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에서 만난 또 하나의 Korea, 북한

▲ 인공위성에서 바라 본 한반도. 불빛이 환한 남한과 달리 북한은 칠흙같은 어둠에 쌓여있다.

제겐 한 살 위의 오빠가 한 명 있습니다.

여느 형제자매들과 마찬가지로 정말 많이 싸우면서 자랐죠. 집에서는 원수가 따로 없을 만큼 으르렁 대면서 지냈지만, 훤칠한 키에 잘생긴 외모의 ‘우리 오빠’는 제게 늘 자랑거리였습니다. 학창시절 반장을 도맡아 했던 오빠 덕에 저까지 유명인사가 되었던 시절도 있었으니까요.

복도를 지나가면 으레 들려오는 “저애가 ㅇㅇㅇ동생이래” 라는 선배언니들의 수군거림도 그다지 싫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럴 때면 아무리 크게 싸운 다음날이라도 오빠에게 대들던 기억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남들이 알아봐주는 ‘누군가의 동생‘이라는 우쭐함에 콧대가 높아지곤 했습니다.

제가 워싱턴에 와서 ‘한국의 정체성’에 대해 가장 크게 느꼈던 것은 김치의 종주국도, 2002 월드컵을 성공리에 치러낸 국가도 아닌 바로 ‘북한의 또 다른 이름, 그들의 형제’라는 것입니다.

집안에서는 아무리 헐뜯고 싸워도 밖에 나가면 ‘우리 오빠’, 혹은 ‘내 동생’이라며 한껏 자랑하고 싶은 마음. 그것은 내 조국의 형제라고 해서 다를 게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랑보다는 어깨가 움츠러드는 것이 먼저인 것이 우리 형제가 처한 상황이었습니다.

국제사회에서 보는 한국 ‘북한의 또다른 이름’

처음 대면한 사람들과 “한국에서 온 OOO입니다” 라는 소개 후에는 자연스레 북한의 이야기로 화제가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럴 때면 우쭐한 마음 대신 남들 앞에서 내 조국의 형제를 자랑스럽게 말할 수 없는 우리의 상황이 그저 야속하게만 느껴졌습니다.

자랑스러워 할 수 없음에 대한 탄식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형제니까’ 하고 그저 공기 같은 존재로 인식했던 무관심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지, 우리가 섣부른 햇볕정책으로 일관하고 있을 때 그들의 인권이나 탈북자 문제는 어떠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국제적인 상황을 고려해 보다 객관적이고 올바른 잣대의 정책을 취할 필요가 있음을 이제야 느낀 한 젊은이의 안타까움입니다.

며칠 전에는 기숙사의 친구 한 명이 제게 탈북자에 대한 질문을 해왔습니다.

“그레이스, 오늘 내가 일하는 곳에서 탈북자의 해결방안에 대한 세미나가 있었어. 그런데 한 영상물을 보면서 정말 눈물이 나올 뻔 한 걸 겨우 참았어. 차마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그들의 상황은 처참하더구나. 북한을 탈출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고 있는데 미국이나 중국은 엄격한 제한정책으로 탈북난민들의 진입을 막고 있는 상황이고 말이야. 한국은 어떤 정책을 취하고 있는지 궁금해. 무조건 다 수용하는 쪽인가? 너 한국에서 탈북자 만나본 적 있어? 남한으로도 매년 상당한 수의 탈북자가 건너간다고 하던데”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저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탈북자의 실태니 북한의 인권이니 말로는 떠들어도 그저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인 냥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저였으니까요.

한반도를 바라보는 세계의 시각이 북한문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은 워싱턴 포스트나 이코노미스트만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민족’만 앞세웠을 뿐, 정작 ‘북한’에 무관심했던 우리

제가 워싱턴에 온 이래로 한반도에 관한 기사가 이 두 매체에서 딱 두 번 크게 다뤄졌는데요, 하나는 2월 11일자 이코노미스트에 실렸던 “A Frustrating Game of Carrots and Sticks”라는 6자회담의 향방에 관한 칼럼이었고, 다른 하나는 2월 28일자 워싱턴 포스트에 개제된 “Two Koreas Learn to Work as One”이라는 개성공단에 관한 기사였습니다. 중국이나 일본, 인도 등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 관한 기사가 주로 경제에 집중된 것과는 달리 한국에 관한 기사는 대부분 북한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서로 각자의 길을 걷게 된 지 반세기가 지나고 세대가 바뀌면서 우리는 ‘형제’라는 이름이 주는 그 애틋함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록 남과 북으로 갈려있지만 여전히 우리는 ‘코리아’라는 이름을 공유하고 있고, 그 얼굴생김과 말씨도 너무나 비슷한데 말입니다.

다수의 한국인들이 나와는 상관없는 문제로 북한의 상황을 도외시할지언정 국제사회는 여전히 ‘한반도’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고, 비록 ‘자랑하고 싶은 형제’는 아니지만 그들이 우리와 같은 피를 나눈 민족이라는 것은 변치 않는 사실입니다.

핵문제, 6자회담, 인권문제, 탈북자 문제 등 아직은 넘어야 할 산이 많지만, 북한을 어디에서도 ‘자랑하고 싶은 형제’로 만드는 꿈은 결국 우리들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 그리고 그 꿈이 요원한 것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최윤영/한국외대 이란어과 4. 조지타운대학 어학연수 중

※ 대학생 웹진 바이트(www.new-leaders.com)의 양해를 구해 게재합니다.