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자’ 꼬리표와 ‘탈북자’ 꼬리표

하루는 우리 옆집에 젊은 A씨가 두 딸을 데리고 이사를 왔습니다. 그런데 A씨는 한 달이 되도록 늘 고민에 잠겨서 동네 사람들과 일절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다 못해 제가 먼저 A씨에게 무슨 고민이 있는가 하고 물어보았습니다.

양녀로 보낸 막내딸 때문에 재혼을 못했던 A씨

남편과 일찍 사별하고 혼자서 두 딸을 키워오던 이 여성은 몇 달 전 한 남자를 알게 되었고, 착하고 성실한 인품에 반해 재혼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군(郡) 공민등록과에 재혼신고를 하려고 찾아갔는데 “막내딸의 행적을 입증하기 전에는 절대로 재혼을 허용할 수 없다. 막내딸을 어떻게 했는가? 죽였는가? 팔아먹었는가?”라는 청천벽력 같은 대답만 듣게 된 것입니다. A씨는 이미 재혼하기로 약속한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습니다.

리수희
1931년 자강도 출생
1996년 탈북
현재 중국 長春에 거주

십여 년 전, A씨는 셋째 딸을 낳기 위해 병원에 입원 했는데, 그때 그만 남편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뜨게 되었습니다. 아이를 나은지 하루 만에 남편의 장례까지 치루어야 했던 A씨는 남편의 죽음에 대한 충격과 앞으로 세 아이를 혼자 키워야 한다는 막막함에 사로잡혀 한 달 동안 밥 숟가락도 들지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고 했습니다. 보다 못한 동네 사람들이 “간난아이는 형편이 좋은 집에 양녀로 보내자”고 A씨를 설득을 했고, A씨는 ‘내가 데리고 있어 봐야 하루 세끼 밥이라도 배불리 먹일 수 있겠는가?’하는 생각에 막내딸을 다른 집 양녀로 보내기로 결정했다는 것이었습니다.

A씨가 재혼 신고를 하려고 군(郡) 공민등록과를 찾아가서 막내딸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자 공민등록과는 마치 전쟁이라도 일어난 듯 야단 법석이 났습니다. 공민으로 기록되어 있는 아이가 실제로는 살았는지, 죽었는지, 어디 사는지 조차 파악할 수 없으니 공민등록과의 지도원부터 노발대발 날뛰게 되었고, ‘너 때문에 내 목이 날아가게 되었다’며 A씨를 향해 온갖 쌍소리과 모욕을 퍼부었다고 했습니다.

양녀로 떠나 보낸 막내 딸에 대한 죄책감, 두 딸에 미안함, 그리고 뱃속에 있는 새 생명에 대한 고민 때문에 A씨는 눈물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A씨는 “좋은 자리에 새로 시집가겠다고 10년 전에 내 손으로 버린 자식을 다시 찾아간다면 세상사람들과 그 아이가 나에게 뭐라고 하겠는가?”며 “이제는 정말 죽고 싶다”는 말만 되풀이 했습니다. 저는 세대주 없이 여자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겪어본 형편이라, A씨의 사정을 알게 되자 모른 체 외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딱한 사정을 외면 할 수 없어 자진해서 길을 떠나

저는 A씨로부터 막내딸을 양녀로 소개해준 아주머니가 옆 마을에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 아주머니를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 아주머니 말이 “그 아이를 데리고 간 부부가 지금 어디 사는지 나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 남자는 군관이라고 했고 군용차를 타고 와서 아이를 데리고 갔으니, 이 근방의 군부대를 돌아다녀 보면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일단 군(郡) 공민등록과의 지도원을 찾아가서 “내가 아이를 찾아 볼 테니 아이를 찾아오면 A씨의 재혼 서류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지도원은 “우리도 한 달 동안 여러 사람을 동원해서 찾아 보았으나 아직 해결을 못해서 걱정이니, 아주머니라도 저희들의 사업을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고 깎듯이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속으로는 A씨를 도와주자고 마음을 먹었지만, 막상 아이를 찾자고 하니 방법이 막막했습니다. 당시는 김일성씨가 죽은 지 몇 달 지나지 않은 때라 국내정세가 대단히 복잡하고, 남북간의 정세도 극도로 긴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어디든 함부로 돌아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통행증도 없었고 수중에 돈도 없으니 길을 떠나자면 우선 먹는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약국에서 ‘령심환’ 5백 알을 사서 조그만 주머니에 넣어 집을 떠났습니다. 아이를 데리고 간 사람들이 군용차를 탔다고 하니 군대 가족은 틀림없는데 군대는 동쪽에도 있고, 서쪽에도 있는데 어디로 가야 하는가? 물론 차를 탈 수는 없었습니다. 통행증도 없고 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어차피 군대는 산골에 있으니, 산골 길을 따라 걷자’는 것이었습니다.

이틀 동안 산골을 헤메다 보니 내 행색이 초라해지고 누가 봐도 의심스러운 사람으로 보일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장사꾼이라면 등에 짐 보따리라도 있을 텐데 손에 조그만 약통 하나 들고 아이를 찾고 다닌다니 누가 믿어주겠습니까? 한번은 어느 산골의 농촌길을 걷다가 그 동네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사람들이 나를 보고 “간첩이 아닌가?”하고 의심을 하는 바람에 끌려가서 속옷까지 다 벗어 보이는 소동도 있었습니다. 제가 초급 당비서에게 “당비서 동지 저는 군(郡) 공민과의 사업을 방조하려 길을 나선 사람입니다. 저의 지도원동지에게 전화를 해보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을 하니, 전화확인을 하고 나서야 모든 것이 해명되었습니다.

끼니 때가 되면 산골의 집들을 찾아가 “내게 령심환이 몇 알 있는데 혹시 필요합니까? 밥 한 그릇만 주시면 약을 드리겠습니다”며 밥을 얻어먹으며 걷고 또 걸었습니다. 집을 떠나 3일째가 되어 ‘이제는 나도 어쩔 수 없구나!’하는 실망감에 산마루에 올라 앉아 낙심하고 있을 때 멀리서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순간 ‘기차역이 가까이 있겠구나, 기차역에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혹시 소문을 알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지막으로 기차역까지 가보기로 결심하고 다시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나이는 같은데 생일과 고향이 틀려

산골기차역은 크지 않았습니다. 역에 들어서서 밤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혹시 십 년 전에 여자 아이를 데려다 키우는 집이 없습니까?”하고 물어보았습니다. 한 남자가 “우리 동네에 그런 사람이 있다”며 자기네 동네 가는 길을 알려주었습니다. 사람들이 밤차를 타고 떠나자 저 혼자 역에서 쪼그리고 쪽 잠을 자고, 다음날 아침 길을 떠났습니다.

마을 입구에서 한 아주머니를 만나 십 년 전에 여자 아이를 데려다 키운 집을 물어보니 곧장 그 집으로 데려다 주었습니다. 하지만 아이의 나이는 동갑이었으나 생일도 틀리고, 데려온 고장도 틀렸습니다. 저는 지치고 지쳐서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이제 집에서 가지고 나온 령심환도 다 떨어져서 밥 얻어 먹을 곳도 없고, 전날 기차역에 쪽 잠을 자서 그런지 온몸이 쑤시고 힘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상의할 사람도 없고 혼자 자문자답하길 반나절, 그 동네에서 6km정도 떨어진 곳에 큰 군부대가 있다는 말을 듣고 마지막으로 그곳을 들려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 군부대를 향해 걸으면서 또 여러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친 엄마가 아니니 모유를 먹었을 리 없고, 아기가 모유를 먹지 못했으면 앓기를 잘하니 병원으로 찾아가보는 것이 좋겠다!’

군부대 사택마을에 도착하자, 저는 누구에게도 묻지 않고 곧장 병원 소아과를 찾았습니다. 조용히 소아과 의사선생님을 만나서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니, 웃으면서 아이의 집을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절대로 병원에서 알려주었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기적과 같이 아이를 찾아

아이 집을 찾고 보니 역시나 군인가족이었습니다. 그 핏덩이가 인민학교 3학년이 되어서 학급반장까지 하는 똑똑한 아이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저는 우선 그 집 가족들을 안심시켜야겠다고 생각해서 “아이를 데리고 가려는 것이 아니고, 아이가 이곳에 살고 있는 것만 확인하면 된다”며 자초지종을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절대 안심하고 잘 키워서 행복한 가정을 유지하시라고 당부하고 다음날 떠나왔습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군(郡) 공민등록과에 들려서 아이를 찾았다고 하니 모든 사람들이 대환영이었습니다. 등록과 성원들이 모두 모여서 저를 집중하며 마치 동물원 호랑이 구경이나 하는 듯이 쳐다 보았습니다. 처음 출발할 때부터 경과보고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지도원은 “아주머니는 정말 영웅입니다. 앞으로 출판사 기자도 만나셔서 이번 일을 세세히 알려주십시요”라며 칭송을 늘어놨습니다.

아이를 찾은 일로 공민등록과 지도원은 국가의 표창도 받고, 승승장구 출세도 했지만, 정작 제게는 엉뚱한 핍박과 감시가 돌아왔습니다. 지도원이 저를 상부에 추천해준다며 제 가족관계와 과거 행적을 조사한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군 당위원회에서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다 늙은 여자가 평범치 않다” “저렇게 능숙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은 배후에 뭔가 있는 것이다” “알고 보니 월남자 가족의 딸이었다” 등등 온갖 소문이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출신성분이 나쁘면 좋은 일을 해도 ‘감시대상’

막내딸을 찾은 A씨는 그 남자와 정식으로 결혼해서 웃으며 마을을 떠났지만, 제게는 ‘월남자 가족의 딸’이라거나 ‘배후가 수상한 여자’라는 감투가 씌어지게 되었습니다. 별안간 군당위원회의 ‘감시대상’이 된 것입니다. 기가 막히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몸이 부숴져라 일을 했고, 국가에서 시키는 일은 모두 다 해왔습니다. 그러나 끝끝내 ‘월남자 가족의 딸’이라는 출신성분의 꼬리표를 떼어낼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눈물을 흘리며 압록강을 넘은 이유는 내 조국이 싫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반세기 동안 저를 괴롭히고 괴롭혔던 출신성분이라는 꼬리표를 떼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욕심이었나 봅니다. 이제는 ‘탈북자’라는 꼬리표가 저를 따라 다닙니다. 중국공안이 무서워 내나라 말도 마음데로 못하고, 내나라 글씨도 마음데로 쓸 수 없습니다. 마음 속으로 부르는 찬송가를 통해서 제 고통과 제 마음을 표현할 뿐입니다.♣

나의 맘에 수심구름 가득하게 덮이고 슬픈 눈물 속절없이 흐를 때
인자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부르사 나를 위로할 이 누가 있을까

무거운 짐 등에 지고 인생길을 가는 자 힘이 없어 쓰러지려 할 때에
능력 있는 팔을 펴서 나의 손을 붙들어 나를 구해줄 이 누가 있을까

지은 죄를 돌아보니 부끄럽고 괴로와 자나 깨나 마음에 화평 없을 때
추한 죄인 용납하여 품에 안아주시고 깨끗한 마음 주실 이가 누굴까

요단강을 건너가서 시온성을 향할 때 나와 항상 통행할 이 누굴까
두려움의 검은 구름 모두 헤쳐버리고 나의 갈 길 인도할 이 누굴까

주예수 주예수 주예수 밖에 누가 있으랴
슬퍼 낙심 될 때에 내 친구되시는 구주예수밖에 다시 없도다

-찬송가 83장 <나의 맘에 수심 구름>–

소셜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