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북시인 설정식씨 유족, 티보 머레이 만나

월북시인 설정식(薛貞植·1912-1953)의 남쪽 자녀들이 헝가리 작가 티보 머레이(81)를 만났다.

24일 개막한 제2회 서울국제문학포럼 참석차 내한한 티보 머레이는 한국전쟁 중이던 1951-52년 평양과 개성 등을 오가며 휴전협상 과정을 취재했던 북측 종군기자 출신. 그는 휴전협상 과정에서 북측 통역관이던 월북시인이자 영문학자 설정식 씨와 각별한 인연을 쌓았다.

그는 1962년 ‘사상계’ 9월호에 기고한 ‘한 시인의 추억 설정식의 비극’이라는 글에서 시인이자 셰익스피어 문학의 번역자로 이름이 났던 설 시인과의 소중한 인연을 공개한 바 있다.

그는 미국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북쪽에서 숙청당한 설 시인의 억울한 죽음을 애달파하면서 설 시인이 남긴 장편시 ‘우정의 서사시’를 헝가리에서 출간하기도 했다.

함남 단천 출신인 설 시인은 연희전문과 미국 오하이오주 마운트 유니언 대학, 컬럼비아 대학 등에서 유학한 뒤 귀국해 미군정청 등에서 일하다 한국전쟁 때 부인과 3남 1녀를 두고 월북했다.

설 시인의 남쪽 자녀들이 지난 22일 숙소인 프라자 호텔로 찾아가 티보 머레이의 가족과 해후했다. 티보 머레이가 휴전협정 취재차 1953년 북한을 2차 방문했을 때 재판정에서 죄수복을 입고 있던 설 시인을 본 지 52년 만에 자손들과 상봉한 것이다.

이날 만남의 자리에는 설 시인의 딸 정혜(64), 둘째 아들 희순(63), 막내아들 희관(58.전 한국일보 총무국장), 문학평론가 김우창 고려대 교수와 그의 부인인 설시인의 조카 설순봉 씨 등이 함께했다.

미국에 사는 큰아들 희한(68) 씨는 참석하지 못했다. 딸 정혜 씨의 아들은 영화 ‘투캅스’에 출연한 인기배우 김보성이다.

시인으로 활동하는 희관 씨는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선친과 티보 머레이 간에 맺은 반세기 전 교분이 대를 이은 인연으로 열매를 맺었다”면서 “하늘나라에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의 오늘 상봉을 봤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나는 오늘 얼굴도 본 적이 없는 선친 대신 헝가리 친구 티보 머레이를 아버지로 모시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고 감격스러워 했다.

그는 “우리들은 그의 얼굴과 눈동자 속에서 선친의 영혼을 찾아냈고, 그는 우리 형제들을 반갑고 뜻깊게 만나면서 반세기 훨씬 전 휴전회담이 열리던 개성에서 문학과 전쟁과 인생을 이야기하던 친구 시인의 분신들을 만난 것”이라며 “친구의 혈육을 남한땅 서울 한복판에서 만나난 81세의 노안에 감개무량한 표정이 역력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티보 머레이는 후손인 우리 형제보다 선친과 관련된 사진과 당시 기사, 자료를 훨씬 많이 간직해오다 이번 방한길에 모두 가져왔다”며 “필요하면 이 모든 것을 복사하고 내가 돌아갈 때 돌려달라고 말했다”고 덧붙였다.

이날 티보 머레이의 부인은 설정식 시인의 사진을 보고 그린 인물화를 가져온 것으로 전해졌다.

희관 씨는 24일 서울국제문학포럼 행사장에서 티보 머레이와 다시 만났고, 28일 가족들과 또 만날 예정이다./연합

소셜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