에서 출간된 것이다. 티보 머레이는 이 시집의 서문과 해설을 썼다.

그는 “헝가리 병원에 관한 설정식의 시는 형용사를 능란하게 활용하고 다채로운 이미지의 회화적 묘사를 통해 시적 아름다움을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면서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한편으로는 지나치리만큼 직설적이고 정치적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고 시집을 평가했다.

1952년 10월 북한을 떠나 헝가리로 귀임했던 티보 머레이는 시집을 설정식에게 보냈으나 아무런 답장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이듬해 여름 다시 한국으로 파견돼 휴전협정을 취재했던 그는 평양의 재판정에서 죄수복을 입은 설정식을 봐야했다. 설정식의 죄목은 미제국주의자들을 위한 간첩행위, 테러와살인, 가택침입, 조선인민공화국 정부에 대한 국가 전복기도 등이었다.

이에 대해 티보 머레이는 “개성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난 적이 없는 그가 평양에 있는 정치가들을 무슨 수로 배신한단 말인가. 섬세한 심장을 가진 일개 시인이 개성과 판문점을 오가며 어찌 간 크게 간첩노릇을 할 수 있단 말인가”라며 죄목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면서 “나는 그 재판이 거대한 조작극이었다고 지금도 확신한다. 북한의 독재자 김일성은 그의 동료인 다른 유럽 공산당 지도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가 라이벌이라고 생각한 정적들을 제거했다. 첫 번째 대상이 남쪽 출신의 당간부와 정부 관료였다. 설정식은 조작극의 엑스트라였다”고 적었다.

티보 머레이는 귀국 후 “공산주의를 신봉했고, ’우정의 서사시’라는 시집을 통해 한반도의 평화와 남북통일에 기여하고자 했던” 설정식이 사형당했다는 기사를 읽었다고 한다.

그는 1962년 ’사상계’ 9월호에 기고한 ’한 시인의 추억 설정식의 비극’이라는 글에서도 셰익스피어의 번역자이자 시인이었던 설정식과의 소중한 추억을 공개한 바 있다.

설정식은 함남 단천 출신으로 연희전문과 미국 오하이오주 마운트 유니언 대학, 컬럼비아 대학 등에서 유학한 뒤 귀국해 미군정청 등에서 일하다가 한국전쟁 때 월북했다.

그는 1948년 영자신문 ’서울 타임스’의 편집자로도 활동했으나 좌파적 편집방향때문에 이승만 정권에 탄압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햄릿’ 등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국내에 소개한 번역가이자 세 권의 시집을 발간한 시인으로 활동했다.

한편 부다페스트에서 ’우정의 서사시’라는 시집이 출간된 것에 대해 설정식의 셋째 아들 설희관(58·전 한국일보 총무국장) 시인은 “내가 중학생일때 티보 머레이가 ’사상계’에 기고한 글을 통해 아버지가 시집을 냈다는 것을 알았으나 제목이라든지 구체적 내용은 모르고 있었다”면서 “이번에 방한하면 티보 머레이를 꼭 만나보고 쉽다”고 말했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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