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북美軍 젠킨스…”北, 한번 들어가면 못나오는 개미지옥”

1965년 1월 5일 새벽. 25살의 미국 육군 중사 찰스 R. 젠킨스는 한반도의 비무장지대 앞에 멈춰 섰다. 월남전에 파견된다는 공포감으로 그는 자신의 운명이 완전히 끝장난 듯한 기분이었다.

젠킨스는 서독에서 동독으로 도망쳤다가 소련을 통해 최종적으로 본국에 송환된 탈주병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북쪽을 통해 소련으로 건너간 다음, 미국으로 가겠다고 결심을 내린 그는 입고 있던 윗 옷으로 총부리를 막고 발걸음을 북한으로 돌렸다.

그러나 잠시 몸을 피하려 했던 북한이라는 나라가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감옥’이었다는 사실을 당시 젠킨스는 전혀 알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묻는다. 대체, 왜 북한으로 넘어갔느냐고.

젠킨스는 20일 한국에서 출판된 수기집 「고백」을 통해 자신은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북한에 애착을 느껴 의도적으로 망명하지도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의 탈주가 절망 속에서 한순간 판단을 그르친 수많은 젊은 병사들의 탈영과 같은 성질의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40여 년 간 지옥 같은 북한에서 몸부림치며 젠킨스는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고 또 돌아봤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부하 병사와 미국 국민, 가족에게 수도 없이 용서를 구했다. 조국을 등진 그의 죄가 크기는 하지만 북한에서의 생활은 그 죗값을 다 치루고 남을 만큼 혹독한 것이었다.

한번의 실수로 택한 북한은 ‘거대한 감옥’

휴전선을 넘자마자 평양으로 압송된 젠킨스는 이 전에 북한으로 넘어갔던 세 명의 미군들과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다.

▲1980년 가을. 신혼 당시. 사진을 찍을 때는 언제나 철조망이 배경에 들어가지 않게 각을 잡느라 고생했다. <사진= 고백>

네 명의 미군들은 북한의 광기에 맞서 싸우는 가장 듬직한 동지가 되기도 했다가, 북한정권의 사주로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최악의 적이 되기도 했다. 정상적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이 곳에서 이들은 생존을 위해 체제에 순응해 갔다.

이들이 북한 생활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김일성의 교시를 암기하고, 주체사상에 대한 학습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푸른 눈의 외국인들은 매일 아침 ‘우리 위대하신 수령 김일성 동지의 가르침은 이러하다’로 시작되는 기나긴 구절을 암송해야만 했을 때, 이미 이 나라에서의 탈출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자발적으로 비무장지대를 넘어온 이들 네 사람은 이용가치가 높은, 냉전시대의 자랑스러운 전리품이었다. 때문에 북한 당국은 이들에게 전쟁 포로와 같은 혹독한 대접을 하지는 않았다.

젠킨스는 “대체로 충분한 식량을 배급받았고 눈과 비를 피할 집도 있었으므로 저 일그러진 국가에서는 그나마 극소수의 행복한 집단에 속했다. 그러나 다른 어떤 나라와 비교하더라도 당시의 내 생활수준은 바닥중의 바닥이었다”고 회고한다.

젠킨스와 미군들은 공화국 말살을 책동하는 ‘악덕 미국인’ 배우가 되어 선전용 포스터와 영화에 출연했다. 군사학교에서 장래의 군 간부들을 대상으로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젠킨스는 귀환 후 미국 군법회의에 회부됐을 때 적을 위해 봉사했다는 혐의가 인정됐으나, 본인과 가족의 신변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판단이었다는 점이 정상 참작되기도 했다.

북한에서 보냈던 15년간의 삶에 아무런 의미도 찾지 못했던 젠킨스에게 제 2의 인생의 시작된 것은 일본 납치피해자 소가 히토미와 결혼한 이후부터다. 히토미와의 결혼이 25년 후 자유의 세상으로 탈출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올지 이 당시엔 상상도 못했지만…

1980년 초 젠킨스 부부는 외국인전용 백화점에서 납치 피해자들을 자주 만날 수 있었다. 레바논, 마카오, 루마니아 등 세계 각지에서 납치된 피해자들이 평양이란 거대한 감옥에 갇혀 있었다. 1977년 납치된 요코다 메구미와 요도호 납치범들에 의해 스페인과 덴마크에서 납치된 이시오카 도오루와 아리모토 게이코 부부 등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납치 피해자들도 만났었다.

왜 납치 피해자를 구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가?

히토미와 메구미는 약 1년 반 정도 같이 살았는데, 고향을 강제로 떠나온 두 소녀는 눈물로 밤을 지새우며 일본의 부모ㆍ형제를 그리워했다. 히토미는 이후 메구미를 만날 수 없었으며, 메구미가 죽었다는 북한 당국의 발표도 확신할 수 없었다.

▲ 2002년 10월 15일. 히토미가 일본으로 떠나기 직전에 평양공항의 주기장(駐機場)에서. 왼쪽부터 첫째 딸 미카, 메구미의 딸 혜경, 둘째 딸 브린다 <사진=고백>

젠킨스는 북한 당국에 의한 납치 피해자들이 이렇게 많음에도 각국 정부가 이들의 송환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여러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납치나 사기를 당해 자신의 의사와 전혀 상관없이 북한에 감금되고 있다. 하지만 어째서 각 나라는 납치되거나 구속된 자국민을 되찾으려고 애쓰지 않는 것일까? 왜 정당한 권리로서 돌려보내 달라고 주장하고 중대한 외교 문제로서 북한에 의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일까? 그런 노력을 기울이는 나라는 일본 뿐이라는 사실을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2002년 9월 17일 김정일은 일본 고이즈미 총리와의 정상회담을 통해 북한이 일본인을 납치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시인한다. 이후 북한과 일본간 납치문제 협상이 여러 차례 벌어지고, 히토미를 비롯해 젠킨스와 두 딸(미카와 브린다)도 일본으로 귀환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젠킨스에게는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다. 그는 아직도 40년 전 탈영한 ‘미 육군 찰스 로버트 젠킨스 중사’의 신분으로, 미국 육군으로 복귀한 탈영범 가운데 탈주 기간이 가장 길었던 병사로 기록되었다. 주일 미군기지인 캠프 자마로 복귀해 군법회부에 회부된 그는 30일간의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젠킨스는 히토미의 고향인 사도섬에 정착했고, 미국의 고향집도 방문했다.

한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반평생을 북한 땅에서 살아야 했던 기구한 운명의 사나이. 젠킨스가 체험한 북한은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두 번 다시 빠져나올 수 없는 ‘개미 지옥’ 그 자체였다.

북한의 우상화교육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던 젠킨스의 첫째 딸 미카는 공화국을 배신할 수 없다며 일본행을 반대했었다. 그러나 지금 미카에게 농담으로 “북한으로 돌아갈까”라고 물으면 언제나 똑같은 답이 돌아온다. “아버지 혼자 가세요. 전 절대로 안 갈 테니까요.”

양정아 기자 junga@daily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